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8, post # 26.

웨더스비 교수 씀

웨더스비 교수께서 출국하기전에 원고를 보내주셨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미국이 소련에 대한 봉쇄전략의 일환으로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했습니다. 터어키와 그리스 문제가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결국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에 대한 경제적 기술적 지원이 이루어지고 정부 수립문제까지도 논의된 것입니다. 결국 한국의 단독정부 수립에 관한 문제도 결국은 소련에 대한 봉쇄전략의 일환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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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에서 우리는 1946년과 47년에 미국이 동 지중해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는 책임을 이어받은 것을 알아 보았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일을 수행하려면, 국회가 필요한 자금을 승인해 주어야 했다. 1946년 중간선거 당시, 공화당은 전쟁기간동안 확장된 정부의 규모를 줄이겠다는 공약을 제시하면서, 1930년 이후 처음으로 의회에 대한 통제를 확보했다. 그리하여,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인들이 잘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던 이유로 말미암아 미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금을 사용하기 위해 부정적인 입장의 의회의원들을 설득해야 했다.

이런 어려운 정치적 상황에서, 트루먼은 미국의 원칙을 호소하기로 결정했다. 1947년 3월 12일 의회 특별 합동회기에서 행한 연설에서, 대통령은 미국인들이 터키와 그리스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고, 미국이 “무장한 소수나 외부의 압력에 의한 압제를 거부하는 자유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포괄적인 개입을 해야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트루먼 독트린으로 불리게 되었다.

대통령의 전략은 적중했다. 의회는 신속하게 2억5천만불을 그리스에 1억5천만불을 터키에 할당하면서, 소련의 위협이나 내부의 공산주의 봉기에 취약한 것으로 간주되는 다른 나라들을 지원하기 위한 전례를 만들었다. 국무부는 새로이 정책기획실를 만들었으며, 이러한 원칙이 적용될 수 있는 정책내용을 작성했다. 1947년 7월 해당 부서의 책임자로서 나중에 주소련대사가 된 조지케난은 Foreign Affairs지에 “Sources of Soviedt Conduct(소련 행동의 원천)”라는 제목의 논문에 새로운 개념을 발표했다. “Mr. X”라는 필명으로 케난은 소련은 자신의 광범위한 국경을 따라 약한 지역을 찾고 있으며, 이는 자신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노골적인 병합을 하거나 그 외연을 따라 순종적인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그 이웃 영토로 세력을 확대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Mr. X”는 계속하여 독일, 일본 그리고 영국같이 이전에 러시아의 팽창주의를 억제했던 강대국들은 더 이상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이 그러한 역할을 채워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었다. 미국의 군대는 동원해제되었으며, 평시에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 하지 않은 전통적인 원칙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대신 미국은 경제적 정치적 자원을 소련의 변방에 있는 국가들의 번영과 안정을 위해 사용해야 했다. 케난은 모스크바가 전시 동맹이 합의한 국경까지 팽창을 제한하도록 강요될 수 있다는 것에 낙관적으로 단언했다.

한반도에 대한 봉쇄는 어떻게 수행될 수 있을 것인가 ? 한반도의 상황은 터키의 위기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한국에는 모스크바가 위협할 정부가 아직 없었다. 대신, 소련군은 한반도의 북쪽 절반을 점령하고 있었으며, 최소한 공산주의자를 배제하지않는 한국의 새로운 정부 수립에 협조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미국은 공동위에서 소련과 협력한다는 공약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회담이 지연되는 동안, 미국은 남한에 경제적 기술적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우호적인 조건을 조성하고지 했다.

이렇게 미국무장관 딘 에치슨은 그리스 원조에 관한 상원 청문회에서 행정부가 향후 3년동안 한국에 20억 달러를 원조할 것임을 의회에 확인했다. 만일 이 원조가 서울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면, 미군은 한반도를 소련의 통제에 취약하지 않도록 한가운데 미군이 철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어떻게 한국의 상황에 대한 미국의 생각이 1947년까지 발전해나갔는지를 살펴볼 것이며, 여기에는 유엔에 새로운 정부의 수립문제에 대한 제안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 포스트는 다음 자료에 의거했다.
James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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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very great work my brother,i have to learn a lot from you,success is always sir,@wisdomandjustice

좋은 하루 보내세요!

외교가 강대국의 힘 겨루기라면
힘을 키워야 하는데....

이번주도 즐건 시간되세요:]

오늘도 많이 배우고 갑니다. 다음포스팅이 기대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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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의 윈윈 관계였죠. 유럽은 재건에 도움을 받고 미국은 동맹방어선을 얻고....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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