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낭만일기] 좋아해라고 말하기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3 years ago

어바웃어 타임의 남자 주인공이라면 오늘 하루를 몇 번이고 돌릴 거다. 내일 죽는다고 해도 하나도 바꾸지 않고 오늘처럼 몇 번이고 살고 싶어.

아침에 할머니처럼 또 새벽에 일어나버렸다. 며칠 전 보내야지 보내야지 하면서 미뤄둔 장문의 메일을 용기내 적었다. 융이라 불리는 정혜윤님. 내용은 겁쟁이라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난 당신을 좋아해요. 무척 많이. 정말 좋아합니다. 다음에 만나면 마음껏 좋아한다고 말할게요. 였다. 그 메일을 쓰자마자 그 메일이 스펨함에 박혀 영원히 그에게 전해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게 말한 것 만으로도 너무 행복하고 벅차서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런 관계가 있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면 바로 쿠크다스처럼 바스락 부서질 관계, 속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삭히고 또 삭혔다. 그럴수록 좋아하는 마음이 커졌다. 몇 년을 참고 아닌 척 하다가 결국 응어리진 마음은 목 끝까지 차올랐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결국 좋아한다고 말하고 말았다. 그것을 계기로 그는 영원히 내 우주에서 사라졌다. 좋아해라는 주문은 굿바이였다. 좋아하는데도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건 너무 답답하고 슬픈 일이지만, 좋아한다는 말은 신중하고 무겁게 쓰이기도 했다. 상대와 농도를 맞출 것. 섬세하게 잴 것 그래야 그 관계를 지킬 수 있으니까. 그런데도 언제나 내 마음은 말했다. 그래도 난 좋아해. 좋아해라고 말할래. 말하고 싶어.

세련되지 못한 마음을 억누르며 응어리처럼 쌓아둔 좋아한다는 마음을 빗장풀어 모두 내보낸다. 뭘 바라는 게 아니다. 전해지길 알아주길 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좋아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 행복하다. 그 말을 하고나니 너무 자유로웠다.

아침에는 마법사님과 짧은 본질대화를 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사람은 다 그럴 수 있어.'마법사님은 오해받는다. 효율성과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누군가에게는 조종과 간섭으로 느껴지고, 관계와 사람을 너무 좋아하며 마음을 듬뿍 건네는 나는 오히려 누군가를 내 상식선에 가두고 내 방식대로 통제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내가 해야 하는 건 질문하는 것, 정말 내가 생각하는 그, 그의 감정과 그의 행동 경향과 동기 이유 등이 실제 상대의 생각과 얼마나 유사한지를 직접 확인해보고 내 멋대로 재단하거나 판단하는 오류를 줄여나가야만 한다. 그 과정은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잘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에 인간이고 그렇기에 관계이고 그렇기에 더더욱 소중하고 값지다. 절대 절대 회의론자가 되거나 포기하지 않으리!!

추가로 마법사님에게 고민이 되었던 '누군가가 내 도움을 원하는 것 같은데 딱히 도움 요청을 하지도 않고, 사실 인간적으로는 내가 힘들어질 것 같아 망설여지는 상황,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라는 고민에 마법사님은 쿨하게 '각자의 과제는 각자가, 스텔라 님 과제나 일단 열심히 푸세요.' 너무나도 맞는 말, 믿고 듣는 마법사의 현명한 조언 (그러나 우유 스팀을 만드는 초심 바리스타로서 그는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귀여웠다. 역시 마법사는 사람이군요 훗) 열심히 즐겁게 내 숙제를 신나게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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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을 다해 만든 파니니 세트를 그는 고맙게도 모조리 먹어주었다 ㅠ 갬덩

오후 2시 30분쯤 범상치 않은 손님이 왔다. 그는 분명한 어조에 분명한 표정으로 파니니 세트의 구성에 대해 물었다. 잠깐 기다려달라고 말하고 열심히 라라님과 간만에 주문이 들어온 파니니 세트를 진지하게 만들었다. 그는 흔치않게도 평소 광희 작가님이 애용하는 1층 구석 주인장 자리에 떡하니 우리를 보며 앉아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정성들여 바라보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분명 스티미언이다.'라고 생각하던 찰나 라라님이 '왠지 오셨던 손님 같아.'라고 해서 습관성 스티미언 의심 증후군 놀이는 내려두기로 했다. 그는 어딘가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데 은근히 거절을 못하고 굉장히 쿨하게 예스를 외치는 예스맨이었다. 어떻게 보면 조용해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사람을 대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서 무언가 예측되지 않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그가 있는 도중 별점 테러를 한 여자가 위생과에 우리 매장을 신고해서 위생과 사람들이 경고(?)를 주러 와버렸다. 순간 좀 화가 났다.

그가 옆에 있는데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마구 떠들고 마구 흥분하고 마구 웃고 마구 화냈다. 아주 시끄러웠을 텐데도 그는 인상을 찌푸리긴 커녕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로 자신의 시간을 보내는 게 보통 내공은 아니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꾸만 말을 걸고 이것저것 묻고 싶었다. 그러다가 그가 젠젠님께 이 시간에 칵테일도 주문할 수 있냐고 물었고 젠젠님은 신이 나서 그에게 이것저것 설명해주었다.

나는 낮술 환영!이라며 우리 손님도 없으니 밤까지 놀다가세요. 라고 무리수를 던졌는데 그는 또 쿨하게 '뭐 그러죠.'라고 말했다. 아니 이 사람 뭐지? 젠젠님의 칵테일을 먹는데 젠젠님이 맛이 어떠냐고 물으니, 아직 혀에 닿지도 않았는데 물어보면 어떡하냐고 뼈를 때렸다. 으음.. 관대하지만 칼 같이 정확해. 그러더니 그 분은 라라님과 칵테일 '두 잔을 마시기로' 이미 약속을 했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해서 우리를 모두 카오스에 던져버렸다.

스티미언이세요?

네 맞아요. 누군지 맞춰보세요. 검색은 하지 말고.

저요! 저 OO님? OO님? OO님? (생각나는대로 막 던지기)

...나 알 것 같아. 잠깐만 잠깐만.. .꺄악... @kmlee 님???

..... 그야말로 뒤짚어졌다. 세상에 소름!!! 서프라이즈!!!!!! 김리님이라고? 그의 이미지는 생각하던 것과 무척 달라서 믿기지 않았다. 손님도 없고 위생과의 방문으로 심란했던 마음이 다시 너무 기뻐 요동쳤다. 나는 가끔 김리님 글을 읽긴 했지만, 그와 주기적으로 교류를 하지 않았고 특히 최근에는 정신이 없다는 핑계로 그의 글을 읽지 못해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우리와 함께 패밀리 타임에 점저도 먹고, 술도 두 잔이 아니라 여덟 잔은 마시고 우리가 마구 흥분해서 춤 추는 것도 보고, 마감칠 때까지 남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버스를 타기 직전까지 나와 함께 있다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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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미쳐 담지 못한 술이 더 있지요...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니냐는? 김리님 술 잘드시네.

글이 아닌 대화로 만난 그는 항상 누군가에게 쉼터가 되어주는 사람이다. 위로하고 행복을 주고 자기는 언제나 괜찮다. 정말 아닌 것만 아니라면 뭐든지 좋다. 가리는 것도 없고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누구도 판단하지 않는다. 아프거나 힘들어도 사람은 어차피 다 힘든 거고, 자기가 힘든 건 없으니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버리는 사람이다. 아니 자신을 지독하게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억울하고 화가 났을 텐데도. 나는 또 그의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담담한 말투가 너무 진심이라 마음이 아팠다.

나는 대화 내내 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안경 알의 도수가 엄청 높았는데 그 안의 속눈썹이 참 길고 예뻤다. 그는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곤란할 수도 있는 개인적이고 대답하기 어려울 수 있는 질문을 있는 그대로 듣고 있는 그대로 하나씩 천천히 전부 이야기해주었다. 조금의 거짓이 아닌 방어 기제도 다 빼버린 진짜 그의 이야기다. 나는 그를 만났고 그를 보았다.

내 멋대로 급발진 하지 말고, 내 맥락 속에 상대를 우겨넣지 말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러나 아침의 다짐이 다 무너져버릴 정도로 내 마음은 처음 만나 몇 시간 이야기 해보지도 않은 그를 좋아한다고 그가 좋다고 너무 좋다고 마구 외쳤다. 돌아가는 길에 나는 김리님께 이런 거 하길 꿈꿨다고, 오늘 와주셔서 공간을 완성해주셔서 너무 행복하고 기쁜 하루였다고 감사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자기도 너무 좋은 시간이었다고 담백하게 대답했다. 나는 또 오라고 열 번도 더 오라고 내가 없을 때 말고 있을 때 와달라고 격일로 와달라고 막 말해버렸다.

집도 멀고 요새 부쩍 체력이 모자란다는 그에게 술을 왕창 먹이고 늦은 시간 까지 붙잡고 더운 날 멀리까지 버스를 타러 아주 많이 걸었다. 그는 괜찮을까? 내일 우리 때문에 힘들지 않았을까? 헤어지기 전에 아쉬워 안아버리고 건강하라고 또 오라고 고맙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달라고 아이처럼 말했다.

그는 그와 그의 고양이 쿼드를 만나러 기꺼이 그의 집까지 가고 싶다고 말한 우리의 애정을 부담스럽지 않게 따스하게 받아들였다. 그게 안심이 되고 너무너무 고마웠다. 그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따뜻하고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깊은 아주 강한 사람이다. 종종 오해받을지라도.

나는 가끔 내 마음과 상대의 마음의 농도가 달라 멀미를 하는데 오늘은 착각이라도 나의 마음이 현실로 구현된 소중하고 귀한 날이였다.

좋아해요. 아는 거 많이 없이도 함께한 시간이 너무 좋았어요! 이렇게 마구 말하고 싶을 정도로요. 다음에도 또 와주면 좋겠어요. 꼭이요! 바쁘면 무리하지 말고 심심하거나 보고싶어지면 또 와서 얘기해요 9월엔 진짜 쿼드볼 겸 놀러갈거에요!


2021년 7월 13일, Stella

p.s. 너무 좋아 20세기 여름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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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ears ago 

잘 놀았어요. 많이 떠들어서 숙취도 없네요.
집에 들어가신지 몇 시간 지나셨다고 깨서 이렇게 긴 글을 쓰기까지 하셨으면 거의 주무시지 않은 것 같은데 한 숨 더 주무셨길.

 3 years ago 

오 역시 대화를 나누고 즐겁게 마시니 숙취가 없군요 다행이에요. 밤에 글 쓰고 잠들었어요 푸욱 잘 잤어요 히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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