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9 완벽한 직장은 없다

in #kr-pen6 years ago

제 평생에 최고의 직장인이 되어 생활한 지 2년만에 저는 완전히 지치고 맙니다. 직장인으로서 대부분을 얻었지만 건강을 잃었지요. 하루 12시간 이상 일했지만 급여는 최저시급으로 따지면 일당 노동자와 별 차이도 없었습니다. 완전 노동력 착취를 스스로 한 꼴이었죠. 저는 또 이직 병이 돋습니다. 그 발병의 시작은 어린이날이었습니다.

입사하고 첫 어린이날이었습니다. 출근하라고 하더군요. 으잉? 원래 빨간날은 쉬는날 아니었던가요? 저는 이 회사 와서야 공휴일의 개념을 배웠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직장인은 빨간날은 쉬는날이라고 알고 계실 텐데요, 법적으로 따지면 공휴일은 관공서의 휴일이지 직장인의 휴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헐~~~ 30년 넘게 알고 있던 공휴일의 개념이 깨졌지요. 게다가 주위 모든 회사가 주5일인데 제가 다니던 회사는 15명 미만이라고 주5일도 아니었습니다. 토요일에 출근하기 정말 싫더군요. 2호선 갈아탄 후부터 구로디지털에서 내리기 까지 완전 만원 지하철이 정상이지만, 토요일엔 앉을 자리도 있을 지경이었습니다. 그 많은 직장인들이 다 쉬는 날인 것이죠. 만원지하철이던 전철에 앉아 출근하면 정말 죽을 맛입니다. 그런데 공휴일에도 출근하라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요. 다른 공휴일도 아니고 어린이날에. 나중에 아빠가 된 후에도 어린이날에 출근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날 출근하며 이 회사 절대 오래 다니지 않겠다고 작정합니다. 나중에 몇 년이 지난 후에 퇴사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제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어린이날 출근하며 퇴사하기로 마음 먹었지요.'라고요.

결국 온 주위 사람들에게 저를 자랑질하고 다니던 사장님은 제 사직서를 반려합니다. 저는 주5일근무에 공휴일 휴무를 원했지만 사장은 불가라는 답만 했습니다. 시급으로 따져도 일당직과 별 차이도 안 나는 10년 경력의 개발자 월급을 올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주5일로 승부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사장은 절대 할 수 없다는 답변이었고 저는 재차 사직서를 내고 퇴사합니다.

변명은 좋습니다. 어린이날 출근하며 퇴사를 작정했다는 변명. 틀린 생각도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완벽한 직장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퇴사를 했습니다. 수많은 이직을 하며 경험한 '완벽한 직장은 없다'를 깨달았으면서도 퇴사를 했습니다. 사장도 잡고 연구소장도 잡고 모든 사람이 잡았지만, 먼저 도망가겠다는 말만 하고는 나와버렸습니다. 저를 시작으로 연구소 연구원들이 한두 달 안에 전부 퇴사했더군요. 그 회사는 결국 연구원 0명이 되자 개발을 외주로 돌립니다. 채용이 안 됐거든요. 주5일 안 하는 회사라 어느 누구도 다니려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포괄임금제라서 퇴근시간이 저녁8시였습니다. 이거 매우 불편하더군요. 저야 어차피 매일 야근이지만, 가끔 친구라도 만나려면 6시에 퇴근해야 하잖아요. 이 회사 다니며 친구도 못 만났습니다. 결국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일만 하는 일벌레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죠. 주6일근무에, 정해진 퇴근 시간이 20시, 공휴일도 출근. 이렇게 일 시키고 돈이라도 많이 준다면 몰라, 급여는 일당직과 별 차이도 없으니 그 후로 채용을 못하더군요. 결국 연구소를 지탱해준 건 저였던 것 같습니다. 힘들어도 집에도 안 가고 회사에 충성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 분위기에 쓸려가던 연구원들은 제가 퇴사하자 회사를 떠났습니다. 사람이 일할 곳이 못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입니다.

이직할 회사를 정하지 않고 퇴사한 저는 2년 동안 내 인생을 걸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해봤으니 미련도 남지 않았습니다. 다시 식당에 갈까, 아니면 생산직으로 갈까 싶었습니다. 제가 책을 좋아했기에 출판사나 교보문고 등에도 이력서를 내봤지만 서른이 넘은 신입사원을 필요로 하는 출판업종은 없었습니다. 출판사 마케터로도 지원해봤지만 신입 치고는 나이가 많다고 채용이 안 됐습니다. 책 파워블로거로 이름을 알리던 시절이라 마케터로 입사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 건 착각이었지요. 서점에서도 단순직이지만 관리자보다 나이가 많다며 죄송하다는 말만 했습니다. 서른 중반... 뭔가를 새로 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식당이나 생산직으로 가는 수밖에...

그러던 중 한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연락이 옵니다. 면접보러 오라고요. 그 엔지니어링 회사는 휴대폰을 개발하는 회사였습니다. 뭐? 휴대폰? 제가 이것저것 다양하게 해봤지만 휴대폰은 안 해봤거든요.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그래, 기왕 개발자로 살아온 거 휴대폰은 해보고 그만두자. 그렇게 저는 기구설계자라는 엔지니어의 길을 다시 걷습니다.

새 회사는 매우 여유로웠습니다. 여유로운 게 적응이 안 되더군요. 특히나 6시에 퇴근하니 너무 심심했습니다. 그래서 퇴근 후엔 그동안 바빠서 못 읽은 밀린 책들을 읽고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와~~~ 살맛 나더군요. 바쁘지도 않은 여유를 즐기며 회사가 전에 개발한 휴대폰들의 설계도면들을 들여다보고 일본어 공부도 했습니다. 회사가 일본 휴대폰을 개발하는 회사였거든요. 일본어 공부하라고 해서 일본어 공부도 하고 여유를 부리고 있다가 갑자기 파견 대상자에 들어갑니다. 원래 저를 채용한 이유는 휴대폰 개발팀 팀원이었지만, 대우일렉 냉장고 파트에 결원에 생겨 제가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파견근무인 것이죠. 대우일렉 냉장고 연구소로 출근해서 일하고 본 회사에는 가지 않아도 되는 파견직. 살다 보니 파견직도 해보게 됩니다. 파견직은 특별히 수당을 더 붙여 줬기에 하고 싶었던 휴대폰의 미련을 버리고 대우냉장고로 출근하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 대기업 시스템을 배우며 또다시 성장하는 길을 걷습니다. 결국 기구설계는 제 인생 직업이었나 봅니다. 파견직... 실제로 해보니 눈치밥을 먹는 자리더군요. 대우 정직원이 아닌 파견직. 정직원에 비하면 대략 60~70%인 급여. 같은 일을 하고도 급여는 적은 파견직. 생산만 파견직이 있는게 아니고 연구소 연구원에도 파견직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긴 했습니다. 법으로 따지면 불법파견입니다. 판례에 따르면 파견직이 성립되려면 파견한 회사의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대우 정직원인 상관의 지시에 따라 일했으니 판례대로 하자면 불법파견이죠. 게다가 저는 3년동안 일했습니다. 원래 파견직 2년이면 정직원 전환이어야 하죠. 하지만 법이 언제 노동자 편 얼마나 들어줬나요. 게다가 연구직은 생산직과 달라 판례가 있다고 하더라도 소송에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파견직으로 3년 근무합니다. 널널하게 쉬엄쉬엄 일하며 대기업 시스템도 배우며 일합니다. 신분만 파견직이지 대우 정직원과 하나도 어김없이 똑같이 일했으니 대기업 3년 다녔다고 해도 됩니다. 실제로 가끔 대기업에서 3년 일해봤다고 자랑하기도 합니다. ㅎㅎㅎㅎㅎ 사실이니까요.

대기업, 좋긴 좋더군요. 기업 문화, 일하는 방식도 좋았고 업무적으로 외부인을 만날 때도 좋았습니다. 내부 직원들 외엔 파견직이란 걸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를 대우 사람으로 대해줬습니다. 이런 회사라면 나가라고 해도 절대 못 나간다고 버틸만 하겠더군요. 삼성과 엘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정직원일 경우 급여도 괜찮았고 복지도 상당히 좋은 수준이었습니다. 제가 일할 땐 동부로 넘어가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동부로 넘어가면서 정직원들은 연봉도 많이 올랐습니다. 동부 시스템에 맞춰나가더군요. 동부라는 대기업 소속이 된 정직원들은 입을 귀에 걸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냥 파견직일 뿐이었고 눈치밥이나 먹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처음 2년은 양문형 냉장고 파트에 있었고 나머지 2년은 김치냉장고 파트에 있었는데요, 양문형 팀에 있을 땐 괜찮았는데 김치냉장고 팀으로 가며 문제가 생겼습니다. 팀장이 감시를 하더군요. 자리를 얼마나 비웠는지 다 체크하길래 눈치밥 제대로 주네... 하며 투덜댔습니다. 정직원과의 연봉차이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과 정직원만 누리는 복지의 차이, 그리고 눈치밥으로 스트레스는 날로 쌓여갔고 중국 톈진 공장에 다니며 그냥 이곳도 싫어졌습니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었지만 중국 공장엔 정말 너무 가기 싫었습니다.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더군요. 제 가장 큰 단점 중 하나가 저질체력이라 쓰러질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톈진 공장에 가기 싫어서 사직서를 냅니다. 정직원이었다면 해고당할 때까지 다닐 수 있겠지만, 앞으로 몇 년이 더 지나도 제가 정직원이 될 일은 없을 테니까요. 지금도 대우에 파견직으로 일하는 연구원들은 정직원 못 되고 그렇게 다니고 있더군요.

그래도 대우엔 참 오래 다녔습니다. 보통 1년을 전후로 이직했던 저는 3년씩이나 잘 다녔던 것이죠. 만약 제가 김치냉장고 파트로 안 가고 다른 파트로 갔다면 더 오래 다녔을 것입니다. 제가 그만둔 이유는 단순히 톈진 공장에 가기 싫었던 거라서요. 핑계 없는 무덤 없다더니 별 핑계가 다 생깁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냥 체력적으로 힘들더라도 버틸걸 그랬습니다. 중국 공장에 가는 것만 아니면 체력적으로 힘들지도 않았고 일도 널널했으며 퇴근도 빨랐거든요. 게다가 대기업이라 내 할 일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몸도 뇌도 마음도 정신도 여유로웠죠. 저는 대우에 다니며 그 여유로움을 활용해 첫 장편소설을 썼습니다. <사랑은 냉면처럼>은 바쁘지 않은 여유로움으로 탄생한 소설이죠.

그렇게 저는 복을 발로 차버리고 다시 야근 강행군을 하는 회사로 이직합니다. 완벽한 직장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직을 합니다. 바보처럼요. 이직도 병인가 봅니다. ㅠㅠ 이노무 리셋증후군. ㅠㅠ

다음 회가 마지막이겠군요. 마지막 10회는 바로 전직장 얘기와 왜 내가 실패한 직장인인지, 그리고 사회 초년생들에게 선배로서 하고 싶은 말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0 프롤로그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1 한식당 설거지부터 시작해서 칼질 고수가 되다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2 화상 후유증으로 손이 마비되다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3 내 18년 직업 기구설계의 시작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4 학력차별 나이차별 성별차별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5 재수가 없는 걸까 내가 재수없는 걸까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6 끝도 없는 불이익 학력차별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7 재도약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8 일등 직장인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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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ha작가님의 직장이야기는 정말 다이나믹합니다. 현장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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폄범하지 않은 인생이라... ㅎㅎㅎ

항상 남의 떡이 커보인다는 ㅎㅎ
마지막회 기대할게요!

내 떡은 항상 작아 보이죠. ^^

너무 좋게 잘 읽었던 시리즈였어요. 중간에 몇번 못읽었지만.. 마지막도 기대하겠습니다. :)

좋게 읽으셨다니 다행이에요. 내일이 지나면 추석이라 아마도 마지막회는 추석 후가 되지 싶네요. ^^

어린이날 출근이라니!!

아무리 돈을 많이줘도 (정말 많이 주면 또 모르겠군요... ) 다니고 싶지 않을것 같아요

파견직 정말 서러울것 같네요. 같이 일을 하는데 임금과 대우가 다르다면... ㅠㅠ

이런 시스템이 사라졌음 좋겠네요

다른 날도 아니고 어린이날 출근이라니, 정말 해도해도 너무했죠. ^^

나하님 충분히 멋진 사회생활이세요~!!
저는 겁나서 이직 생각만하고 실천을 못하는걸요;;ㅋㅋ

저는 겁이 없어서는 아니고,,, 성질이 더러워서 이직을 많이 한... ^^
좋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동물농장 또 보러 갑니다 ㅋㅋㅋ

한 회도 안 빠지고 다 읽었네요. 마지막이라니 아쉽습니다.

와~~~ 고맙습니다. 다음 시리즈는 뭘 써야 하나... 고민이네요. ^^

참 파란만장 그 자체 인생이네요.
저도 파란 만장 하지만 나하님 처럼은 아닌데 말이죠.

지금 좋으면 다 지난 일이 되는 거죠.

찬란한 인생이어야 할 텐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고 있네요. ^^

벌써 마지막회라니..
마치 수목드라마 보듯 쭉쭉 읽어내려갔어요..ㅠㅠ
돈을 따르면 내가 힘들고 내가 괜찮으면 돈이 발목잡고...

다음 연재도 기대해주세요. 몇 가지 놓고 고민중입니다. ^^

리셋 증후군..ㅎㅎ
그것도 용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다음 편도 기대하겠습니다~^^

저의 리셋 증후군은 그냥 병인 것 같아요. ㅠㅠ

한국에 성공한 직장인이 얼마나 있을지....

성공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얼마 없을 것 같긴 합니다. ㅠㅠ 이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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