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와 이산화탄소
내가 세상의 말과 세상의 상식과 세상의 가치관의 염려를 진지하게 듣고 그걸 선택했더라면 고등학교 때는 첫 사랑에게 마음을 품지 말았어야 하고 (남녀공학 학교였지만 사귀면 전학 보냈다) 여자가 감히 겁도 없이 혼자 네팔 배낭여행을 떠나지 말아야 했고, 한 술 더 떠 남미 여행, 멕시코에도 가지 말았어야 했다. 쿠바 여행을 간 것 까지 좋아, 근데 그 쿠바 사람 사랑한다면서 그 사람 탈출 시킨다고 미국으로 보내는 무리수는 결코 하지 말았어야 한다.
다 나를 생각해서 염려해서 말해주는 세상의 눈물겨운 친절한 오지랍을 내가 다 받아들였더라면 스팀잇에 내 사진도 올리지 말고 내 신상정보가 털릴 만한 어떤 정보도 올리지 말았어야 하고, 뭘 믿고 뭘 안다고 인터넷에서 만난 사람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속 깊은 얘기를 해서도 안 되었고 20세기소년에 덜컥 출근해 한 번도 일해본 적 없는 사람들과 카페를 해서도 안 되었다. 제 정신이라면, 세상의 규칙에 순응한다면 말이다.
내가 멕시코 여행을 간다고 하자 미쳤냐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절대 안된다며 나를 뜯어 말린건 엄마도 아빠도 아니었다. 어이없게도 평소 연락도 잘 하지 않는 한 번도 세상의 흐름에서 이탈한 적 없는 모범생이자 귀염둥이 핵인싸 친오빠였지. 오빠는 멕시코에 가면 총 맞아 죽을 거라고 나를 협박했다. 절대 김혜진 여행 떠나게 하면 안 된다고. 그때 나는 '나름대로 공부를 했고, 위험지역에 가지 않을 거고, 밤에는 싸돌아다니지 않을 거고 안전하게 여행할 계획이고 당신이 그리고 있는 멕시코의 이미지는 모두 미디어에 만들어낸 과장된 이미지다.'라고 설득해보려고 했지만, 그는 내 말의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무조건 거긴 위험해였다. 짜증나고 열받아서 이성적인 설득을 멈추고 '가서 총 맞아 죽겠더라도 난 가겠다. 한국에서 죽을 일은 얼마든지 있다. 만약 죽는다면 내가 감당한다. 그래도 간다.'라고 말해버리고 떠났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멕시코에서 단 한 번이라도 위험한 상황이 있었냐고? 아니. 도난 한 번 당하지 않았고, 좋은 사람들과 행복한 추억을 쌓았고 멕시코는 나의 제2의 고향이 되었고 지금도 멕시코가 그립고 심지어 멕시코에 가서 살려고 했다. 내 인생 최고로 행복했던 나날을 경신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말하겠지. 그건 네가 운이 좋아서 간신히 위험을 벗어난 거라고. 그들은 내가 사고를 당하기만 기다리겠지. 거봐. 걔 그럴 줄 알았어. 어딜. 정신 나간 행동이야. 이 말 한마디가 하고 싶어서. 내가 다녀와서도 오빠는 결코 '그때 내가 잘못생각했어.'라거나 '그땐 내가 너무했어.' 라고 말하지 않았다.
뭐 어디 이런 일 뿐이었을까. 쿠바에서 만난 알레조차 나보러 정신 나갔냐고 미쳤냐고 다그친 일이 다반사였다. 지는? 지는 이런 성향의 나를 만난 덕분에 좋은 추억을 쌓고 미국으로 가는 행운을 얻었음에도 그것은 그 일에 조금의 고려도 되지 않았다. 모두들 그랬다. 이건 나니까 괜찮지만 타인은 위험해. 멕시코에서 만난 사람들은 말했다. 멕시코인은 괜찮지만 과테말라 인은 안돼. 과테말라 인을 만나면 과테말라 사람이라 괜찮지만 쿠바인은 안 돼. 뭐 이딴 식이였다. 다들 자기들만 예외 상황이고 밖에는 날 호시탐탐 노리는 검은 손길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믿어선 안 된다고 했다.
정작 내가 그런 방어적인 자세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면 절대 만날 일도 좋은 일도 없을 사람들이.
나도 안다 알아. 그런 일 일어날 수 있다는 거. 그리고 그런 일 일어나면 파국이고 불행할 거고 돌이킬 수 없다는 거. 나도 안다. 알면서도 선택을 한 거다. 차라리 이런 구체적인 위험이 있고, 여긴 더 위험하고 여긴 이렇게 위험해라고 실질적인 조언이라도 해줬다면 귀담아 들었을 거다. 나도 뭐 죽고 싶고 위험을 겪고 싶어하지 않다. 나도 나 나름대로 다 생각이 있어서 안전 조치를 하고 다닌다니까.
미 쿠바노를 썼을 때도 사람들이 우려했다. 아니 남편있는 여자가 그런 책을 썼다고? 그걸 견디는 남자가 있다고? 절대로 남편한테 들키지 마세요. 남편 상처받아요. 부부관계는 괜찮을까? 심지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런 소리를 하니 나까지 불안해질 정도였다. 아 나의 L이 상처받으면 어쩌지. 나는 L이 상처받을까 무서워서 침대에서 막 울었다.
그런데 왠일, 그 고민을 한 게 무색하게도 L은 내 쿠바 이야기를 연재할 당시 모조리 다 읽은 상태였다. 물론 나는 까맣게 몰랐다. (이것도 L이 상처받아서 숨겼다고 누군가는 의심하겠지만 내 연재에 불편을 줄까봐 아무말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렇지 않았다. L은 나의 모험기를 재밌게 읽었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되서 좋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젠 만날 수도 없고 나의 현실에 다신 나타나지 않을 알레에 대해서 어떤 시기 질투도 분노도 없다고 명확히 오버하지도 과장하지도 않고 담백하게 말했다. 믿기지 않겠고, 대부분의 남자라면 당연히 견딜 수 없다는 걸 나도 알지만, L은 괜찮다고 우리가 괜찮다고.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고 그럴 리가 있냐고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혹은 날 안심시키고 있는 거라고 도끼눈을 뜨고 의심했다.
그럼 누군가는 말하겠지, 네가 운이 좋아서 그렇지 다른 남자였으면 어림도 없다고. 그러나 지금 현재 내가 함께 살고 있는 나의 현실의 나의 동반자는 운 좋게도 L이다. 놀랍게도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이런 흔치않은 성인군자 같은 마음이 태평양 같은 남자와 실제로 살고 있다. 정말로 지금 내 옆에 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몇 번이고 위험하다는 상황을 인지하고도 나는 결국엔 멕시코로 떠나는 삶을 선택할 사람이다.
L군은 화낼 일이 아니라고 했다. 산소와 이산화탄소 같은 거라 결코 바뀔 수도 인지할 수도 없이 이 사회에서는 자연스러운 태도라고. 이건 마치 애 안낳고 직장 안 가진 나를 걱정하는 부모님의 걱정같은 거라고 사람들은 평생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응. 세상을 설득할 힘과 능력은 내게 없고 그렇다고 세상의 잣대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안할 수 있는 사람이 나는 못 돼.
p.s. 이 글은 L군이 검수해주고 검토해주었으며 사실상 함께 작성했음을 밝힙니다.
p.s.2. 어차피 p.s.를 써봤자 다른 사람들은 L군의 속마음은 그렇지 않을거라고 생각할거라고 L군이 직접 말하고 나는 받아적었다. 이 모든 p.s. 는 L군이 쓴거다. 진짜다.
아니 이거 택슨님이 쓰신 글이에요? 어딨는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네
스텔라님 20세기의 여름은 멕시코가 아닙니다. 기쁘게 존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갈 수 없습니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네 마법사님께 감사드립니다. 뭐가 되었든 전 20세기 여름에 마법사님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20세기 여름에 끝까지 남아계셔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마법사님 제 댓글을 안 보실 수도 있고 저와 대화를 원치 않을 수도 있겠지만 오늘 꼭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오늘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길 바랄게요.
good!!!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