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 번외] 나를 안아주었던, 그 낯선 사람

in #camino6 years ago (edited)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이야기다. 일기장이 한국에 있어 정확한 날짜는 기억할 수 없지만, 아마도 출발한 지 사흘쯤 되던 날이다. 길을 떠나기 5시간 전까지만 해도 주방에서 10시간 넘도록 서서 일하던 나는 약 780km 의 순례길을 완주한 29일동안 발바닥에 물집 한 번 생기지 않았지만, 이놈의 퇴행성관절염이 문제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새벽같이 일어나 에릭, 아이톤, 프란체스카와 함께 길을 나섰다. 무릎은 첫날부터 말썽이어서 이미 무릎보호대에 테이프까지 떡칠을 한 상태였다. 이탈리아에서 온 프란체스카도 무릎이 아파 스틱(지팡이) 두 자루로 힘을 보태 걷고 있었는데, 몇 번이나 나에게 그 중 한 자루를 내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니야, 난 괜찮아! 손사레를 치며 거절했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였는지, 아직 덜 아팠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태양을 향해 방긋방긋 웃기만 할 줄 알았던 해바라기들은 시들어 풀이 죽은 듯 땅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해바라기 밭, 넓은 들판을 지나 이제는 언덕길을 올라야만 할 때. 남들처럼 10kg 짜리 배낭은 아니지만 내 몸무게와 배낭의 무게를 더한 값에 오르막을 오르고 있으니 무릎에 무리가 갔다. 안그래도 20대 중반부터 가만 서있기만 해도 무릎이 욱신거리는 퇴행성관절염을 갖고 살았기에, 그나마 걸을 수 있을 때 순례길을 떠나야 겠다 생각한 것인데...

굳이 발걸음을 맞추지 않고 각자의 속도대로 걷다가 한 곳에서 만나길 반복한 우리는 어느새 함께 언덕 위에 올랐다. ‘아아, 내가 해냈다! 우리가 드디어 이 언덕에 서서 이 유명한 조형물을 보고 있어!’ 이미 수백년 전에 이 길을 걸었던 순례자들의 모습을 남긴 조형물 앞에서서 사진을 찍고 행복에 겨워 잠시 쉬어갔다. 그리고 이제는 언덕을 내려가는데... 아뿔싸! 내려갈 수가 없다. 하마터면 돌과 흙무더기 위에서 구르기라도 할 뻔 했다. 무릎이 제대로 고장이 나고 만 것이다.

spring, 괜찮아? 내게 묻는 일행을 향해 또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먼저 내려가라고 한다. 사진을 좀 찍으면서 천천히 가겠다고. 사진은 무슨... 이날 이 언덕을 하산할 때 찍은 사진은 단 한장도 없다. 돌 무더기 아래로 발을 디딜 때마다 전해오는 고통에, 무릎만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주제에 센 척은! 출발을 늦게했거나 걸음이 느려 내 뒤에 걸어오던 순례자 수십명은 이미 나를 앞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렇게 돌무더기 내리막길에서 이도 저도 못하고 서있었다. 마치 나의 시간만이 멈춰있는 듯...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새 언덕 위에 나홀로 남겨졌다. 절뚝절뚝 거리면서, 한 걸음에 한 박자 쉬고 또 한 걸음에 두 박자 쉬고 있다가 이내 모든 게 바보같아졌다. 왜 나는 일행들에게 괜찮다고 허세를 부렸는가? 왜 나를 앞서는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는가? 왜 나는 무릎이 이 따위인가? 한심하고 외롭고 서러워져서, 억울하게 벌받는 어린아이처럼 입이 지멋대로 씰룩댄다. 까맣게 타서는 고개를 떨군 모습이 마치 아까 지나온 시들어버린 해바라기와 같았다. 그런데...

맞은 편에서 누가 올라온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가 나를 발견한다. 가까워 온다. 나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린다. 그리고, 그가 나를 안았다!? 어미새가 아기새를 품듯이 그렇게 나를 꼬옥 안아 주었다...?!

너를 만나 너무 반가워.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우리는 처음 본 사이인데?

괜찮아! 잘하고 있어.

내 씰룩대는 표정을 읽은 것인지 그가 환하게 웃는다. 나 혼자 아무리 괜찮다고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는데, 그가 괜찮다고 하니 정말 괜찮다. 겨우겨우 참고 있던 눈물이 뚝하고 떨어졌다.

스위스에서 온 그는 우리들의 목적지인 산티아고 대성당에서부터 거꾸로 길을 걷는 중이라고 했다. 나를 보는 순간, 그냥 너무나 기뻤다고 했다. 30년 전에 ‘유미’ 라는 한국인 친구가 있었는데, 나를 보니 그녀 생각도 나더란다.

너도 분명 멋진 사람일 거야.

사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시간이 더 늦기 전에 나도, 그도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나를 위해 멈춰섰고, 나를 안아주었고, 내게 웃어준 후에야 다시 길을 떠났다.

꿈이었을까. 홀연히 나타난 그가 사라지고, 다시 혼자 남겨진 황량한 언덕길에는 적막이 흘렀지만... 마치 혼자가 아닌 것 같다. 아니, 혼자가 아니다. ‘왜 나는?’ 시리즈는 까맣게 잊은 채 다시 발을 내딛어 본다. 조금씩, 더 자주. 내딛는 걸음 하나에 외롭던 나는 괜찮아지고, 디딛는 걸음 하나에 한심했던 나는 멋있어진다. 그가 옳았다.

어느새 돌무더기 내리막길을 지나 마을 어귀로 들어섰다. 평평한 내리막길을 쉴 새 없이 걷다보니 spring! 하고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에릭, 아이톤, 프란체스카가 길가의 노천 카페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 밖에도 나를 앞섰던 많은 이들이 그 곳에서 앉아 쉬고 있었다.

내가 좀 늦었지? 머리를 긁적이는데, 맥주 한 잔 하고 있었어! 유쾌하게 대답한다. 이미 두 잔씩은 마신 것 같다. 뭐 시킬래? 하는데

나 오다가 천사를 만났나봐.

그런 말을 할 생각이 없었는데 입에서 툭 튀어 나왔다. 응? 뭐 마신다고? 하는 바람에 콜라 한 잔을 시켰다. 그 날 내가 내려온 언덕 이름은 <용서의 언덕>이다.



이 글은 6개월전 이벤트에 참여하기 위해 이곳에 올렸던 글로, 지난 글에서 연결되는 에피소드가 있어 수정 후 재게재하는 것이므로 보상거절하였습니다. 이 글을 읽고 움직이는 그림을 선물해주신 @illust 님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여전히, 길 위에서
@spring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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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때마다 봄마당님은 정말 대단한 것 인정해야 되겠어요.
저도 이런저런 핑계거리가 사라지는 어느날,, 어디든 저런 모험을 해보고 싶어요.
너무 많은 관계 속에서 자기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갈 수록 줄어드는 것같아 가끔 슬프기도 합니다. "그래, 나 잘하고 있지?" 꼭 들어보고 싶은 말입니다.

빅맨님 :) 저도 핑계거리가 얼마나 많은데요. 한 곳에서 제 역할을 묵묵히 할 용기가 없어 훌쩍 떠났던 건지도 모르지요. 관계나 흐름 속에 제 자신이 지워지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은 하고 있어요. 한국에 있으니 그것도 쉽지는 않더라구요.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내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고 정말 원하는 것을 마음에 품고 있다보면 분명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생각해요. 빅맨님, 잘 하고 계시잖아요. 아시면서 :)

[kr-gazua] 멋진 글 끝에 보상 거절이라니... 아름다운 반전에 화가 나는걸!

아니 ㅋㅋㅋ 가즈아 아닌 글에 가즈아 말머리달고 댓글달기 있나요 ㅋㅋㅋㅋ

죄송합니다 ㅋㅋ 드립칠 틈이 보이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괜찮아! 잘하고 있어.

내 씰룩대는 표정을 읽은 것인지 그가 환하게 웃는다. 나 혼자 아무리 괜찮다고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는데, 그가 괜찮다고 하니 정말 괜찮다. 겨우겨우 참고 있던 눈물이 뚝하고 떨어졌다.>

저도 같이 눈물이 날거 같네요...(마음은 그런데 눈은 왜 이리 건조한지...) <나혼자 아무리 괜찮다고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는데 그가 괜찮다고 하니 정말 괜찮다..>란 말에 정말 그랬겠구나 싶어요...

우리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누군가 너 정말 괜찮다고 해주길... 맘 속으론 누군가 그렇게 진심으로 말해주길... 그래서 내가 진심으로 괜찮다고 믿게 되길.. 사실은 너무 기다리나봐요...

<조금씩, 더 자주. 내딛는 걸음 하나에 외롭던 나는 괜찮아지고, 디딛는 걸음 하나에 한심했던 나는 멋있어진다. 그가 옳았다.>

내딛던 걸음 하나에 외롭던 나는 괜찮아지고, 디딛는 걸음 하나에 한심했던 나는 멋있어진다....

디딛는 걸음 하나가 얼마나 우리를 바꾸는지... 느끼게 되는 대목입니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자주 걸음을 내딛는다면... 나를 둘러싸고 나를 괴롭히는 이 벽을.. 이 벽 안에서 나갈수도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해봅니다... 모든건... 결국 내가 만들었음을...

씰룩씰룩..울렁울렁... (건조하게...)

제가 기다리는 것이 너는 괜찮다는 말인지, 너 참 힘들겠다는 말인지 기분에 따라 다르기도 한 것 같아요. ‘너 정말 힘들겠지만.. 힘들어도 괜찮고, 지금도 괜찮고, 앞으로는 더 괜찮을거야.’ 정도면 통과일 것 같네요...

더이상 걷는 것은 정말 안되겠다고 느꼈는데, 그를 만나고 나니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기더라구요. 그러고보면 괜찮다, 힘내자, 아무리 혼자서 수백번 마음을 먹은들 정말 변할 수 있을까 싶어요. 누군가를 만나든, 어떤 사건을 경험하든... 계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사소하고 우연한 것이라고 해도 말이죠. 다만 그 우연한 기회를 만났을 때 내가 여전히 등돌리고 웅크리고 있다면 발을 내딛을 생각조차 못하겠지만요..

그나저나 털알이 잘지내고 있나요. 스팀잇 며칠 안했더니 하루가 어찌나 긴지... 그랬다고요.

스팀잇 안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도.. 고독하지만 또 나름 맛이 있다고(노란 파프리카 죽 맛..)생각이 들어요..^^

나의 소울메이트.. 당신의 건강이 염려됩니다..

저도.. 어떤 남자가 갑자기 어미새가 아기새를 안아주듯 안아주는 것을 경험해봤으면 참 좋으련만...한번도 없고요...

그런데.. 여행을 갔을 때 등산을 갔을 때 어떤 서양 남자의 우리의 말을 경청하는 눈과 나를 받아들여주는 듯한 환한 미소를 보았는데..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 눈빛과 미소가 잊혀지지 않더라고요..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내가 갈망해오던 것이라는 뜻이겠지요...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람들처럼 편견 없이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어미새 혹은 아기새가 되고 싶은 메가새포어

아니 왜 보상거절임...

현찰로 받으려고...

송도로.....

가야하나요?? ㅇ_ㅇ

현찰내고 곱창먹기...

아, 사주는 거 아녔습니까?? ㅇ_ㅇ

송곱길(송도곱창길)...통행료?ㅋㅋㅋㅋㅋ

방심한 사이에 댓글이...

송도 가실분 모집합니다

배편 예약하면 되나요? :D

이미 가셨을듯 ㅎ

눈물 뚝! 상황이 이해되는군요. 정말 천사였던것 같아요~~~~~~

길 위에서 뜻밖의 위로를 만나기도 하는군요. 혹시 요즘 그런 천사를 우연히 만나고 싶은 건 아니신지ㅎ
전 두 팔 쫙 벌리는 천사는 어렵겠고, 뭐 시킬래, 하는 동행자 정도로 슬쩍 끼어듦,,ㅎ

짜장면이요..? ㅎㅎㅎ 천사는 항상 제 곁에 있답니다. 제가 가끔 알아보지 못할 뿐 :)

Follow the flow, and see what's happening - 이 바로 이런것 아닐까 하네요! 용서의 언덕에서 만난 천사라... 너무 감동적이예요 !

순례길에서는 누구나 천사와 마주친다고 하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답니다. 인생길에서도 마찬가지겠지요 :)

용서의 언덕. 몹시 가보고 싶어요.
저의 어리석음과 게으름도 다 용서받을 수 있을것만 같아서요ㅎㅎ
봄님 오늘 좋은하루 되시구요!

그렇다면 저야말로 저기서 살아야겠는걸요 ㅎㅎ 용서해주는 건 언덕이 아니었지만요 :) 편안한 주말이 되세요, 경아님!

이거시 바로 다음편을 기다리게 하는 현기증 권법이군요.

취권입니다.

spring! field 바깥에서 쉬고 계신가요.

나... 천사를 만난 것 같아.

그 분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게 아니라, 조그만 징표들로 우리의 삶에 내려오시는 것 같습니다. 조그만 격려로,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로. 내가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것을 아시기에, 힘든 순간을 극복할 수 있도록 여러 표지로 도와주는것이 아닐까요.

신을 믿지 않지만, 우리의 삶에 조그만 기적들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그 조그만 징표와 조그만 기적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답니다. 분명 오늘도 있었을텐데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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