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1948, post 21.

in #wisdomandjustice6 years ago (edited)

웨더스비 교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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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은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기전의 상황에 대한 것을 전편에 이어 정리한 글입니다. 당시 남한은 경제상황이 악화되어 있었으며 미군정정부의 무리한 정책으로 인해 민심이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경상도 지역에서 10월 폭동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미측에서는 해방직후 남한에서 발생한 각종 소요사건에 소련이 직접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미군정장관 하지 장관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시도가 무의미하므로 빨리 정부를 수립하고 치안을 유지할 우익세력을 확보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무부는 전후 광범위한 영토문제 처리를 위해 소련과 협력이 우선이므로 한반도에 대해서는 소련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미국무부는 소련과 협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낭만적인 생각에 입각해서 한국문제를 바라보면서 소련과 협력만 잘되면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는 교훈을 남깁니다. 외교에서 상대방의 호의와 선의에 기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앞의 포스팅에서 언급한 1946년 6월 북한지역에 대한 상황에 대해 제출한 보고서에서, 트루만 대통령의 대리인 에드윈 폴리는 소련의 정책에 대해 매우 열광적으로 묘사했다. 사실 소련의 점령정책의 성공은 그해 말까지 계속되었다. 토지개혁에 이어서 1946년 여름 소련 대표부는 노동자를 위한 사회주의적 보호의 모든 범위를 보장하는 노동법을 시행했다. 북한지역의 조선인들은 이제 노동조합 가입, 하루 8시간 노동, 직장에서의 상해시 보상 그리고 안전과 보건 보호의 권리를 보유했다. 게다가 농민, 학생 그리고 여성을 위한 소련식 노동 조직은 유급휴가와 레저와 교육을 위한 활동을 제공했다. 결국 8월 산업은 국유화되었다. 거의 모든 산업은 일본의 기입과 개인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는 부가 과거의 압제자로부터 북한의 초기국가로 이전되었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는 매우 인기있는 정책이었다.

대조적으로 남한에서의 상황은 더욱 더 절망적이었다. 식료품 부족과 매점의 공포는 미국 대표부로 하여금 식량의 탈취를 시도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강경한 노동정책은 “10월 인민 저항”을 초래했으며 이는 부산의 철도 파업으로 시작하여 대구와 서울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강제적인 곡물 공출에 저항하는 농민들과 연합하였으며, 이 저항은 남동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폭력의 대부분은 상당수가 경찰에 행해졌으며, 이들중 다수는 경찰에 근무했었고, 그들은 이제 사람들이 싫어하는 미국의 정책을 수행하고 있었다. 폭동과정에 400명 이상의 경찰이 잔혹하게 살해되었으며 이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투입된 미군에게 쇼크를 주었다.

우리는 아직 아직 1946년 10월 폭동당시 소련의 기관이 어떻게 조선 공산당의 개입을 유도하고 자금을 지원했는지에 대한 완전한 러시아 자료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북한의 소련기관들이 남한의 좌파 집단의 활동을 조정하는 책임을 지고 있으며 그들이 이러한 역할을 매우 성실하게 수행한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하지 장군은 10월 워싱턴에 소련이 지원하는 남한에 대한 침략이 6개월이내에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미군부대는 무력 재통일을 방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보고했다.

그리하여 하지는 펜타곤에 추가적인 부대를 요구하는 동시에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이로 생각한 우파 청년 집단의 강화에 대한 허가를 요청했다. 하지는 전쟁성 장관 페터슨에게 편지를 통해 절망감을 털어 놓았으며, 거기에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국가를 요구하고 있으며... 러시아인들은 지속적으로 고도로 훈련되고 이념화된 공작원들을 우리지역에 침투시켜 무질서를 초래할 수 있는 저수준의 경제적 상황에서 가능한 모든 이점들을 이용하고 있다... 국제적인 여건들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며 이제 미국에 대해 전력을 지향한 공산주의의 세계적인 공세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나는 우리나라가 소련식 민주주의에 너무 빠지기 전에 깨어길 기대한다”라고 설명했다.

하지장군은 1947년 초 전쟁성에 인플레이션, 전력부족 그리고 식량부족으로 인한 경제위기가 미군정정부를 불신하게 하고 폭력을 초래한다고 보고했다. 그는 워싱턴에게 모스크바와 협상을 중시하고 한국에 새로운 정부의 수립을 주장했다. 그는 모스크바와 협상정책은 미국지역의 한국인들을 실망하게 하고 사기를 저하시킬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워싱턴은 하지 장군의 경고를 무시했다. 국무부는 공동위원회의 재개를 계속 기대했다. 국무부는 모스크바와 유럽, 근동과 아시아의 광대한 지역에서의 영토에 대한 논의를 수행하고 있는 토의를 고려하여, 한국에 관한 협상에 있어서 대립을 하려고 한다는 어떠한 조짐도 회피하고자 했다.

한국에서 소련의 지정학적 정치적인 이점을 알고 있었던 미국 외교관들은 한국에서의 미국 입장은 “러시아와의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무런 희망이 없다. 일방적인 행동은 우리가 해야한다면 단기간에 그쳐야 한다. 우리의 계획은 소련에게 협력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단이라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무부의 생각에, 만일 워싱턴이 약속을 이행할 강력한 의도와 모스크바와 협조할 의지를 보여준다면, 한국은 독립과 민주적인 정부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1947년 가을 미소공공위원회의 재개와 그 실패의 결과를 알아 보겠다.

[참고자료]
This post relies again on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It also relies on John Merrill, Korea: The Peninsular Origins of the War (University of Delaware Press,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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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공공위원회얘기 기대하겠습니다

"폭력의 대부분은 일본 경찰에 행해졌으며" 과거에 일본 경찰이었다는 얘기겠죠?

ㅎㅎ감사합니다

46년에 있었던 막후의 비하인드스토리라니, 우와!!! 이런 놀라운 이야기들도 다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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