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RED BALLOON VIRUS #1

in #artisteem6 years ago (edited)

1535403487054.jpg
ⓒzzing (@zzing)



[ #1 ] 붉은 돌무덤의 환상


태양만이 흑점을 지닐 권리가 있다. – 괴테


  '붉은 돌무덤의 환상'은 고등학교 1학년, 재희를 떠나보낸 후부터 시작되었다. 그 해 여름, 우리는 손을 맞잡고 차갑고 축축한 교보재 창고에 나란히 누웠다. 재희가 몸을 누일 매트리스를 펼칠 때, 창문의 햇살 프리즘은 요란떠는 먼지 알갱이를 잡아내고 있었다.

  "안녕. 물고기가 되어서 만나자."

  사람들은 쉽게 '그날의 일'이나 '그 사건'이라 명명했고, 나는 여전히 타자화된 호칭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세상은 쉽사리 그날의 일이나 사건 따위로 부르며 재희의 죽음을 건조하고 딱딱하게 사물화시켰다. 재희는 죽음의 강에 살며시 발을 담그었을 뿐, 내 친구를 밀어부쳐 강 건너에 이르는게 한건 세상의 언어가 아닐까. 재희는 죽은 후에야 비로소 사형선고를 받은거야. 그저 순서만 바뀌었을 뿐이잖아...

  그 날 이후 나는 항상 멍했고 정상적인 의사소통을 하지 못했다. 사람을 알아보거나 사물을 보고 인식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자신의 말을 이해시키기 위해 같은 말을 몇번이나 되풀이했다. 재희는 살아서 내 곁에 있을 때 보다 더욱 선명해졌다. 함께 했던 기억은 상상력과 버무려지며 새로운 기억들을 재창조했다. 재희는 라면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컵라면이 눈에 띄면 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라면을 먹고있는 재희가 보였다. 재희와 나는 등교길이 같지 않았지만, 재희가 떠난 이후 학교에 갈 때면 어느 정거장에서 버스에 오르는 재희를 만났다. 정거장은 매일 바뀌었다.

  "재희는 버스에 오르면 항상 나를 먼저 찾아요."

  나는 이러한 의식의 변화를 자연스럽고 가역적인 순환이라 여겼지만 상담가의 생각은 달랐다. "무당에게 갔으면 귀신 붙었으니 굿하자고 할 상황이야. 그래서 괜찮아질거라면 복채라도 주고 싶다만."
상담가는 머리숱이 많고 안경을 끼고 있었다. 턱수염이 덥수룩했지만 깔끔한 인상. 한번씩 나를 지그시 바라볼 때 따듯함과 날카로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상담가답지 않게 시시껄렁한 얘기를 자주했고, 상담 시간의 절반은 음악과 책 이야기를 했다.
  "씨앗은 결국 땅을 뚫고 나오지. 자연스러움엔 방향이 있단다." 이 날은 에드 쉬런의 Perfect.를 함께 들었다.
  "나무는 다만 태양에 가까이 가고 싶을 뿐이예요." 나는 무릎 위에 올려진 에르네스트 르낭의 책 모서리를 양손으로 꼭 쥐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작은 호수가 있었다면 완벽했을 풍경이다.
  "그것 역시 일종의 방향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논리적 반문이지만 나를 정복하려는 의도가 없는 따듯한 목소리다. 내 눈은 여전히 창 밖을 응시하고 있고, 곧 작은 호수가 나타난다. 저기 찰랑찰랑 물위를 걷고 있는.
  "재희는 제 태양이었어요."

  환상이 보이기 시작한 건 주변 사람들이 지쳐 한계에 다다른 시점이었다. 처음에 나는 환상인지 꿈인지를 한참 생각했다. 항상 잠에 빠져드는 의식의 경계에서 선명히 시작되었지만, 그 끝은 다음날 새벽잠을 깨며 꿈처럼 아스라졌다.

  환상은 선명한 한 점으로 시작되었다. 점은 빛의 알갱이였고 이는 아인슈타인의 유산이었다. 빛은 스스로를 벗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요동하는 한 점이었다. 요동하는 점은 또다른 점을 낳았고, 그 점은 또다른 점을 낳았다. 점과 점은 촘촘히 중첩되며 선이 되었고, 선은 또다른 선을 잉태하며 서로에게 닿았다. 선과 선은 연속적인 궤적을 형성하며 빛의 도형을 탄생시켰다. 도형은 멈추지 않고 끝없이 형태를 바꾸었다. 삼각형에서 사각형으로, 사각형에서 오각형으로, 선은 스스로 분쇄되며 무한의 다각형으로 향했다. 더이상 각이 나누어 질 수 없을 때 완전한 원이되었고, 원은 다시 한 점으로 돌아가 빛의 알갱이로 요동했다. 환상 속에 나는 무(無)공간에 갇혀있었고 저멀리 시간이 괴멸되는 희미한 잔상을 보았다. 어떠한 형태도 허락되지 않는 무한각형의 끝없는 시작과 회귀는 사멸된 시공간을 쪼개며 내가 기거할 틈새 공간을 형성했다.

  나는 무한각형의 순환을 보며 잠에 빠져 들었고, 환상은 꿈으로 이어졌다. 無공간의 틈새는 차갑고 축축했다. 빛 알갱이는 점에서 선으로 도형으로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며 공간을 벌렸고, 공간은 검은색으로 채워지며 점차 내 몸을 부유시켰다. 순환은 점점 가속되며 공간을 무한히 확장시켰다.

  나는 꿈속에서 숫자라는 개념을 창조했다. 나는 그 숫자를 이용해 순환을 셈했다. 나는 한 점이 무한각형의 원이 되는 순간을 한 주기로 명명하며 1 을 세고, 손가락 끝으로 무한의 검은 공간에 새로운 도형을 창조했다. 오각의 오면은 삼각의 일면과 각각 맞닿았다.
  "너의 이름은 별."
원은 다시 점이 되고, 첫 주기의 형태 변화를 반복했다. 다음 주기에 나는 2 라고 센 뒤에 무한의 검은 공간에 별 하나를 더 띄었다. 뒤이어 3, 그리고 4,5,6.... 주기는 요동하며 무한 공간의 끝까지 진동했다. 나는 그렇게 이리저리 누비며, 내 마음 가는 곳에 마구 별 그려댔고 결국 가장 완전한 숫자에 다다랐다. 내 몸이 보다 높은 차원으로 떠올랐고, 끝없이 펼쳐진 별들은 휘어진 공간의 곡률 위로 미끌어지며 모이고 흩어지길 반복했다. 내 몸이 다시 한단계 높은 차원에 이르렀고, 서로 밀고 당기는 작은 움직임들은 사실 거대한 하나의 소용돌이로 향하며 휘감기고 있었다. 별의 군집은 소용돌이의 핵으로 모여들며 장엄한 빛을 발광했고, 길잃은 별들이 느리고 고요히 한방향으로 흐르며 비로소 우주가 탄생되었다.

  환상으로 시작되는 한 점은 매번 우주가 탄생하는 꿈으로 끝났다. 새벽에 잠을 깨면 갓태어난 듯 생경하다. 나는 침대에 멍하니 누워 눈을 꿈뻑거린다. 그렇게 누워 꿈인지 현실인지를 한참 생각해야 했다. 여전히 의식 절반이 꿈속을 헤매고 있고, 결국 꿈에서 창조했다던 숫자도 별도 이미 이 세상의 것임을 깨달을 즈음에 깊고 진득한 고독이 밀려온다. 지구 따위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고독.

(계속)


[지난회 다시보기]

RED BALLOON VIRUS : PROLOG

Sort:  

빅뱅이 부릅니다~
에라 모르겠다!

짝퉁 아이오아이가 부릅니다. ㅋㅋ
킥미 킥미 킥미업 ~~ (음표)

ㅎㅎㅎ 이토록 귀여운 모습이라니

내가 좀 팔방미인 ㅋㅋㅋ 알면 알수록 놀랄거야 호호호호호

아무말 대잔치가 벌어졌구나 ㅋㅋㅋ

ㅋㅋㅋㅋㅋ

주인공이 느끼는 환상을 떠올리니 마치 프리즘이 사위는 듯한 모습이 그려집니다.
카비님의 문체에서 어떤 작가가 떠오르는데...명확하지 않아 좀더 기억해내 보겠습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작가였던 것 같은데.
왜 떠오르지 않는지 의문이 드네요.
괴테의 문장으로 시작하시니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심려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누군지 몰라도 둥이맘께서 아주 좋아하신 작가라니 기쁘고 힘이 납니다! ㅎㅎㅎㅎ 레드바 계속 지켜봐주세요~

레드바는 역시 스크류바죠~
image.png

@torax...
스팀잇 라이프에서는 가끔 이런 난감한 댓글이 달리기도 하지요...

오홋... 카우보이님 이러깁니까?ㅋㅋ

이게 다 오마주 프로젝트 덕이죠. 큐레이터 완장 스스로 빼버렸지만 나름 체계적으로 가장 잘하심. 다시 하시죠? ^^

저에게 달려있는 kr-crazy 완장 안보이세요???

아, 그런거예요? ㅋㅋㅋ 난 그냥 아이오님이 하는건 줄...
kr-crazy 태생을 잘 몰랐군요. ㅎㅎ

kr-carzy 이름부터 맘에 들고, 큐레이터는 더 맘에 드는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ㅋ

안녕하세요! @stylegold 님과 @cowboybebop 님께서 작성하신 포스팅 또는 댓글이 [오늘의 댓글]에 선정되었습니다. [오늘의 댓글]에 포스팅과 댓글의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삭제를 원하시면 댓글 달아 주세요.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링크 : https://steemit.com/kr/@torax/2018-09-05

오 영광입니다. 저런 멍청한 댓글을 포스팅에 쓰시면 질이 떨.... 알아서하세요.ㅋㅋ

인물이 느끼는 감정이 마치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 같습니다. 2번을 천천히 읽어보게 되는군요^^

Posted using Partiko Android

물가다님. 1번 읽어도 충분하도록 잘 쓰겠습니당 ㅋㅋ 좋아는 작가 등장이 반가워요. ^^ 까뮈의 정서는 앞으로고 곳곳에 스며있지 않을까... 감사드리고 지켜봐주세요 ^^

인물의 감정선이 미묘해서 제가 두번 읽은 겁니다. 내가 놓친 것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요. 다음 편이 기대됩니다^^

Posted using Partiko Android

환상은 아름다운 동화의 세계도 되고 아니면 깊은 늪에서 허우적.
거리기도 하다 깨어나죠 ~~!!!

1화의 첫댓글!! 수선화님 고마워요. ㅎ

언젠가 환상을 보게된다면 아름다운 동화 쪽이길. ^^

이오스 계정이 없다면 마나마인에서 만든 계정생성툴을 사용해보는건 어떨까요?
https://steemit.com/kr/@virus707/2uepul

짱짱맨. 오랜만이예요.

카비님도 소설을 연재하시는군요. 뭔가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글입니다.

베테랑 독서가가 방문하시니 긴장되네요. ㅎㅎ 재밌게 읽어주시고 부족하면 비평도 해주세요. 북키퍼님 방문 감사합니다. ^^

위대한 자까님
리스팀은 조금 있다가
하겠습니닭.

최고 금손 일러스트레이터님.
알겠습니당. ㅋ

챗은보앗고
이제보니
내가
리스팀을안했구려ㅋㅋㅋㅋ

ㅋㅋㅋㅋㅋ 압. 나는 한 줄 ㅋㅋㅋ

꺼ㅡ억ㅋㅋㅋㅋ

내가 이거 아티스팀에 제대로 올렸으면 보팅 받았을 수도 있었는데... 잘 그려줬는데 미안하다.

ㅋㅋㅋㅋㅋ어제막말아재가ㅋㅋ낮엔순둥이롴
낮과밤이다른카비

^^ 알았지?

뭘알아 똥멍츙

지구 따위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고독.

쿡쿡쿡 흐콰한다

쿡쿡쿡 흐콰한다라.....
음...

제주도 방언인가? ㅠㅠ

급식체라고 일진들이 쓰는 말이야!!

인터넷상에서 대세가 탄 건 리즈시절의 일애갤의 일화에서 비롯된다. 당시 전투력이 충만하던 일애갤은 타입문넷과 상당한 적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검은색 바탕의 빨간 글씨로 쓰여진 현재엔 중2병이라 일컬어지는 오그라드는 글이 있었는데 이 글에 "큭큭.. 흑화할거 같습니다."란 문장이 있었고 그 미친 기믹으로 인해 순식간에 대세를 타게 되고 이후 "큭큭...", "흑화"는 중2병과 달빠를 대표하는 허세단어로 정착하게 된다. 취존과 함께 묻히지 않고 쓰이는 아주 범용성 높은 무서운 단어이다.

출처 https://namu.wiki/w/%ED%9D%91%ED%99%94

토랙스....읽어도 모르겠어... 난 이미 틀렸어. 먼저가
...

1화가 탄생했네요.
카비님 글 잘쓰세요^^
두둥 2화 기다릴께요~^^

하하. 2화 기다린다는 말이 왜이리 반갑나요. 고마워요 미미스타님. ^^ 그나저나 미파 바이러스가 워낙 세서 레드벌룬바이러스가 먹힐지 걱정입니다. ㅋㅋ

소설과 아티스팀의 콜라보라니 ㅋㅋ
물론 소설은 아직 읽어보진 않았습니다 ㅋㅋㅋ

육아대디 시군요. ㅋㅋ 쌍둥이 육아대디로서 반가움을 느낍니다. 여기 대여 가능한 남자아기 한명 대기중이니 연락주세요. ㅋ 시간되면 한번 읽어봐주세요. ^^ 방문 감사드립니다. ㅋㅋ

어익후 ㅋㅋ 정중히 사양 할게요 ㅋㅋㅋ 이미 남자아이 한명+ 13주의 태아가 절 기다리고 있답니다 ㅋㅋㅋ
환상이 꼭 눈을 감았을때 눈앞에 보이는 듯한 모습(까만게 움직이는둣한 모습)을 표현한것처럼 느껴집니다 ㅋㅋㅋ

Coin Marketplace

STEEM 0.18
TRX 0.13
JST 0.028
BTC 57497.94
ETH 3099.12
USDT 1.00
SBD 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