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7 재도약

in #kr-pen6 years ago (edited)

1번째 회사 : 개발 엔지니어링 - 폐업
2번째 회사 : 디지털 도어록
3번째 회사 : 의료 미용기기
4번째 회사 : 버스용 통합 계수기 - 폐업
5번째 회사 : 개발 엔지니어링 - 폐업
6번째 회사 : 프리랜서 - 폐업
7번째 회사 : 원적외선 난로
그리고... 다시 식당.

서른 중반에 도착한 저는 이제 개발이 지긋지긋해집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학력차별이 지긋지긋해집니다. 말하는 저도 지긋지긋하고 읽는 독자님들도 지긋지긋해졌습니다. 다행히도 이제 저 지긋지긋한 말은 더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개발 일이 징글징글하여 식당에 들어가게 됩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식당이었고 신기하게도 주일날 쉬는 식당이었습니다. 잡코리아를 뒤지다가 주일에 쉰다는 말이 너무 매력적이라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식당은 냉면 전문점이었고 제가 군대 가기 전에 일했던 식당에 비하면 1/5수준도 안 되는 규모였습니다. 저는 예전에 냉면부에서 일해봤고 손반죽도 할 줄 안다고 했더니 오이 하나 주며 썰어보라고 하더군요. 칼질을 안 한지 10년이 넘었기에 좀 긴장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와~~~ 신기하게도 10여 년 전 실력이 그대로 똑같이 나오더군요. 가수들 보면 데뷔 전 연습생일 때 몇 년 동안 연습한 춤을 몸이 평생 기억한다고 하잖아요. 몸은 머리보다 더 기억력이 좋다는 걸 체험했습니다. 10년 넘게 안 한 칼질이 전혀 녹슬지 않아 저도 놀랐고 주방장도 놀랐습니다. '손반죽도 보여드릴까요?'라고 물었더니 괜찮다며 '원래 신입은 120인데, 넌 신입 아닌 걸로 쳐서 150 줄게.'라고 하더군요. 의외였습니다. 그리고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세전 150이냐고 물었더니 세금 안 떼고 그냥 150 다 준다고 하더군요. 원래 식당들이 보면 직원으로 등록 안 하고 퉁쳐서 줍니다. 원하면 등록해주겠다고는 하지요. 제가 마지막 회사에서 세후 받은 금액보다 겨우 20이 적었습니다. 20 정도면 뭐 양호했지요. 적어도 머리는 안 써도 되니까요.

와~~~ 여기가 천국이더군요.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캐드를 만지며 욕 얻어먹고 차별받으며 스트레스받았지만 여긴 천국이었습니다. 머리 쓸 일이 없다는 게 가장 행복했습니다. 매일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설계하고 철야하고 또 철야하고 잠이 부족해도 몇 달씩 철야해서 개발해놔도 또 욕 얻어먹던 개발일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래, 역시 난 식당 체질이야. 머리 쓸 필요 없이 몸만 쓰며 일하니 너무 행복했습니다. 칼질이야 뭐 눈 감고도 하고, 반죽은 기계가 하고, 10여 년 전 식당에서도 주문 4~50개씩 밀려도 당황하지 않고 해결했던 경험과 노하우를 몸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식당들이 대부분 비슷한데요, 아침 10시 출근에 밤 10시 퇴근입니다. 중간 쉬는 시간은 식당마다 달랐는데요, 여긴 1시간 30분 쉬는 시간이었습니다. 점심 후 손님이 적은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교대로 쉬는 것이죠. 먼저 일하던 나이 어린 직원들도 저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칼질 실력도 수준급인데다가 손반죽이 가능한 완전 냉면부 기술자였거든요. 형이라고 부르며 잘 따르는 동생들과 즐겁게 일했습니다. 땀 흘리며 몸으로 일하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노동의 가치 같았습니다. 9시 30분부터 마감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너무 가벼웠습니다. 밤공기가 시원하고 날아갈 것 같더군요. 야근하며 12시간 근무하던 회사와 달리 간은 12시간을 일해도 즐거웠습니다. 게다가 여긴 학력이 필요가 없는 곳이라 더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 첫 장편소설 <사랑은 냉면처럼>은 제가 20~21살에 한식당에 냉면부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썼습니다. 당시 주방엔 대부분이 고졸이었고 대졸도 몇몇 있었습니다. 한 대졸자는 제게 이렇게 말했지요. '난 네가 부럽다. 넌 벌써 이만큼 올라갔는데, 난 학교 다니느라 이제 신입이야.' 전 '그래도 많이 배우셨잖아요. 전 이론은 하나도 몰라요.' 그러자 형은 '아니야. 전혀 안 그래. 여기 와서 보니까 학교에서 배운 거 하나도 안 맞아. 헛짓한 것 같아. 난 그냥 네가 부럽다.'였습니다. 학력이 전혀 필요 없는 곳이 바로 주방이었던 것이죠. 저는 '그런데 혹시 주방에도 학력이 필요하다면?'이라는 상상으로 <사랑은 냉면처럼>을 썼습니다. 연재 당시 인기가 폭발적이었죠. 그 정도로 인기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하긴 기획만 10년 넘게 한 소설이니까요. 주방에서 일하면 머리가 맑아집니다. 머리 쓸 일이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주방에서 일할 때 시도 쓰고 소설 구상도 하고 그랬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음... 요즘 여기 스팀잇에 연재 중인 <또르륵 또르륵 통통>이 인기 없는 이유는 머리쓰는 일을 하며 구상한 소설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요. 하긴 뭐 졸필이니 재밌으면 이상하겠지만요. ㅎㅎㅎ

냉면은 손이 많이 가는 음식입니다. 보통 우리가 식당에서 사 먹는 냉면은 면만 익히면 되게끔 육수와 양념장을 사서 씁니다. 육수 만들기는 어렵지 않아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요, 우선 고기를 삶습니다. 냉면 위에 올려주는 편육을 삶는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편육 양 조절을 잘 못하면 고기가 모자랄 때도 있습니다. 이 땐 갈비탕에 들어갈 갈비나, 육개장에 들어갈 홍두깨를 삶기도 합니다. 그리고 동치미도 미리 만들어둬야 합니다. 무가 동치미로 변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른 한 명도 들어갈 크기의 가마솥에 육수와 동치미를 1:1로 섞습니다. 이제 간을 해야 하는데요, 세숫대야 정도 크기의 스테인리스 그릇에 각종 채소를 끓인 다음 어마어마한 양의 포도당 가루와 미원 설탕 등을 넣고 다시 끓여 육수에 붓습니다. 이렇게 하면 냉면육수가 만들어집니다. 육수를 빨리 식히기 위해 이 어마어마하게 큰 가마솥을 물에 담급니다. 그래야 빨리 식어요. 다 식으면 육수 전용 냉장고에 넣습니다. 그럼 살얼음이 살짝 생기는데요, 요 때가 가장 맛납니다.

양념장은 더 만들기 어렵습니다. 매우 손이 많이 갑니다. 우선 앞에 언급한 어른 한 명도 들어갈만한 가마솥에 물은 반만 붓고 사골을 넣고 끓입니다. 이틀 정도 끓이면 아주 걸쭉하고 진한 우유색이 되는데요, 사골을 건져내고 간장을 넣습니다. 사골육수와 간장은 1:1입니다. 이제 다시 하루 끓입니다. 아주 진한 간장 냄새가 주방에 진동을 합니다. 하루 끓인 다음엔 각종 채소를 넣고 다시 끓입니다. 각종 채소란, 무 파 양파 마늘 생강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또 어마어마한 양의 설탕과 미원을 넣습니다. 식당에 일해보면 미원과 설탕을 얼마나 많이 쓰는지 기겁할 겁니다. ㅎㅎㅎㅎㅎ 우리가 사 먹는 음식은 대부분 설탕 맛과 미원 맛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ㅎㅎㅎㅎㅎ 이제 다 끓였으면 이 가마솥을 식힙니다. 다 식었으면 다시 간장통에 담에 냉장고에 보관합니다. 대략 15일 정도 보관해서 숙성을 시킵니다. 이제 꼬마 두세 명이 물놀이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대야에 굵은 고춧가루와 고운 고춧가루를 1:1로 해서 대야의 반 정도 차게 넣습니다. 배를 한 박스 정도 갈고, 마늘도 배만큼 갈아서 넣습니다. 대파도 열단 좀 안 되게 다져서 넣습니다. 대파 다지는 게 정말 팔 부러질 정도로 힘듭니다. 그래도 다져야 합니다. 양파도 배만큼 갈아서 넣고 생강도 약간 넣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또 어마어마한 양의 설탕과 포도당 가루와 미원을 넣습니다. 마지막으로 15일 숙성된 간장을 넣습니다. 이제 잘 비벼서 섞어주면 됩니다. 잘 섞였으면 다시 냉장고에 넣고 하루 숙성시켜야 냉면 양념장이 탄생합니다.

이제 고명을 준비해야 합니다. 고명엔 무채, 오이채, 편육, 달걀 반쪽이 들어갑니다. 무채는 일주일에 한 번도 써는데요, 슈퍼에 가면 있는 그런 무가 아닙니다. 무슨 무가 박격포만 합니다. 그런 무를 한 번에 100개를 채 썹니다. 주 1회요. ㅎㅎㅎㅎㅎ 팔 부러져 나갑니다. 기계로 썰지 않는 이유는, 기계로 무채를 썰면 결이 망가지는데요, 맛이 별로입니다. 칼로 썬 것과 기계로 썬 것은 맛이 천지 차이지요. 그래서 칼로 썰었습니다. 무 100개를 채 썰려면 그 당시 칼질 2인자 저와 여러 형들이 붙어서 하루 썰어야 합니다. 오이채는 매일 아침이 그날 팔 만큼만 썹니다. 오이채는 그냥 애들 장난이죠. 편육은 냉면육수 삶을 때 썼던 고기를 알맞게 썹니다. 결 방향 잘 썰지 않으면 부서지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달걀은 하루에 1천 개가 필요합니다. 냉면이 하루 대략 2천 그릇 나갔거든요. 달걀 10판이면 300개니까 대략 40판을 삶습니다. 이거 양이 정말 기가 막힙니다. 찬 모자 10여 명이 하루 종일 달라붙어 까야 할 정도지요. 저는 뭐 혼자서 노래 부르며 다 깠습니다. 삶은 달걀 까기 기네스에 나가라는 말을 많이 들었죠. 양손으로 1초면 달걀 4개는 깠습니다. ㅎㅎㅎ 이런 냉면부 경험을 겨우 20살에 했던 저는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15년이라는 시간을 점프해서 다시 시작합니다.

저는 인생 플랜을 다시 짜봤습니다. 이 식당 주방에선 저보다 나이 가 많은 사람은 주방장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주방장은 저를 보며 '너 참 물건이다.'라며 제 실력을 인정했고 동생들도 저보다 실력이 아래였습니다. 그래, 여기서 주방에서 2인자를 하며 기다리다가 주방장까지 하는 거야. 게다가 여기 식당은 주일에 쉬잖아.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어딨어. 운이 좋게도 식당 사장님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일엔 장사를 안 했던 것이지요. 정말 멋진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아~~~ 지금 생각해보면... 다시 냉면집에 가며 새로 짠 플랜대로 살았다면 더 행복했을 것도 같습니다. 낮엔 땀 흘리며 노동을 하고, 밤엔 소설을 쓰는 삶.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사수(첫 직장 사장)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너 논다고 들었는데 취직은 했냐고 물어본 것이죠. 저는 기구설계 일이 너무 머리 아파서 그만뒀다고 했습니다. 냉면집 주방에서 일하는데 급여 차이도 별로 안 나고 머리가 맑아져서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내가 너 그러라고 기술 가르쳐준 줄 아느냐. 힘든 거 다 안다. 하지만 벌써 포기하긴 배운 기술이 아깝지 않으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고 그만둬라. 그땐 내가 안 말릴게.'

한 번만 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술이 아깝지 않으냐. 아까운 내 기술. 내 기술. 그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도전해보자. 한 번만 더 해보고 아니면 그때 다시 식당으로 가자. 내가 그동안 읽은 500여권의 책에서 하라는 대로 다 실천해보자. 그동안 읽은 수많은 자기개발, 경영, 마케팅, 영업, 기획 등의 책에서 한대로 해보자. 내가 읽은 책들대로 마지막으로 도전해보자. 내 인생을 걸고, 내 영혼을 걸고, 내 삶을 걸고 단 하나의 아쉬움도 없을 만큼 전부 쏟아내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다 해보자.

그렇게 저는 다시 취업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렸고, 면접 보러 오라는 전화가 오고, 미용기기 회사에 입사하게 됩니다. 회사는 설립 2년 차의 초기 회사였고, 저는 여기서 제 영혼을 온전히 쏟아냅니다. 개발, 기획, 마케팅, 영업, 생산 등 회사의 모든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다음에 이어서...)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0 프롤로그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1 한식당 설거지부터 시작해서 칼질 고수가 되다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2 화상 후유증으로 손이 마비되다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3 내 18년 직업 기구설계의 시작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4 학력차별 나이차별 성별차별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5 재수가 없는 걸까 내가 재수없는 걸까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6 끝도 없는 불이익 학력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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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 하나에도 엄청난 열정과 수고가 들어가는군요

이렇게 열심히 하시는데 그 끝은 분명 성공일거라 믿고 있습니다~

파이팅!!

과연 성공일지요... ^^

화이팅^^

고맙습니다. ^^

와!! naha님 오셨다 만세!

일단 냉면 먹고싶습니다. 미원과 설탕이 잔뜩 들었어도 냉면에 대한 사랑을 막진 못합니다 ㅎㅎㅎ
사실 냉면을 준비하는 부분에서 너무 디테일해서 요리 만화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머리가 맑아지셨다니 잠깐 미소짓다가 다시 기술의 길로 가시는군요-

책 대로 살아보기... 정말 치열한 삶을 사신 것 같아 존경스런 마음이 듭니다. 다음 회사 이야기도 기대됩니다.

저도 냉면 완전 좋아해요. ㅎㅎㅎㅎㅎ 식당에 일할 땐 냉면 꼴도 보기 싫었는데, 지금은 제가 사랑하는 음식 중 하나랍니다. ^^

웬지 또 불안합니다.
느낌과는 다르기를...^^

그 불안이 틀렸기를... ^^

전 그래서 냉면은 언제나 사먹어요~ 집에서 만들어볼 생각을 안했어요 ㅎㅎㅎ
낮에 주방에서 일하고 밤에는 글쓰고...그 삶도 익숙해지면 또 다른 어려움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요즘은 마트에서 냉면 양념장을 팔더라고요. 맛은 괜찮습니다. ^^ 물론 면을 삶는 기술이 필요하니 그냥 사먹는 게 더 맛날 것 같은... ^^

만능엔터테이너느낌이에요 ~~ ㅎㅎ

예전에 살짝 언급한 적이 있듯이,,, 저는 배우는 재주가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뭐든 잘 배웁니다. 빨리 배우기도 하고요. ^^

설마 냉면집 다음 회사도 또 망하는 겁니까?
아니겠지요?

음... 아직은 잘 살아 있는 회사입니다. ^^

오우 드디어.. 다음편이 기대가 됩니다.

와우~~~ 드디어!!! ^^

와 멋있으세요 냉면집에서 그동안 받으셨던
스트레스를 다 날려버리시고,
맑은 정신과 긍정적인마음으로 좋은 직장을
들어가신 느낌이 드는걸요?!
어떻게 이름을 날리셨을지 기대가 됩니다!

앗,,, 그런 느낌이었을지도요. ㅎㅎㅎㅎㅎ

전편까지 다 읽고 왔어요.^^
냉면 먹기가 주저주저..근데 다른 음식도 별반 다를건 없겠죠 ㅎㅎㅎ
이제 술술 풀릴까요?ㅎ

우앙~~~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잘 풀리겠죠?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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