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크리스마스

in #busy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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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첩을 정리하다 보니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 즈음에 우리 콘도 수영장에서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인듯 한 사진이 보인다. 미 필리핀에서 맞는 8번째 크리스마스 였는데 여전히 나는 한여름의 크리스마스가 익숙치 않다는 이야기를 친구에게 했던것 같다.

이제는 습기를 머금은 무거운 더위에도, 이곳의 느린 사람들에게도, 내 가까운 사람들과 먼 곳에서 전하는 안부가 이미 익숙해졌는데도 크리스마스가 거느리는 강렬한 것들, 이를테면 내 기억 속의 '추억', 크리스마스를 감쌌던 더 많은 이미지들... 차가운 거리, 캐롤, 사람들, 입김, 코트, 눈, 약속, 사랑해 라는 우리들의 고백들... 더 많은 걸 대라면 댈 수도 있을만큼 익숙해지는 것만으로는 대체 불가능한 것들이 이 곳에서의 크리스마스를 완전한 나의 크리스마스로 즐기지 못하게 한다.

가끔 내 필리핀 친구들이 내게 이야기 하기도 한다. 이제는 돌아갈 생각을 하지말라고. 입만열면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면...'이란 소리를 했으니 이미 8년 넘게 그들과 함께 해온 터라 그들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닐게다. 도대체 언제 갈건데? 라고 할 때마다 언젠가는... 이라고 말하곤 했었다. 제2의 고향이라고들 한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은 아니더라도 어떤 한 곳에서 내 삶의 아주 중요한 시기를 오래 보냈다면 우리는 그것을 제 2의 고향이라 부르며 기억하기를 좋아한다. 어쩌면 언젠가 내 인생의 아주 후반부에 필리핀을 나의 제 2의 고향이라 추억하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나는 언젠가 돌아갈 것이고 내 삶은 필리핀에 정착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으니까.

처음 신랑을 따라 여기로 올 때, 나는 한 2-3년 해외에서 사는 것도 좋을거라 생각했었다. 그 3년은 정말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갔고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또다른 이유로 이곳에 여전히 머물렀고 다른 3년이 더 빠르게 지나갈 때에는 또다른 3년의 이유를 찾아야 했을만큼 나는 이곳에서 살아가는 것에 그야말로 익숙해졌고 나의 모든 감각과 생각과 물리적인 상황들은 레고조각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서 성을 만들고 로봇을 만들 듯이 그 빨랐던 8년동안 나름의 자리에서 딱 맞게 고정되고 있었다.

나중에 돌아가게 되면 비어있을 커리어를 채우기 위해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땄고, 가짜가 판치는 필리핀에서 '진짜'가 되고싶어 한 텔레콤사에서 마케터로 경력도 쌓았다가, 스스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못견디는 내 고질병이라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모~든 '살아 움직이는 것'들의 일부가 되려고 지금껏 쉬지 않고 달려오는 중인데... 내 스스로 나에게 묻게 된다. "이번이 8번째 크리스마스야... 넌 도대체 언제 돌아갈건데?" 노란 손수건을 나무에 묶어서 길을 찾아가는 등산객처럼 나는 크리스마스가 될 때마다 이 질문을 되풀이한다. 니가 진짜 원하는게 뭐니?

'이제는 여기가 제 고향이에요' 라는, 많은 해외에 정착하고 사는 그들이 하는 말을 나도 언젠가는 하게 될까? 필리핀에 살면서 필리핀에서 나오는 수많은, 사기, 피살, 자연재해와 관련한 어두운 기사들의,한국의 가족들이 끔찍하게 걱정하는 그 가운데 살면서, 내가 마치 필리핀이 된 듯한 묘한 자격지심... 과는 상관없는, 내 삶에 대해 내 자신에 대한 한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의로 내가 이제껏 가져온 것들....이 그 말을 못하게 막는다.

나는 내 삶을 살아가야 한다. 아내로서, 엄마로서가 아닌 내 스스로의 삶을 나는 여전히 살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미래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전혀 다른 3년이든 지나온 시간들과 다름없는 3년이라도 내게는 의미가 있는 미래가 되어 여전히 고군분투하는 나를 기다려 주어야 할 것이고, 그래 줄 곳이 내 미래가 되어야 한다. 그래도, 내가 필리핀에 살고 있더라도, 적어도 사계절이 있어 옷장정리라도 할 수 있는 곳이 내 미래가 되었으면 좋겠고, 사계절 반팔 반바지만 가득한 옷장을 두고 살아가는 이 곳에서 추운 날 입어야 하는 두툼한 코트를 준비해야 하는 그런 시간들을 걱정하며 살아가는 현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른 3년이 이곳일 수도 있다. 또다른 3년, 그 3년 뒤의 3년이 오더라도, 언젠가 돌아갈 거라고 말할 것이다. 오늘 내 사랑하는 필리핀 친구에게 말했다. 다음 도쿄 올림픽 때 같이 도쿄의 한 아파트에서 축구경기를 같이 보자고... 그래야 한다. 지금의 시간이 변할 것 같지 않아도, 그 시간이 지금 꼭 필요하고 그것이 최선이라 해도, 나는 미래를 생각하고 그 때를 준비할 것이다. 그래야 내가 그저 '늙어가고 있다' 라는 생각을 안해도 되니까.......

올해도 크리스마스의 그 물음을 향해서 째깍째깍 달려가고 있는데 나는 그 흔한, 또 그 질문을 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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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로서, 엄마로서가 아닌 온전히 내 자신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하고 그 시간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이 멋지십니다!! ㅎㅎㅎ

멋지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는 외국에서 살아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주 오랜 시간 방 안에 있었어요. 대충 따져도 7-8년 됩니다. 저는 시간을 의미있게 사용하는 법을 잘 몰랐고 왜 매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되는지도 몰랐습니다. 편안하고 즐거우면 된다고 생각 했어요. 서른 살이 되고서야 지나간 시간을 반성했습니다. 뜬금없이 제 경험을 이야기 하고 있어서 죄송합니다.

어디에 계시든 그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셨으니 다행입니다. 좋은 엄마, 지혜로운 아내로 살고 계시니 이 또한 멋지십니다. 바라는 것이 꼭 이루어 질 거라는 무책임한 응원은 하고 싶지 않으나 한국이든 일본이든 어디든 가고 싶으시면 꼭 가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전해봅니다. 바라는 일은 이루어 질 겁니다! ^^

여전히 꿈을 꾸어도 되는 서른 살의 응원이 너무나 기쁘게 다가옵니다. 방안에서의 7-8년보다 이곳에서 엄마가 되고 더 어른이 된 제 삶이 더 나은 삶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둘 다 이제 앞을 보며 나갈 준비를 한다는 점에서 공히 설레는군요^^

현재는 32살이지만.. 글로만 뵈도 멋진 @bookkeeper 님의 미래는 더욱 빛이 날 거라고 제가 믿습니다. 서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종종 확인하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바라 봅니다 ^,^

저도 제 2의 고향은 시카고~
거기서 살때.. 언제 돈이 떨어질지 몰라 언제 한국으로 돌아갈지 모르는 삶을 살다보니.. 늘 친구들에게 신랑의 이번학기 끝나면 어떻게 될지 몰라를 입에 달고 살았었네요..
그래 놓구선 학비는 못냈지만 학기는 다 끝내고 왔다는. ^^;;

이젠 한국에서 친구들한테...
미국에 다시 언제갈지.... 이러고 있네요. ㅎㅎ

어디서 사느냐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데 가끔은 장소가 중요하기도 한 것 같아요.

색다른 크리스마스이지만 왠지 모르게 타향의 어려움도 느껴지는듯요..
그래도 밝은 미래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삶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들으니 더 가깝게 느껴지네요.^^ 힘내세요 멈추지 않은 한 얼마나 천천히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얼마나 천천히 가는가... 좋은 말 같아요. 저는 너무 빨리 가려고 한게 아닌가 싶네요. 감사합니다.

참 열심히 사시네요. 멀리 있어도 고향의 끈을 꼭 붙들고 사시는군요. 언제든지 돌아갈 곳이 있다는건 행운인것 같아요. 어릴적 괴롭히던 친구를 만나면 엄마뒤로 꼭 숨었던 것처럼요. ㅎㅎ

포스트잇 같은 삶을 살고 있어요. 필요에 따라 붙어 있기는 한데 완전히 붙지는 않는 삶...

저도 어느새 타향살이 16년차에요. 정체성 고민할 때 친구가 해준 말이, "Bloom where you are planted"였어요. 그래서 지금 이땅에 뿌리내리고 꽃피우려고 애쓰고 있어요 ^^

Bloom where you are planted... 좋은 말이네요. 뿌리내리고 꽃피우기에 땅이 너무 척박해요 ㅋ

에고..필리핀에서 생활이 힘드신가봐요; 지금의 시간들이 언제가를 위한 밑걸음이 될꺼라고 믿어의심치 않아요~힘내세요!

어디든 힘들지 않은 곳은 없을거에요. 필리핀이라 더 힘들다기 보다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사는거 같아요...

필리핀에서 살고 계시군요! 저는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은 없지만 정말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bookkeeper 님, 도쿄 올림픽 때 꼭 도쿄의 한 아파트에서 축구경기 보실 수 있으실거에요! ★

하하 이제 2년 남았네요. 그때도 있으면 꼭 가고싶어요. 꿈만같아요 그 대화들이...

어려서부터 외국에 나가 살아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안주어 졌어요
푸켓 여행을 갔을때 추울때 가서 그런지 따뜻한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추울때 크리스마스를 지내서 그런지 따뜻한 날 크리스마스가
생소하긴하네요
어디에서 살던 사람 마음은 비슷할것 같아요
살던 자리를 옮기는 것도 쉬운일은 아닌것 같고요
열심히 잘 살으신다는생각을 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따듯한 답글 감사합니다. 어디에 있건 어떻게 살건 그건 모두가 나의 선택인데, 요새는 그 선택 들의 길에서 어떠한 확신이 없는거 같아 좀 답답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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