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자를 이해하기 위하여 _ 01 돌담과 무쇠 말뚝
대학을 졸업하고 떠난 티베트와 인도로의 긴 여행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 나는 원하는 삶의 모습을 조금 더 선명하게 그릴 수 있었다. 그 마지막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완성으로 수렴하리라 생각하니 무척 짜릿했다. 두려움과 의심을 뒤로하고 즐겁게 달릴 수 있는 트랙을 일찌감치 찾아냈으니 운이 좋았다.
여행에서 돌아와 티베트와 라다크에 관한 책이나 영상을 닥치는 대로 찾아봤다. 무슨 운명인지 마침 다큐멘터리 <차마고도> 시리즈가 연일 화제였다. 화면을 채운 설산과 들판, 흙, 호수와 하늘, 야크와 말, 펄럭이는 룽따, 그을리고 주름진 사람들의 얼굴, 옷과 장신구, 그들의 목소리, 바람의 소리, 독경 소리, 종소리, 그 모든 장면과 소리에 반응하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특히 쓰촨에서 라싸까지 2,000km 거리의 길을 오체투지 하며 걷는 순례자들의 말이, 이 순례를 통해 죽음을, 죽음 이후의 삶을 준비한다는 그 말이 날 미치게 했다. 경험해본 적 없는 강렬한 이끌림에 사로잡혀 밤낮으로 꿈을 꾸었고, 히말라야의 품으로 언제라도 다시 돌아갈 마음으로 매일을 살았다. 그런 나의 마음은 급작스럽고 비정상적이기까지 해서 호기심이나 흥미 같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는데, 이해하려고 애를 쓰다 보니 결론은 운명이었다. 이전의 어느 생에 히말라야의 품에서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 깨달음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인 투 파이브의 일상을 시작했다. 불편한 옷과 구두도 참을 수 있었다. 앞으로 나는 세상 곳곳에 머물며 살 것이고, 마침 저 멀리에 또 다른 고향이 생겼으니까. 서울에 티베트어를 가르치는 티베트 스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친구들과 함께 그가 머무는 절에 매주 찾아가 티베트어를 배웠다. 낯선 글자와 말을 새로 배우는 일은 그때의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 신비롭게 구불거리는 글자의 모양. 입 안 곳곳을 간질이는 말의 소리. 그토록 낯선 글자와 말.
이리저리 헤매며 시간과 에너지를 펑펑 쓰더라도 길을 찾는 과정이라면 그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그럼에도 모두에게 시간은 공평하게 주어지고, 에너지에는 총량이 있다. 효율 운운하면 기계니 자본이니 차갑고 딱딱한 세계의 언어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그건 생존 그 자체를 위해서도 중요한 가치다. 효율성이 높다면 좋은 것이다. 다만 상대적일 뿐. 나는 가진 자원을 헛되이 쓰지 않고 오로지 나에게 집중했다. 나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은 꿈의 트랙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만큼 효율적으로 살았다. 차곡차곡 돌담을 쌓았기 때문에, 그 한가운데에 무쇠로 된 말뚝을 심었기 때문에, 흔들릴지언정 날아가거나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돌담과 무쇠 말뚝. 울며불며 얻었고, 훈련을 통해 갈고닦은 나의 보물, 나의 세계.
나는 집중했고 용기를 냈고, 다섯 달 만에 다시 히말라야의 품에 안겼다. 돌아오리라 약속했던 그 계절에. 영하 20도의 살을 에는 추위에 샤워는커녕 세수도 겨우 하며 지냈지만, 죽음을 준비한다는 라다크 승려들의 춤을, 꿈에 그리던 그것을, 마침내 볼 수 있었다. 그날에는 함박눈이 내렸다. 그러니 라다크에서 보낸 겨울은 일종의 성과였다. 집중하고 용기를 내어 이루어 낸 크고 눈부신 결실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3월의 어느 날 저녁, 티베트로부터 끔찍한 소식이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