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1948, post # 17

in #wisdomandjustice6 years ago (edited)

웨더스비 교수 씀

스탈린 루즈벨트.jpg

이번 포스팅은 전편에 이어 북한에서의 토지개혁에 관한 부분을 다룬 내용입니다.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기 전에 토지개혁을 실시하였습니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기 전에 이미 한반도를 점령한 미국과 소련의 점령군 사령관들은 남북분단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담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회담에서 미국과 소련은 남북간 상호교역에 이견을 드러냈으며 그 이유는 소련이 자신들의 경제적인 이유로 북한에 경화를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 소련은 자신들이 요구하는 방식의 권력이 북한에 들어서도록 하기 위해 토지개혁을 실시한 것입니다. 결국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 분단의 큰 그림이 그려지고 분단의 구체적인 조치들은 그 이후에 하나씩 시행된 듯 합니다. 즉 분단의 내적 구조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토지개혁이 아닌가 합니다. 바로 그런 점을 웨더스비 교수는 지적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 이 문제에 대한 웨더스비 교수는 자신의 평가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합니다.

한국의 점령 정책에 있어 미국과 소련의 방식이 다른 이유의 하나는 양국의 경제적 상황의 불일치였다.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어떤 나라보다 막대한 부와 산업능력을 보유한 국가로 등장했으며, 반면 소련은 전쟁으로 인해 완전하게 파괴되었다. 결과적으로 모스크바는 1945년 적군(소련군)이 점령한 모든 지역, 유럽 및 아시아에서, 가능한 한 많은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11월 미국이 38선 분단으로 조성된 시급한 문제들에 대한 리스트를 모스크바에 제출한 것을 보았다. 미국무장관 번즈는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문제에 대한 토의를 시작할때 이 안건들을 제기했다. 회의는 신탁통치의 메카니즘을 만드는 것에 촛점에 두기로 결정했으며, 양 개 점령군 사령관이 11월 미국이 제기한 경제적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신속하게 만나기로 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다. 따라서 1월 16일 소련과 미국 대표는 서울에서 분할로 인한 실질적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회담을 했다.

소련대표단 수장인 슈티코프는 양 개 군사령관 간 상품의 교역에 관한 문제들에 대한 것으로 안건을 분명하게 규정했다. 게다가 그는 이런 교역은 물물교환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북한에 공급하기 위해 부족한 경화를 지출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는 남한지역에 필요한 북한의 전기, 석탄 및 공산품을 역시 남한에서도 공급이 부족한 쌀과 교환하여 넘겨줄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회담을 교착으로 몰고갔다. 미국은 이런 조건의 수용을 거부했으며, 양측은 남북간 제한된 우편과 수송을 회복하고 라디오 주파수의 할당 그리고 공동통제 초소들의 설립과 양 점령측이 자신들의 행동을 조율하기 용이하게 하는 다른 조치들에 대해서만 합의했다.

모스크바 회담 직전 소련은 북한에 소비에트 방식의 경제체제를 위한 기반을 신속하게 구축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첫번째이자 가장 기본적인 단계는 소련에서의 조치 - 지주들로부터 땅을 빼앗아 농민들들에게 재분배 - 와 같았다. 그들은 공산당을 동원했으며 최근 설립된 정부조직이 3월말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기 전에 토지개혁을 수행토록 했다.

3월 5일 임시인민위원회는 개인과 기관이 보유하고 있던 다음과 같은 토지를 몰수하기 위한 법을 통과시켰다 : 일본국가와 일본인, “일본의 권력기관과 적극적으로 협력한 조선인민에 대한 배신자 그리고 일본의 질곡으로부터 조선의 해방시기에 조국을 떠난 사람들, 5전(일본식 단위인 단에 대한 러시아아 음차인 듯함) 이상의 농장을 소유한 한국인 지주, 자신들이 농사를 짓지 않고 자신의 모든 토지를 임대하는 지주, 크기에 상관없이 소유자들이라도 조직적으로 임대를 하는 작은 토지의 보유자 그리고 5전이상의 토지를 보유한 교회.
법률은 인민위원회가 지주들의 트랙터, 농기계, 부속건물과 부동산및 산림과 관계수로 그리고 다른 기계장비에 대한 통제를 실시하며 이것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할 것을 규정했다. 이 시기에 서울의 소련 영사관에 근무했던 샤브쉬나(F.I. Shabshina)에 따르면, 100만 전 이상의 토지가 몰수되었으며 72만 5천명의 농민들에게 분배되었다.

토지개혁에 대한 모든 기록들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으나, 소련의 문서들이 이법에 대한 격렬한 반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문서들은 또한 당원들이 “지나친 질투”를 사용한 경우를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일어난 것 처럼, 공산당의 토지개혁은 인간의 탐욕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용되었다. 어떻든간에 5 주 이후 김일성은 당조직국의 확대회의에서 토지개혁은 “국가의 봉건적 관계를 파괴하였으며, 북한의 완전한 경제발전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고 보고했다.
다음 포스팅은 소련 외무부가 3월 20일의 미소공동위원회 개최를 위한 소련 대표단에게 보낸 지시를 검토할 것이며, 그 지시는 “민주적” 국가라는 것이 임시정부가 될 수 있도록 공동위원회가 조성해야 하는 구체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참고자료]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46, Volume VIII

F.I. Shabshina, “Koreia posle vtoroi mirovoi voiny [Korea after the second world war,” Akademiia nauk SSSR [Academy of Sciences USSR] Krizis kolonial’noi sistemy natsional’no-osvoboditel’naia borba narodov vostochnoi asii [Crisis of the colonial system, national-liberation struggle of the peoples of East Asia] (1949); Russian State Archive of Social-Political History, Fond 17, Opis 128, Delo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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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무상함과 세월 속에 변해가는 사상과 가치와 모습들이 그저 신기할뿐입니다.
지금은 통일을 목전에 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니 말이죠 먼 훗날에는 통일된 이 땅에서 늙어가는 제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통일을 당장 바라기보다는 뭔가가 되었으면 좋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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