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가 바람이었다면...

in #busy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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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담 랄라가 만들고 키위삼촌이 꾸며줬어요! ^_^

내가 지나온 시절, 지금보다 훨씬 자유롭고 장난꾸러기였던 시절,
그 당시에는 모든 것들이 지금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별 것 아닌 것들에도 사람들은 웃음을 흘렸고, 인정이 넘쳤다.
모두가 즐거웠고, 나 또한 그러했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모든 것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이란 '시간을 멈추는 일' 뿐이었다.

앞서 가는 시간은 늘 조금은 버겁게 흘렀다.
나는 겨우 '슬슬 일어나볼까?' 생각했을 뿐인데, 시간은 저만치 내달았다.

그것은 내 나이테가 둥글게 채워질 수록 더욱 매섭게 느껴졌다.

내가 겪은 좌절, 실망, 허무를 내 아이들은 좀 덜 느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이 아이들이 이루고자 하는 꿈, 소망,
그것이 비록 이뤄질 수 없는 허무맹랑한 공상일 뿐일지라도...

아이를 아이답게 지켜주는 것.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자신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
슬기롭게, 즐겁게 그 한계를 어루만질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 한계를 극복하면 하는 대로, 못 하면 못 하는 대로 묵묵히 지켜봐주는 것,
나는 그것이 부모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할 일은 내 아이들을 '최고로 사랑하는 일'이다.


어제는 낮잠도 2시간을 채워서 잤고, 바깥 놀이도 적당했다.
그런데 초저녁이 되어 저녁을 먹이려고 준비하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저녁 6시 반.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엄마'를 찾으며 자꾸만 매달렸다.

'벌써 졸려울 리가 없는데...?'
그치만 아이들의 눈빛, 표정, 몸짓은 '잠'을 말하고 있었다.

서둘러 저녁을 먹였다. 잘 자리라 혹시 더부룩할까 평소보다 적은 양을 먹였다.
양치를 시키고 옷을 갈아입혔다. 시키지도 않는데 각자 방으로 가서 누웠다.

저녁 7시 50분.
육아퇴근을 했다.

일찍 밤잠을 자면 다음 날 새벽 기상은 정해진 수순이다.
역시나 새벽 4시 반쯤 방에서 소리가 들린다.

언제나 그렇듯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기상을 하게 되면 정신을 차리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바다 보고 오자!!"
멍하게 내뱉은 한 마디에 남편이 "가자!" 답하더니 순식간에 아이들을 준비시켰다.

정작 말을 꺼낸 당사자가 준비가 제일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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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를 달린다.
이른 시간이라 차가 많지 않았다.
내비게이션에 오죽헌을 찍자 2시간 20분이 소요됨을 알린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초침이 목적지를 눈 앞에 데려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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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은 뜨거웠고, 바람은 시원했다.
땡볕에서 뛰어다니다 조금 지친다 싶으면 얼른 그늘을 찾아 들어가면 되었다.

아이들이 마음껏 누빌 공간은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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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놓을 수 없는 타요 친구들도 함께!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바다도 보고 가자고 의견을 모은다.
그래봤자 남편과 나, 둘의 의견이다. 둥이들은 바깥이면 어디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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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을 찍으며 미술관님(@feyee95)을 떠올렸다.
이제 일상에서 만나는 풍경, 사물, 음식 등에서 이웃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늘 이 곳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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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있어도, 무엇을 해도,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면 뭐든지 행복하다.
걱정하고, 우려하고, 경계하는 건 부모의 몫이다.
좁은 우리가 아닌 너른 울타리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도록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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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하고 행복한 부모이고 싶다.
내 아이들이 그 행복과 여유를 자연스레 누리며 자랄 수 있도록...


오늘은 어제보다 취침이 더 이르다.
강릉에서 출발해서 돌아오며 낮잠을 재우려 했는데,
남편이 잠이 온다고 하여 졸음쉼터에 차를 세우자마자 아이들이 깨어났다.
강릉에서 출발한지 40분 정도 흘렀을 무렵이었다.

그럼에도 가라앉는 눈꺼풀을 이겨낼 재간이 없는지 남편이 금세 잠에 빠졌다.

아주 잠깐의 시간, 눈을 붙이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오늘 아이들의 낮잠은 그 40분 정도가 다였다.

그리하여 6시가 좀 넘자 비몽사몽...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의 정신이 이미 망망대해를 떠도는 듯했다.

지금은 완벽한 고요 속에 나 혼자 머물러 있다.
이 고요함이 아침까지 지속되기를 바라며 책을 펼쳤다.


너 방금 전에 시를 쓰고 있었지?

무슨 시니?

이곳의 호수와 가을에 대한 시야

좀 보여줄래?

안 돼 아직 끝내지 않았거든

그럼 다 되면?

그래, 좋아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이미 읽었던 책이라 처음부터 보지 않고 그저 마음대로 펼쳐 그 부분부터 읽는다.
공교롭게도 펼친 페이지에 이런 대화가 보였다.

이 대화를 읽는 순간, 시 한 편이 떠올랐다.

왜 떠올랐는지 굳이 이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인 소설이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아마 수도원 학교 시절의 그라면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추측한 때문이다.

이 시를 떠올리자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웃이 한 분 계시다.
@zzing님이 읽어주셨음 좋겠다.
이병률 시인, 찡님이 좋아하는 분의 글이다.


가을은 차고 물도 차다
둥글고 가혹한 방 여기저기를 떠돌던 내 그림자가
어기적어기적 나뭇잎을 뜯어먹고 한숨을 내쉬었던 순간

그 순간 사내라는 말도 생겼을까
저 먼 옛날 오래전 오늘

사내라는 말이 솟구친자리에 서럽고 끝이 무딘
고드름은 매달렸을까

슬픔으로 빚은 품이며 바람 같다 활 같다
그러지 않고는 이리 숨이 찰 수 있나
먼 기차소리라고 하기도 그렇고
비의 냄새라고 하기엔 더 그렇고
계집이란 말은 안팎이 잡히는데
그 무엇이 대신해줄 것 같지 않은

사내라는 말은 서럽고도 차가워
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
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

처음엔 햇빛이 생겼으나 눈빛이 생겼을 것이고
가슴이 생겼으나 심정이 생겨났을 것이다
한 사내가 두 사내가 되고
열 사내를 스물, 백, 천의 사내로 번지게 하고 불살랐던 바람의 습관들

되돌아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년을 흘렀던 것이다
그 바람이 아직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바람의 사생활, 이병률>

2018년 9월 8일.
오늘의 일상을 기록.

<덧붙임>
혹시 제목을 궁금해 하실 분들께...
한스는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 이름이며, 종내는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괴테가 '친화력'에서 '죽음을 통한 완전한 사랑'을 이루었 듯,
헤세 또한 그러한 전략을 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는 그의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한스가 바람이었다면, 어디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얻었다면...하는 마음으로 적어보았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그저 행복했으면 하는 '엄마의 마음'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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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글 안읽고 보팅도 안하고 리플만 남기고 갑니다.

미파 곧 60이네

저 바다 보러 가고싶어요.
나도 저렇게 모래밭에 발자국을 새기며
마음껏 뛰어보고 누워도 보고

디디엘엘님께는 속 모르는 소리겠지만
둥이들을 보면 친구처럼 보여요.
이 다음에 어른이 되어서도
저렇게 잘 어울려 살 것 같아요.
멀리 떨어지지 않고 가까운 곳에서

그러기를 너무나 바라요.
둥이들이 서로 가장 좋은 친구이자 가족으로
언젠가 혼자 세상에 나아갈 때,
의지가 되어 줄 든든한 버팀목이 되면 좋겠어요.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을 공유하고 함께 이루어 나간다면...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jjy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정말 상상만으로 행복해요!

브라보.ㅠ.ㅠ 최고의 시
정말 오랜만에 백년만에 필사가 하고싶네여
따라써도될까요 이병률님의 시

사실 부탁드리고 싶었는데...
요즘 찡님 필사를 놓으신 듯하여..
다시 시작해 주시길 부탁드리면 무리일까요?
저는 너무 좋은데요.

필사 다시 등장하나요.
그림도 옆에 꼭 그려줘요 찡언니

안됩니다. 그림그려야죠. 작가님.

곰돌이가 지금까지 총 112번 $1.156을 보팅해서 $1.626을 구했습니다. @gomdory 곰도뤼~

도라님은 잘 해나가고 있으신 겁니다.

감사합니다 호돌님.
그 말씀이 정말 힘이 돼요!!

오죽헌도 좋고~ 하늘도 바다도 참 이쁘네요~ ㅎㅎ

정말 좋았어요.
하늘이 어쩜 그리 파란지...
또 가고 싶어집니다^^
복구는 잘 되었는지 궁금해요.

잘 다녀오셨는지요? 오늘 하루도 수고 많이 하셨어요.

감사합니다 도리안님^_^
엄청 즐거웠어요. 덕분에요!!

참....
많은 말 필요없는
ddllddll님 은 참 좋은 엄마세요!!

저두 아이들이 초딩 고학년인데 그때 잘 해줬다 생각했는데
그냥 의식주와 공부만 시켰던거 같아요.....

반성해봅니다.. ㅋㅋ

의식주와 공부면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 하신 건데요!!
러비님도 정말 좋은 엄마이십니다.^_^

이렇게 사랑스러운 총수를 모실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_+

오이똥이 메인이라니 감격했습니다 흐흐흐흐

오이님 덕분에 자존감 +10 이 상승하였습니다. ^_^
저 원래 자존감 바닥이거든요..
스팀잇에서 없어진 자존감을 찾고 있다니...
오이똥이 메인인 이유는...오이님은 사랑이니까요!! ㅎㅎ

오...마실다녀오셨네염~~ 전 집에서 30분 거리만 다녀와도 피곤하던데...머나먼곳을...ㄷㄷ

그래서 가족들이 모두 깊은 잠에 빠졌어요.
저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 가는 시간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두눈 부릅뜨고 있답니다.
밤은 왜 이리 빨리 지나는지...

밤은 너무 빨리 지나가죠......우리의 밤은......그리구 길지 않을 나날들이...ㅠ

디디엘엘님의 이미지가 새삼 새롭게 느껴집니다. ㅋㅋ
역시 문학소녀....
근데 태그는 가즈아 ㅋㅋㅋㅋ
가즈아 태그를 쓰면 누군가 와서 보팅 해주나요?
갑자기 궁금....ㅋ

반말 포스팅에 붙이는 태그라고 알고 있어서요.
보팅도 해주긴 하는데....가즈아 태그를 썼다고 모든 글에 보팅이 들어오지는 않더라고요..
제가 태그를 붙여보니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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