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1948
웨더스비 교수 씀
웨더스비 교수께서 미국에 도착하자 마자 숙소를 정리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바로 기사를 보내주셨습니다.
오늘의 포스팅은 당시 트루만 행정부가 한국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라는 국민들의 정치적 압력과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한 방안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미국은 한국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었으며 한국이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대규모 원조를 포함한 조치를 검토하는 과정을 정리했습니다. 미국내의 정치적 상황과 유럽문제까지 맞물려 복잡한 과정속에서 한국문제가 처리되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난 포스트에서 우리는 1947년 3월 트루만 독트린 선언 직후 미국이왜 한국에 2억달러의 경제적 기술적 원조를 확대하려고 고려했는지를 알아 보았다. 이는 남한에 대한 지원이 남한지역에서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는데 기여함으로써, 남한을 소련의 야욕에 취약하게 남겨두지 않으면서 미국의 점령군을 철수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순전히 낙관적인 관점은 “병사들을 고항으로 돌러 보내라”라고하는 미국내의 점증하는 압력에 의해 점화되었다. 한국의 일부 병사들은 자신들의 고향 신문에 자신들의 열악한 생활환경에 대해 불평하고 장교들의 부패와 가혹행위를 고발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트루만 행정부는 점령을 종식시키라는 정치적 압력에 직면함과 동시에 한국의 지원을 위한 계획을 수립해야 했다. 전쟁성 차관 패터슨에게 보낸 국무부의 계획은 새로운 임시정부에 5억 4천만 달러를 제공하고 미국의 군사관리를 폭넓은 정책 결정능력으로 한국에 조언할 수 있는 민간인 고문관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냉전의 전선이 강화됨에 따라, 미국 관리들은 한국에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소련과 협조하는데 점차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국무부는 만일 공동위원회가 다시 개최된다면 이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조치를 요구했다.
명석한 두뇌의 군인이었던 패터슨은 경제지원이 남한의 상황을 개선할 것이라는데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대신 가능한 한 빨리 한반도에서 미군을 철수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하지장군은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지원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그는 언론기자회견에서 “만일 우리가 러시아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약속을 혼자서라도 이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모스크바 3상회담의 합의를 공공연하게 위반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서, 하지 장군은 미국은 단독정부 수립을 하지 않으며, 다만 남한에서 자유, 민주주의 그리고 건전한 정부를 강화하려고 한다고 어정쩡하게 선언했다.
1947년 봄까지 트루만은 미국이 한국에 원조를 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부정했다. 그러나 그때 행정부는 만일 소련이 공동위원회 협상을 재개하는 것을 거부하면 미국이 이 원조 프로그램을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더욱이 마지막으로 이문제를 유엔으로 넘기기로 했다. 4월 8일 존 카터 빈센트는 이러한 견해를 “우리의 프로그램은 우리가 한국을 소련의 지배에 포기해버리는 대안을 제외할 때 우리 프로그램은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의 개입 축소]를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한 방법이다”라고 딘 에치슨에게 요약해서 보고했다.
1947년 모스크바에서 외무장관 회담에서 소련과 서방동맹국간 협조의 불가능성은 점점 명백해졌다. 회담은 주요의제인 독일과 오스트리아 평화조약에 대한 합의 도달에 실패했다. 국무장관 조지 마샬은 “ 소련은 부적절한 지역과 과도한 인구로 인해 경제적으로 재앙을 겪을 있는 국가에 대한 절대적인 통제권을 장악하여 독일에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수립하려 하고 있으며, 생산물의 상당수를 원칙적으로 소련에 대한 보상으로 저당잡으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계획은 미국의 보조금을 명백하게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일과 유럽의 경제생활을 붕괴시키고 독재의 출현과 소요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에 합의에 도달할 수 없었다고 회담의 결과를 보고했다.
마샬 장관은 또한 모스크바 회담에서 한국문제를 제기하여, 경제적 통합의 재건과 임시정부수립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소련을 비난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양측이 공동위의 진전이 없는 문제에 대해 논의했으며 놀랍게도 어떻게 회담을 재개하게 되었는지를 알아 보겠다.
[참고자료]
이번 포스팅은
James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를 참고했으며
마샬장관의 보고서 내용은 온라인에 올라와 있는 The Avalon Project, Documents in Law, History, and Diplomacy of the Yale University Law School.]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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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냉전으로 발전할 사이다보니 합의는 불가능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