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8, post#20

in #wisdomandjustice6 years ago (edited)

웨더스비 교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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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은 제1차 미소 공동위 이후 미국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를 정리했습니다. 미국의 정책수립과정은 지금이나 그때나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여러관리들이 한국 현지에 대한 인식은 정확하지 못했고 그 해결책 또한 미흡했던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 소련은 사전에 미리 정확한 방향을 설정해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반적으로 미국의 조야는 한반도를 어떻게 관리해야하고 어떤 조치를 해야하는지 제대로 된 청사진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각각의 관리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각기 다른 상황평가와 해결책을 내 놓습니다. 결국 "확고한 인내"라는 트루먼 대통령의 정책도 오락 가락 하는 상황이 된 듯 합니다. 트루먼의 "확고한 인내"가 오바마의 북핵무시정책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습니다.

1946 봄 남한에서 정치적 암살과 여타 폭력들이 일어났으며. 이는 미국 관리들이 공동위원회의 정회가 한국의 내전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우려하게 했다. 하지 장군의 정치자문관 윌리암 랭돈은 워싱턴에 모스크바와 1947년 초까지 점령군의 상호철수에 대한 합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국무부는 강력한 입장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동유럽에서의 소련 점령정책, 이란에서 소련군을 철수시키는 것에 대한 실패 그리고 터키에 대한 소련의 위협에 대한 우려로 촉발된 “확고한 인내”라는 새로운 정책을 채택했다. 따라서 애치슨 국무장관은 5월 18일 서울에 있는 미국관리들에게 미국은 소련이 표현의 자유 원칙을 인정할때까지 공동위원회 회담을 재개하지 않을 것임을 통보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소련이 모스크바 3상회의의 협의에 반대하는 정치단체와 협의를 허용하는 것을 거부하는 한, 미국은 위원회의 보이코트를 계속할 것이었다.

애치슨은 한국인들이 공동위에 대한 모스크바의 입장 때문에 한국인들이 소련에 부정적으로 돌아서면 스탈린이 미국의 조건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비현실적으로 믿고 있었다. 다른 미국 관리들은 북한에 소련이 세운 자치기구는 남한에 있는 군정정부와 비교해 보았을 때 더 나쁘게 보여질 것이라고 현실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이문제를 고치기 위해서 워싱턴의 국무부/전쟁성/해군성 협조위원회는 미국 점령군 사령관에게 제한적인 자치정부 기구를 위한 선거를 실시할 것을 지시했다. 랭던은 이런 정책의 결정에 고무되었으며, “소련의 전략은 공산주의자들의 권력장악을 위한 길을 열여주는 미국의 좌절과 궁극적인 철수에 달려있다. 그러나 단결, 인내 그리고 견단력을 통해 미국은 강력하고, 독립적이며, 민주적인 연합을 강화함으로써 모스크바의 계획을 막아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6월 주한미국관리의 입장은 동맹 재건 위원회(Allied Reparations Commission)의 트르만 대표인 에드윈 폴리(Edwin Pauley)가 전달한 보고서에 의해서 강화되었다. 폴리는 5월말 북한을 여행하면서 적군(소련군)이 일본이 건설했던 산업 및 조선의 중요한 장비들을 해체하여 소련으로 보내고 있다는 보고서를 조사했다. 일본의 부흥에 대해 동맹국들이 아직 합의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는 불법적인 약탈로 간주되는 것이었다. 폴리는 수많은 산업지역을 검열하고 소련이 사실상 그런 강탈을 수행하지 않고 있다고 보고했다. 대신 그들은 북한의 부수적인 산업능력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니었으며 폴리가 보기에, 소련의 이러한 노력은 그들의 “괴뢰”가 완벽한 통제를 장악할때 까지 한국에 주둔할 의도로 보였다.

폴리는 그의 보고서에서 미국은 한국에 더많은 관심을 가져야한고 주장하면서 이것은 “아시아에서 우리의 완전한 성공이 달려있는 이념전투현장이다”라고 강조했다. 특별히 그는 모스크바에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경고했으며, 이는 한국의 상실은 일본의 안보를 위험하게 할것이기 때문이었다. 폴리는 미국이 한국인들에게 소련이 한반도와 관련한 현재의 합의를 위배하는 것을 알려주고, 미국이 의미하는 조건에서의 민주주의의 이점을 증진하는 캠패인을 시작할 것을 제안했다. 북한에서 소련이 제공하는 교육의 기회와 전반적 복지 증진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정적인 반응을 보았으므로, 그는 미국이 경제지원, 교사와 기술자들은 남한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미국이 대중의 요구와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소련은 결국 한국을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폴리의 보고에 긍정적으로 반응했으며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재검토하기 위해 즉각 국무장관 Byrnes와의 회의를 주재했다.

같은 달, 점령지역 담당 미국무부 차관보 존 힐드링(Jhon Hildring)은, 미소공동위의 교착은 “언론의 자유 원칙을 존중할 것을 강조하는 미국과 공공연하게 소련에 반대하는 한국의 지도자들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소련의 결정간의 충돌의 결과이다. 이러한 지도자들은 일본의 항복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고령의 “망명자” 집단을 구성하고 있다. 그들은 온전하게 한국인들의 정치적 의견을 대표하지 않으며 또한 그들은 한국에서 미국의 목적 달성과 한국의 민주주의 수립에 필수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반면 그들의 존재는 정치적 측면에서 소련과 합의를 도달하는데 심각한 어려움을 증가시키고 있다.”고 보고했다. 힐드링은 미군정정부가 공동위원회의 업무를 재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정치문제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정적인 참여가 소련으로 하여금 언론 자유의 원칙을 인정하도록 강요할 것이라는 비현실적 소신에 따른 것이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미소공동위의 재개를 위한 조치들을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This post relies heavily on James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His account cites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46, Volume VIII; Edwin W. Pauley, “Survey of Resources in Manchuria and Korea and the European Reparations Program,” Department of State Bulletin 15 (August 4,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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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나라에 둘러쌓여서 지금까지 고유 문화가 있는게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게 저력이지요

잘 보고 갑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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