[BOOK 100] 불길 속으로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3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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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들어가 얼렁뚱땅 1년을 보내고 난 후, 나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다. 많은 것이 낯설게 느껴지는 기분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사실 새로운 환경이 아니라 나 자신이 매일 매일 더 낯설어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불안은 여러 가지 얼굴을 하고 머리와 가슴에 들고 났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차라리 관계 혹은 미래에 대한 고민 따위라면 그 구체적인 현실감에 감히 혼란이 끼어들 틈이 없었을 텐데 그것조차도 아니었다. 삶을 통째로 뒤흔드는 사건 같은 것도 물론 없었다. 지난 시간을 살다간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20대 초반의 인간이란 대체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호르몬의 장난질이라고 하기에는 좀 늦은 감이 있었다. 사춘기를 건너뛰고 오춘기로 진입하는 바람에 더 극성맞은 성인식을 치르고 있는 걸까 생각도 했다.

10대에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가끔 우스운 짓도 하고 다녔지만, 부모님이 쳐둔 울타리 안에서, 가만가만, 해야 할 공부에 집중하며 얌전히 지냈다. 나는 학교도, 선생님도, 공부도 좋아했고, 대학에 가서 원하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질풍노도와는 거리가 먼 평온한 시절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미친 듯이 몰아쳐 오는 바람과 파도 같다고 표현하는 것인지 닥쳐올 질풍노도의 시기가 두렵다는 생각도 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시절 나의 바다는 잔잔하기만 했다.

'20대 초반'이라고 쓰고 나니까 10대와 20대의 삶 사이에 실제로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렇게 시간을 나누어 생각하니 차이가 발견된 것인지 문득 헷갈린다. 분명 전에 없던 징후들이 생겨나긴 했는데 그게 성인이 되었으니, 대학생이 되었으니, 20대가 되었으니, 생겨난 것인지는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에게는 시간의 흐름을 또각또각 나누어 생각하려고 하는 습관이 있다. 10대와 20대, 작년과 올해라는 말로 언제나 하나의 덩어리일 뿐인 지금을 밀가루 반죽 나누듯 뭉떵뭉떵 나누어 놓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편해서가 아니라 거대한 덩어리를 더듬어 시간의 본질을 파악하려 들면 이내 감당하기 힘든 막막함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다. 우주를 떠올리면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이 너무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지구과학 교과서에 실린 성운이니 성단이니 하는 것을 찍은 천체 사진들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그 시커먼 막막함이 때로 공포였고, 그 공포에서 빠져나오려면 재빨리 우리 은하와 태양계를 떠올리고,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을 읊고, 달과 지구, 중력과 가시광선을 체험하려 애써야 했다. 무한한 것이 무서워서 끝을 생각하거나 시간과 공간을 아무리 쪼개어 본들 수렴하는 상태에 머물게 될 뿐 쪼개고 나누는 일에도 끝은 없고, 한없이 가까워지고 있지만 끝에 도달할 수는 없었다. 뭐냐 이거. 끝이 없는 끝이라니. 세상에.


질풍노도, 멀리서 아른거리던 그 바람과 파도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기이한 모습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습격했다. 조용한 방에 누워 자고 있는데 우악스러운 노크 소리에 방문을 열고 보니 그 불안의 징후라는 것들이 의기양양하게 서 있었다! "잇츠 쇼타임!" 그것들이 외쳤다. 분위기를 파악할 새도 없이 방안으로 쳐들어온 그것들에게 양팔을 붙들린 채 방에서 끌려 나와야 했다. 문간에 주저앉아 그것들이 말끔하게 정리된 내 방안을 어지럽히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온몸을 던져 막아도 별 소용이 없을 거라는 걸 곧 깨달았다. 그중에는 그런 내 옆에 가만히 앉아 등을 토닥이며 내 눈치를 살피는 녀석도 있었다. 그것은 내 귓가에 조곤조곤 속삭였다.

"네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것을 없었던 셈 치고 0에서부터 다시 쌓아도 지금의 무게는 이전과 다르지 않을 거야. 설마 네가 살아낸 지난 시간이 무의미해졌다고 억울해하고 있는 거야? 지금의 무게는 누구에게나 같아. 지금을 살아낸다는 건 한 살배기에게나 아흔 살 먹은 노인네에게나 똑같이 어려워. 다만 모르고 감당하는 것과 알고 감당하는 건 다르지. 둘 중 어느 편이 나을 것 같아? 이제 하나둘 알게 될 거야. 아니 알아야 해. 그래야 할 나이거든."

그것들, 여러 모양의 감정들이, 경계 없는 덩어리로서의 생각들이, 들불처럼 일었다. 땔감도 없는데 시시때때로 불이 타올랐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불길 너머로 사라져 그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불을 키울 수도, 그렇다고 잠재울 수도 없는 상황 속에 있었다. 가슴에서 잿가루가 날리기 시작했다. 특히 곤란한 것은 감정이었다. 기쁨 혹은 슬픔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낯설었고, 무엇보다 그 감정들에는 근거가 없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분명 어떤 덩어리가 가슴 안에서 요동치며 나를 지배하고 있는데 이게 무엇인지, 왜 생겨난 것인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휘둘렸다.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성수역 승강장에서, 한남대교를 건너던 471번 버스 안에서, 발끝을 보며 걷다가, 갑자기, 가슴 위에 무거운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둔 것처럼 갑갑해지고, 그 폭도 깊이도 가늠할 수 없는 검은 구멍 속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 어떤 날에는 시뻘건 비참의 불길이, 어떤 날에는 새파란 환희의 불길이, 어떤 날에는 새하얀 비애의 불길이 일었다. 생각이란 것은 또 얼마나 고약한지 멋대로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는 몸집을 키웠다. 나는 그것들을 다스리는 방법을 잘 몰랐다.

좀 낯간지럽고 우습기도 하지만 내 마음에 일었던 들불에 땔감이 되었던 것은 ‘관념’이었다고 쓰고 싶다. 나는 ‘관념의 세계’ 한복판으로 진입한 것이다. 그것들은 덩어리진 채로 돌담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어느덧 돌담이 꽤 높았다. 나는 제법 견고하게 쌓인 돌담 안에서 세계의 끝을 상상하고, 나의 시작을 떠올렸다. 그때쯤 처음으로 사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답을 찾고 싶었다. 일찍이 종교로부터 답을 찾는 일은 그만두었기 때문에 그 과정은 무척 외로웠다. 삶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아름다운 것이라고들 떠드는 사람이 많았는데 나는 그것이 웃기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다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거대하고 눈부신 '사는 이유'를 등 뒤에 숨겨두고 겸손한 체 위선 떠는 것은 아닐까도 생각했다. 내게도 그것이 필요했다. 자주 행복했지만, 그런 기분이 모여 삶을 이룬다는 건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그보다는, 삶의 의미, 세계가 나에게 막막한 불안을 선사한 이유, 그 불안을 극복하고 그 끝에 얻어야 할 것,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대학 수업에서도 그런 건 가르쳐주지 않았다. 사람을 몇만 명이나 모아놓고 그런 걸 함부로 가르쳐 줄 리가 없었다. 언제나 보물은 숨겨져 있는 법이니까. 내가 찾아내야 했다. 나는 스스로를 가르쳤다. 돌담은 내 성장의 징표고 훈장이었다.

감정의 불길에 이름을 붙이는 일도, 내가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있는 자리가 어딘지 확인하는 일도 어려웠던, 그 혼란한 시기에 김승옥을 읽었다. 문학이라면 영감이나 감동을 선사할 것 같지만, 그때 내게 김승옥의 소설은 문학이라기보다는 개념서처럼 읽혔다. '관념의 세계'에 대한 이론서 말이다. 그렇게 청년 김승옥과 만났다. 그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 사이에는 4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 이야기 속 모든 인물과 배경이, 말과 생각이, 사건과 메시지가, 그야말로 모든 단어와 문장이 하나도 빠짐없이 나를 위해 탄생한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 문학 교과서에서 그의 소설을 읽고 배울 때 들었던 말들이 모두 순 엉터리처럼 느껴졌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내가 알고자 하는 관념으로서의 시커먼 공기덩어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는 일찍이 이야기 속에 낱낱이 설명해두었다. 인물들의 입을 통해, 때로는 자연물을 통해, 그가 달아놓은 각주들을 하나둘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이 미워졌고 더구나 사람을 미워하는 방법을 배워버린 내가 어두운 고향에서 또 어떠한 광태 속에 휩쓸려버릴는지, 나는 벌써부터 울고 싶었다. 그러나 울고 싶은 만큼의 반작용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장담할 수도 있긴 했다. 해내는 거다. 세상이 당연하다고 내미는 것을 나 역시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받아들이도록. 평범한 것을 흡족하게 생각하며 받아들이도록. '여보게. 딴생각 말고 착실히 공부해서 좋은 데 취직하여 착한 여자 얻어서 아들 딸 낳고...' '네, 저도 그럴 작정입니다' 라고 대답하도록. '분수에 넘치도록 욕심이 많은 사람이 자살하는 법이야. 욕심을 줄이면 되지 않나?' '선생님, 참 그렇군요'라고 생각하도록. '팔십이 다 되어가는 내가 끄떡없이 사는데 귓바퀴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괴롭게 어쩌네 앓는 소리를 하다니...' '할아버지, 존경하겠습니다.' _ 환상수첩, 1962, 김승옥



이후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살았다. 신나게.


사람들이 자꾸 나에게 몽상가라고 했다.


그럴 때면 몽상 아니라고 대꾸했다.


내가 쓴 글을 읽은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종종 물었다.


나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이렇게 생활과 멀어지고 있는 것일까 자주 생각했다.


때로 줄타기를 했다.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경지(?)에 도달했다.



그리고 2020년에 다시 <환상수첩>을 읽었다. 몇 년만인지 모르겠다. 며칠 뒤에는 영화 <가버나움>을 봤다. 왜 환상수첩을 다시 읽던 그때에 이 영화를 보게 되었을까? 그 영화를 보며 벌을 받는 기분을 느꼈다. 20대의 <환상수첩>으로부터 풍겨오는 곰팡내에 취해있던 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밤을 새워 싹싹 빌었다. 잘못한 것이 없지만, 부끄러웠다. 이 영화를 괜히 봤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생활 곁으로 제법 가깝게 다가왔다고 생각했는데 생활이 내게 따지기 시작했다.

"네가 등진 생활의 세계는, 폐병을 치료할 약값을 벌기 위해 춘화를 그리는 세계야. 떠돌이 서커스단의 어린 소녀 단원이 장대를 들고 줄을 타는 세계야. 때로는 엄마 대신 거짓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가서 트라마돌을 받아오는 세계야. 그것을 빻아 주스를 만들어 거리의 소년들에게 팔아 오늘의 양식을 마련하는 세계야. 책 속으로, 화면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세계. 너의 집에도, 이웃집에도 있는 세계. 친구들이 사는 세계. 그 세계를 등졌던 것에 대해 낭만 따위 느끼는 일은 없어야지. 그것이야말로 네가 혐오하는 위선이야."


그래. 내가 해야 할 일은 관념의 세계에서 생활의 세계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다. 두 세계를 하나로 합쳐야 한다. 그 세계는 말과 글이 삶을 배신하지 않는 세계. 앞다투어 서로가 서로를 당당하게 증명하는 세계. 나의 삶이 나의 글의 근거가 되는 세계. 나의 글이 나의 삶을 설명하는 세계. 춘화를 그릴 붓과 종이를 가방에 넣고, 여기 안마쟁이가 지나간다고 알릴 퉁소를 한 손에 들고, 줄과 장대를 어깨에 걸고, 트라마돌 처방전과 트라마돌 열 봉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그 세계로 걸어 들어가고자 한다. 그리고 여전히 내가 관념의 세계에서 뛰고 뒹굴며 배운 노래를 부를 것이다. 허공에 주먹을 내지르면서. 그리고 나면 가버나움의 자인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미안함마저 덜기에는 뻔뻔한 구석이 있으니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고 싶다.

다시 그의 소설을 읽는다. 여전히 생각을 키우는 일이 어렵지만, 적어도 덩어리 진 채 두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고 있다. 그리고 그때 쌓은 그 돌담 너머로 소리를 질러보고 있다. 기운 돌담을 다시 세우기도 하고, 영 보기 싫은 부분은 발로 냅다 차서 무너뜨기리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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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말했던 다 전해주지 못한 말이 이것이었군요. 이건 너무 충격적으로 좋아요. 뭐라 덧붙일 수 없을만큼

 3 years ago 

솔직히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왜 그런지도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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