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100] 중고의 세계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2 years ago

메인마켓풍경.jpg



아무래도 기후 위기의 최후 생존자(?)는 우리 반도인이 아닐까 가끔 생각한다. 우리는 매년 시베리아의 추위와 아프리카의 더위를 견디고 있지 않은가. 태풍도 일 년에 몇 차례나 맞는다. 해마다 폭설과 폭우에 사람이 죽고 다치는 걸 보면서 왜 예방하지 않고 매번 똑같은 피해를 보고 있나 답답하기도 했는데, 자연재해라는 것은 애초에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니 예방보다는 빠른 대응과 복구가 중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지난여름 폭우에 지하철역 곳곳이 침수되었을 때는 몇 시간 만에 뚝딱 복구하는 것을 보고 좀 경이로웠다. 횡단보도와 버스 정거장에 햇볕을 피할 우산이나 추위를 피할 부스를 설치하는 도시가 세계에 몇이나 있겠는가. 제설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눈이 그렇게 내려도 서울에서는 쌓인 눈을 오래 구경하기 쉽지 않다. 반도인의 신체와 정신 역시 진화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영하 5도 정도의 기온은 '포근하다'고, 영상 25도 정도의 기온은 '선선하다'고 느끼도록 말이다. 폭염에도 뜨거운 국물 요리를 먹고, 엄동설한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도록 말이다. 신기한 반도인들.

더위도 추위도 많이 타는, 비도 싫고 미세먼지도 못 견디는, 나 반도인. 한국을 떠나 위도와 해발고도를 달리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려면 날씨의 변화에 재빨리 적응해야 한다. 아니, 내가 움직이지 않는 동안에도 부지런한 지구는 계속 움직인다. 일기 예보에 비 소식이 있어도 나갈 때 비가 오지 않으면 우산도 챙기지 않는 내게, 미래의 날씨를 위한 옷가지를 준비하는 일은 너무 귀찮은 일이다. 무거운 짐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결국 옷을 사 입어야 할 때가 많다. 대도시에 있다면 쇼핑몰에 가서 SPA 브랜드의 할인 상품을 산다. 내가 가진 SPA 브랜드 옷 중 90%는 그렇게 외국에서 산 것이다.

인도 다람살라와 라다크에서 몇 개월씩 살 때는 상황이 좀 달랐는데, 이 시골 산골짜기에 쇼핑몰이 있을 리 있나. 살 수 있는 옷가지란 오로지 외국인 관광객만 입는 알록달록 조악한 천 쪼가리에 불과하거나(물 빠짐은 기본, 세 번 정도 빨면 10년은 입은 옷처럼 변해 버리는) 시장에서 파는 기성복인데 한국인의 눈으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옷들이 대부분이라 선뜻 살 수가 없었고. 그래서 중고 시장에 자주 다녔다. 다람살라의 중고 옷 가게에서는 주로 외국인 여행자들이 떠날 때 남긴 옷가지와 각종 잡동사니를 팔았는데 사러 오는 사람은 대부분 현지 티베트인이었다. 그곳에 들락거리는 나를 보고 한 티베트 친구는 자신은 절대 모르는 사람이 입던 옷은 입지 않는다며 조심하라고 경고하곤 했다. 옷에는 사람의 에너지가 묻기 때문이라나. 그 이야기를 듣고 잠깐 찝찝했지만, 이내 개의치 않고 계속 사다 입었다. 알 게 뭐람. 내 에너지가 깨끗하니 괜찮아.

라다크의 중고 시장은 그 규모부터 다르다. 몇 개 골목 전체가 중고 물품을 파는 가게들로 이루어져 있다. 도로 사정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라다크는 여전히 오지이고 인구수도 적다. 그런데 왜 레 시내에 이토록 거대한 중고 시장이 형성된 걸까. 생각해보면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쇼핑몰 대신 중고 시장이 생긴 것이다. 라다크 겨울 기온은 영하 20도까지 내려가지만, 인도 땅의 대부분은 더운 땅이다. 델리의 1월 최저 기온은 영상 10도 안팎이다. 인도에서 살 수 있는 겨울옷은 라다크의 혹한을 생각하면 그 퀄리티가 형편 없다. 게다가 막상 진짜 추운 동네인 라다크에는 매장도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친구들은 라다크를 떠나 따뜻한 동네로 피한을 떠난 지인에게 겨울옷을 보내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빠루 게스트 하우스 귤멧 아저씨도 인도에서 살 수 있는 겨울 외투는 질이 너무 나쁘다고 늘 불평이었다. 올겨울에는 귤멧 아저씨가 돈을 보낼 테니 한국에서 괜찮은 겨울 외투를 사다 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하길래 젠젠과 돈을 모아 부부를 위한 겨울 자켓 두 벌을 선물했다. 몇 년 전 동물 가죽으로 지은 옷을 입지 말라는 달라이라마의 호소에 티베트 유목민들이 가죽옷을 모두 태워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후드에 달린 털을 싫어할 수도 있겠다 생각하긴 했는데 아저씨가 진짜 모자의 털을 떼어버린 채 옷을 입고 인증샷을 보내왔다. 아저씨 근데 그 옷 안에 든 거 거위털이에요...

아무튼 다람살라와는 달리 라다크 중고 시장에서 파는 물건들은 동네 바자회 수준이 아니라 중고 의류 전문 업자들의 영역이었다. 런던이나 파리에서 볼 수 있는 빈티지 마켓이랑 비슷하다. 겨울을 나기 위한 옷을 마련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두꺼운 외투나 후리스, 스웨터가 주요 상품이다. 특히 스웨터들이 예쁘다. 초모도 중고 시장에서 블랙야크(우리가 아는 그 블랙야크!) 패딩 점퍼를 득템했다고 신나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옷을 헤뒤집어 보물을 찾아내는 재미는 꽤 짜릿했다. 옛날에 라다크에 살 때는 주인아저씨랑 친해져서 옷을 공짜로 얻어 입는 일도 있었다. 종종 카페 손님들을 데리고 중고 시장 투어를 떠나기도 했는데, 어떤 빈티지 매니아 손님은 열광하며 청바지를 열 장이나 사는 바람에 갖고 있던 짐을 버려야 했다.

엄마는 몇 달 전부터 당근마켓에 쓸모없는 물건들을 내다 팔아보라고 성화였다. 이 역시도 귀찮아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최근에야 시작했는데 이래서 사람들이 당근당근 하는구나 깨달았다.

  1. 이걸 누가 사갈까 싶은 것을 팔고 있다.
  2. 그걸 실제로 사는 사람이 있다.
  3. 사용자 폭이 매우 넓다. 지금까지 여섯 번 직거래 했는데 외국인과 고령의 노인을 만났다.
  4. 밈인 줄만 알았는데 만나면 실제로 '당근?' 혹은 '당근이세요?'라고 말한다.
  5. 스타벅스 레디백 아직도 팔린다. 올리고 10초 만에 연락이 왔다.

붕어빵이나 타코야끼 사 먹을 때마다 계좌이체 귀찮았는데 지갑에 천 원짜리 지폐 많으니 좋다. 조카를 위한 코인노래방과 뽑기도 당분간 문제없다. 마음만은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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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거위털 비밀은 지켜졌으면 해요. ㅜ.ㅜ ㅋㅋ
저기.. 세계 각지를 다니다보면 과일 많이 보세요? 보통 음식보다 비싼가요? 쉽게 살 수 있어요? 종류는요? 외국과일은 우리 과일보다 맛대ㄱ.. 맛이 많이 없다고 유툽 어디선가 봤는데 라라님 경험으론 어떠세요. 오늘 갑자기 궁금..

 2 years ago 

이런 귀여운 질문을. 후후. 과일은 진짜 한국이 세계에서 제일 비싼 것 같아요. 하지만 사과는 한국 부사가 제일 맛있고요. 귤은 역시 제주 감귤이 최고고... 딸기도 죽향 딸기가... 열대 과일 빼고는 역시 한국 과일이 최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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