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한국의 분단 1945 - 1948, post 23

웨더스비 교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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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포스트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직전에 미국의 국제정치적 상황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웨더스비교수는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이후 강력한 국가로 부상하면서 미국과 서방세계를 적이라고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합니다.

통상 냉전의 기원을 언급하면서 스탈린이 서방세계를 적으로 보았다는 부분을 별로 언급하지 않는데 웨더스비교수는 스탈린이 국내에서 행한 연설에 주목을 하고 있습니다. 이부분은 이제까지의 냉전연구에서는 소홀하게 다루어져 있었습니다.

특히 이란과 터키에서 소련의 공세적인 입장이 미국의 소련에 대한 태도를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 전쟁의 기원을 언급하면서 이란과 터키에서 미국과 소련의 입장에 대해서는 많이 다루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웨더스비 교수는 우리가 한반도 문제를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같습니다.

1947년 초 한국의 상황이 급박해지자, 특별 부처간 위원회가 신속하게 움직였다. 2월 후반부에 그들이 제출한 보고서는 당시의 정책이 게속된다면 한국에서 미국의 입장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을 제시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그들이 한국의 독립이 더 심각한 경제적 문제를 초래할 것이며 결국 소련이 전체 한반도를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미 맥아더 장군이 제안한 바와 같이, 이 문제를 유엔으로 넘기는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에서 미국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는 미국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3상 회의의 합의를 위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위원회는 미국이 향후 3년동안 약 60억 달러의 경제지원을 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남한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을 줄 줄것이며 모스크바로 하여금 미국은 자신의 점령한 지역에 책임을 진다는 것을 소련에게 보여주는 시그날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원회는 다른 유일한 방법은 미군이 철수하는 것이며, 만일 이렇게 한다면 미국의 입장을 세계적으로 심각하게 손상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특별 부처간 위원회의 보고서는 1947년 초 한국에 대한 미국의 생각은 소련과의 점증하는 경쟁에 대한 우려에 의해 형성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의 분단에 대한 미국의 결정을 이해하기 위해 이러한 갈등을 알아보아야 한다.

1945년 이전, 미국은 일반적으로 고립주의적이었으며, 거대한 대양에 의해서 보호받고 있었고, 유럽의 전쟁으로부터 떨어져 있고자 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달에 참가했으며, 일본이 하와이의 해군기지를 공격하고나서야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이러한 전략은 더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유럽의 전의 강대국들은 괴멸적인 세계대전으로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유럽의 양 극단에 위치한 두개의 거대한 국가들인 소련과 미국이, 새로운 세계적인 전쟁을 치룰 수 있는 충분한 군사적 경제적 힘을 가진 유일한 국가로서 전쟁으로부터 나타났다.

미국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동안 동맹국이었으나, 그것은 그들이 오로지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비에트 이데올로기는 미국과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을 항상 적으로 규정했으며, 모스크바와 서방 민주주의 국가와의 동맹은 독일이 패배하자 신속하게 적대적인 관계로 대체되었다. 1946년 2월, 세계대전이 끝난지 6개월 이후, 스탈린은 소련전역에 방송된 연설에서 세계는 이제 두개의 진영으로 나뉘어졌으며 그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하다고 선언하면서 새로운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비록 소련인들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다가오는 새로운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미국의 전략가들이 소련의 새로운 입장을 분석하면서, 그들은 다음 충돌에서는 독일과의 전쟁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해질 것이며, 그것은 소련이 전쟁과정에 장악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소련 제국은 이제 북한지역 뿐만 아니라 유럽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그리고 동독까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소련 영토와 자원의 이러한 광범위한 팽창은 다가오는 충돌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전략기획가들은 소련제국의 추가적인 팽창을 미국의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으며, 이는 소련 측에 더 많은 자원과 전쟁준비 능력을 추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한 이유로 인해, 소련이 1946년 석유가 풍부한 이란에서 자신들의 군대를 철수시키기를 거부하고 북이란에 공산당 조직을 강화했을 때 워싱턴은 불안에 빠졌다. 동시에 소련은 흑해와 지중해의 좁은 통로인 터키 해협에 소련군의 기지를 허용할 것을 이스탄불에 강요하기 위해 터키 국경에 군사력을 집중하였다. 대영제국은 과거 이지역에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독일과의 전쟁으로 쇠약해졌으며, 터키와 이란은 모스크바에 대한 보호를 위해 미국으로 방향을 돌렸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이란과 터키의 위기를 살펴보고 이러한 사건의 발전이 한국에 대한 미국의 입장에 영향을 주었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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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istory of korea is very remarkable,really is useful work my brother,@wisdomandjustice

그러나 지금은 쏘련도 군사력 경제력 모든게 여의치 않아 힘이 약화된 상태죠!!
미국 트럼프에 미국은 미국를 위대하게 하고 전세계를 자유민주주의 가치을 위해.
중공 붕괘 작전 북한붕괘 공산주의 붕괘 초읽기에 들어 갔다고 봅니다
트럼프에 예루살렐 수도 선언에 의미가 공산주의 붕괘 작전 아니면 무었이겠습니까~~!!!

스탈린이 미국을 적으로 생각했겠지만 그렇기에 당장 움직이진 못했겠죠. 미국의 힘을 느낀데다가 소련도 사실 유럽의 나라들처럼 좋은 상황은 아니었으니 ㅎㅎㅎㅎ

양질의 글 잘 읽고 갑니다

역사에는 젬병이라 무슨 댓글을 달아야할 지 모르겠네요 ㅜ

꼭 알아야할 역사 이야기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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