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8

in #dclick6 years ago (edited)

This post is the eighth part of my serial anti-romance reminisc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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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혼자 마시고 싶으니 나가주세요.>

오늘은 뭔가 단절된 생각들을 나열하려 하지만, 왠지 전체적으로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에 맞는 내용 같다.


멀리 떠나와서인지 요즘은 별로 없는 일이지만, '그 사람은 왜 내게 이럴까' 류의 질문을 받는 일이 꽤 자주 있었다. 물론 '그 사람'이란 내가 만나본 적도 없는 인물.

뭐 복잡하게 들어가기 전에, 그리고 맨 마지막에 항상 하는 말이 있다. '그 사람이 너에게 그러는 이유'는 할 수 있으니까 라는 것이다. 그냥 매우 자명한 얘기다. 뭐든 간에,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것이고, 될 수 있으니까 되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어떤 행동이 마음에 안 든다면, 그걸 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럴 방법이 단 하나도 없는 경우는 의외로 드물다. 사실 그 행동을 당하는 사람에게로 공은 이미 넘어와 있다. 그런데 못하게끔 하는, 바로 그걸 못하는 거다. 그게 말이든, 행동이든, 아예 만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든.


오늘 갑자기 엄마가 오셨다. 도착 몇 시간 전에 얘기하긴 했지만, 당일 방문은 참 곤란하다고. 그냥 대충 보면 큰 문제는 없지만, 엄마들이 그럴 리가 없으니까. 유통기한 지난 식자재가 들어있는 냉장고하며...나는 이렇게 공간에의 침범을 당하면, 어질어질하다. 모든 힘이 쭉 빠져나간다고 해야되나. 원할 때 초대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니 말이다.

지금도 정신적으로 휘청거리는 중이다. 아마도 오늘 글에서 뭔가 감지될지도 모르겠다. 이럴 때는 적당히 조용한 노래를 하나 골라서 계속 듣는다. 노래를 듣고자 함이 아니라, 그 잠깐의 침입에 내 생활이 깨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각인시키는 것이다. 봐, 계속 같은 노래가 나오고 있어. 아무런 파장 없이 시간은 지속되고 있어.

Wet, wet, wet의 Angel eyes


자주 하는 얘기지만, 난 내 공간에 다른 존재가 있는 것 자체를 참 힘들어하는 것 같다. 이 시리즈의 6회차의 마지막에서 언급한 이래로 아직 제대로 등장시키지 않은, 등에 반해서 오래 만나게 된 그 사람도 그런 경우였다.

처음 만난,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굳이 털어놓을 법한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에 (사실 첫 만남에서 '나는 반드시 공간을 홀로 써야 합니다'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처음부터 알지는 못했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금방 알아채지는 못했다. 뭔가 나와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만 들었을 뿐.

그가 바뀌기 시작했다는 걸 느낀 계기는 '선물'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냥 별 생각 없이 줄 만한 귀걸이 류에서, 갑자기 큼지막하고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걸로 바뀌기 시작했다. 스피커 바꿔준다, 거실에 깔으라고 러그를 보낸다, 그냥 생각나서 가구 하나 샀다, 모니터는 보냈는데 본체는 괜찮냐, 등등. 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라고 묻는다면...일단은 앞에서 말했듯이 그냥 쉽게 사줄 수 있으니까, 할 수 있으니까가 되겠지만, 그건 사실상 무언의 공간 장악이었다. 이유 모를 분노를 살살 지피우는 침입의 시도.

물론 그땐 나도 변해 있었다. 정확히는 변했다기보다, 자라났다고 봐야겠지. 그 사람과 꽤 오래 만난 시점의 나는 선물이 비싸다거나 유용하다고 마냥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처음 만난 누군가가 나처럼 공간을 나누는 것을 싫어하는지 정도는 알아챌 수 있게 되기도 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는 나와 같은 부류였지만,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한 공간을 나와 공유해도 불편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점점 부피가 커지는 선물은 그걸 빨리 알아채게 해주는 계기일 뿐이었다. 5회차에서 묘사한 적이 있는, 그를 오딧세우스처럼 생각하던 내 편안함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오딧세우스가 집에 돌아오는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왕이 귀환하면 어떻게 될까. 처음에는 귀찮은 떨거지들도 없애주고 좋을 것 같지만, 앞날을 매일같이 함께 보내야 하는 것이다. 페넬로페는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내 경우엔 방랑 중인 오딧세우스가 좋았던 것이지, 다른 게 아니었다.

그리고 점점 내게 '약점'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그간 만나면서도 자연히 알게 된, 객관적인 약점들이 있었다. 하지만 털어놓기 시작한 것들은 정말로 알고 싶지 않은 류의 약점들이었다. 그 자체로 크지도, 심하지도 않지만 (게다가 어떻게 보면 장점으로 볼 수도 있지만), 털어놓아야 알 수 있는 류의 약점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너무나도 쉽게 헤어짐을 결심할 수 있었다. 그 약점들 때문에? 절대 아니다. 그 중에서 실질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내가 점점 뒤로 물러서기 시작한 이유는 그가 자신의 약점들을 내게 털어놓게 된 것 자체 때문이었다.

크게 말하면, 전에도 표현했듯이 '내게 의존하기 시작'해서라는 것이 이유일 것이다. 그는 민망하다거나 '척 하는 것' 등의 감정을 점점 내려놓고, 속에 있는 것들을 내게 서서히 털어놓으면서 안정감을 얻게 된 것이었다.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풀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자신을 열기 시작했고, 나는 패닉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중요한 포인트는 공간이나 약점이 아니라, '길들임'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길들여지길 싫어한다는 점에서 나와 비슷한 그를 오래 만났고, 그 기간 동안 그는 길들여짐에 대해 뭔가 순순한 감정을 갖게 된 반면, 나는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마치 성서 속에서 둘이 추수를 하다가(또는 그 무엇을 하다가) 한 명만 하늘로 불려 올라간 것처럼, 나만 원래대로 남겨졌다. 물론 그 관계에서 떠난 것은 나였으니, 말이 그렇다는...


길들임을 거론하니, 어린 왕자의 여우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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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우가 말도 안 되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어린 왕자에게 하는 말들을 보면 길들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그 함정에 빠지다니. 일반적으로 말하는 뜻과는 좀 다르지만, 일종의 언행불일치다. 길들인 상대방에게 책임이 생긴다는 것은 분명 맞는 얘기지만, 그걸 알면서 쉽사리 길들여지고 싶을 리가 없다. 아니면 여우가 직접 말한대로, 금빛 밀밭(이었나?)을 볼 때마다 왕자가 떠오르게 되는 것이 목적이었을까. 물론 로맨틱들(로맨틱한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이 길들임이라 불리는 것에 아무런 목적이 없어야 할 것이다. 사실 말이 길들임이지, 이게 세상이 말하는 '사랑'이 아닌가.

안티로맨틱의 입장에서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그 무엇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도 누군가에 대해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지만, 딱 그 충동적인 짧은 기간 동안의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하마터면 일생의 실수가 될 뻔했다는 느낌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황금빛 밀밭(또는 그 무엇)을 볼 때 떠올릴만한' 기억이 없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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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멍해서 아무도 안 떠오른다.

말하는 것만 보면, 여우는 왕자의 장미와의 관계를 조명해주기 위해 넣은 편리한 '현자' 캐릭터 같다. 그런데도 마지막에는 울려고 한다. 아는 것에는 당하지 않아야 하는데도. 다 알면서도 길들여지고 싶은 이유가 따로 있었을까.

글쎄, 내 생각에 길들여지고 싶은 것에는, 그저 길들여지고 싶다는 것 외의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그게 그렇게까지 쟁취하고 싶은 것일까. 오늘도 한 번 갸우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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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차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1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2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3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4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5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6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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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스 시간대!!! 굳 웰컴백 밤!!

밤을 좋아하는군. 형 보팅파워도 밤이 좀 더 빵빵한거 같네. ㅋㅋ 이제 계속 밤에 올릴라고. 이거보단 좀 일찍...

일단 아침에 내가 못봄 ㅋㅋ 그리고 피드 한참 아래라서 놓칠때가 많아

ㅋㅋ 단톡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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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클릭은 사랑입니다.

ㅎㅎ감사합니다.

다른사람은 몰라도 엄마가 예고도 없이 오시는건 마냥 좋던데 전..ㅎㅎ 결혼을 했지만 한번씩은 엄마가 우리집에 안오나 하는 맘이 들어요 ㅋㅋ

ㅋㅋㅋ생선 기절도 그렇고 은근히 포근하시군요.

사람 살이가 생각대로 아니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지라, 사람과의 관계도 그러네요.

약점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 준다는 의미인데, 제이미님이 그렇게 다가오는 것이 싫었나 보네요.

행복한 밤 시간 되세요.
디클릭도 꾸욱 하고 갑니다.

네, 지금 되돌아봐도 그것만큼은 싫은 기억이네요ㅠ

갑자기 포스팅 시간대를 바꾸다 보니 아직 깨어있는...편한 밤 되세요! 클릭도 ㄱㅅㄱㅅ

엄마에서 여우로..ㅎ
길들여지는건 싫은데 자극없는 것도 재미없음...

공간.... 공감합니다.

음...길들여지면 그 사람과의 자극은 거의 없겠죠. 댓글에선 처음 뵙네요? ㅎㅎ

공간을 중요하게 여기시는군요. ^.^
저는 일단 필요없어도 누가 준다면 죄다 받습니다. -.-+
다 때려넣어서 맨날 '좀 버려라' 라는 말을 '밥 먹었니'보다 많이 듣고 살고 있습죠.

ㅎㅎ저도 미니멀리스트랑은 거리가 있어요. 딱히 버릴 것도 없고...근데 부피가 큰거는 뭐랄까, 집을 조금씩 바꿔놓더군요.

아. 부피 큰 거 버리실거 있으시면 저희 집에 버리셔도 됩니당~ ^0^

ㅋㅋ때려넣으시게요

꾸겨서라도 넣고 봅니다~ ^0^

ㅋㅋㅋㅋ

부피가 큰 건 진짜 공간을 잡아먹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ㅎㅎ역시 가구 부분에 눈이 가시는 호돌박님.

혼자 있고 싶을 땐 나가줘야 하는데....디클릭하고 보팅하고 나가겠습니다.

ㅋㅋㅋ그냥 사진에 제목 붙여본 겁니다. ㄳ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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