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5 재수가 없는 걸까 내가 재수없는 걸까

in #kr-pen6 years ago

새로 이직한 회사는 제가 그동안 원하던 그런 회사였습니다.
대표님은 아랫사람들에게도 예의를 지키는 점잖은 분이셨고, 회사는 작아도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꿈에도 그리던 주 5일 근무 회사였습니다. 이 당시 주 5일 근무가 전 사업장 적용이 아니라 직원 숫자 많은 회사부터 적용이었기에, 주 5일 안 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었습니다.(지금 52시간도 300명 이상 기업만 대상이죠. 제가 다니는 회사는 앞으로 3년 후에 적용입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야근에 철야를 하고도 수당은 0원이죠. 개 같은 포괄임금제니까.) 그럼에도 대표님은 회사가 작아도 주 5일은 당연한 거 아니냐고 주 5일을 했고, 야근도 못하게 했습니다. 직원들에게 항상 친근하게 대했고 회사 분위기도 좋았습니다.

이 회사는 코스닥 상장 회사의 자회사였습니다. 모(母) 회사와 건물을 같이 쓰고 있었기에 회사도 엄청 깨끗했고, 분위기도 좋고 근무환경도 좋았습니다. 원래 이 회사는 버스용 계수기라는 기술로 사업을 시작한 회사였습니다. 특허는 연구소장이 갖고 있었고 대표님과 합작한 회사라고 보면 됩니다. 보통 중소기업 중에 이런 회사 은근 많아요. 대표님은 이 회사 전에 원격 검침기 회사를 운영했다고 합니다. 연구소 외의 직원들은 대부분 전 회사에서 데리고 온 직원들이었죠.

팔아야 할 제품이 버스용이기 때문에 영업은 서울시, 인천시, 수원시 등 지자체가 대상이었습니다. 제가 입사했을 땐, 계수기의 핵심부품인 동전을 계수하는 '호퍼' 개발은 완료돼 있었고 제품디자인까지 나와 있는 상태였습니다. 저는 입사하자마자 제품을 파악한 다음 설계를 하고 목업(샘플)을 만들었습니다. 기구설계라기보다는 기계설계적인 영역이 많았지만 호퍼 개발이 끝나 있었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회사는 서울시 교통과(?)와 일을 했는데요, 저는 이때부터 공무원을 싫어하게 됩니다. 열심히 설명 다 하고 영업하고 있는데 1월 되니까 인사이동하더군요. 헐... 저는 이게 이해되지 않았는데요, 예를 들면 기구설계자를 프로그래머로 인사이동하는 겁니다. 말도 안 되고 어이없는 일이죠. 그런데 공무원은 가능하더군요. 왜냐면 매뉴얼대로만 일하면 장땡이기 때문입니다. 새로 온 교통과장은 교통과는 생전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뭐냐. 그래서 업무 파악하고 3개월 후에 보자고 하더군요. 3개월 동안 뭐 하지? 그러나 3개월 후에 보니 헐... 이번엔 서울시장이 바뀐 겁니다. 오세훈이었죠. 뭐냐. 3개월 기다렸고, 3개월 후에 다시 찾아가서 피티하고 시연하고 작년에 한 거 똑같이 또 했다고 합니다. 영업사원들도 짜증 나 죽으려고 하더군요. 공무원 상대로 일하는 게 참 더럽더군요. 하긴 그 교통과장도 교통과는 처음이니 뭐. 그렇게 몇 개월을 설명하고 시연했는데 서울시장 바뀌고는 사업 중단. 헐... 뭐냐. 오세훈은 버스시스템에 통합 계수기 적용을 자기 취임하자마자 취소시켜버렸습니다. 계약서 다 작성됐고, 서로 어떻게 할 건지 의논 끝났고, 싸인만 하면 되는 단계였습니다. 3년 넘게 서울시 들락거리며 설명, 시연, 설득 등을 하며 통합 계수기 도입을 코앞에 두고 오세훈 한 마디에 꽝!!! 헐... 공무원과 일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지자체 장 바뀌면 이 꼴 난다는 것도 처음 배운 거죠. 서울시 버스에 달아놓고 시범 테스트까지 마친 상태였으니 참 억울해도 너무 억울했습니다.

나중에 식약처와도 일해보니, 공무원이라는 게 그렇더군요. 담당자는 자꾸 바뀌고, 바뀐 담당자는 해당 업무가 처음이지요. 그러니 담당자도 모릅니다. 그저 규정만 찾아볼 뿐. 규정 해석을 놓고도 참 많이 다퉜던 것 같습니다. 네 말이 맞니 내 말이 맞니. 논문 들이밀며 싸워보지만 절대 책임질 일 안 합니다. 뭐 이게 틀린 건 아니지만, 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뭔가 있지요. 아마도 공무원과 일해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규정에 1+1은 2가 나와야 한다고 적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물 1리터와 알코올 1리터 섞으면 2리터 안 나옵니다. 초딩도 알죠. 그래서 규정 위반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논문 들이밀고 온갖 자료 총동원해도 절대 말 안 통합니다. 규정에 "1+1=2"니까 이거 아니면 무조건 불법이죠. 이런 느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이 공무원이죠. 규정에 적힌 글자 1개가 곧 법이고 신이고 조물주고 진리이고 전지전능이죠. 물론 규정대로 하는 건 옳습니다. 규정대로 해야죠. 당연하죠. 하지만 그 규정이 전지전능은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공무원과 일해보면 느낀 개인적인 생각이니 물론 당연히 틀릴 수 있는 생각입니다. 저는 전지전능 조물주가 아니라 사람이거든요.

오세훈이 2년간의 노력을 0으로 만들었지만 아직 인천시와 수원시가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장 할 것처럼 보였던 인천시와 수원시는 '서울시가 안 한다면 나도 안 한다.'라고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아~~~ 영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광주시 등 아래 지방 시들도 서울시가 시작하면 검토해보겠다고 말 바꾸기를 하더군요. 하지만 겨우겨우 설득 끝에 수원 버스에 달아놓고 3개월 동안 시범운행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시범운행이 끝난 다음에도 시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결국 회사는 3년 동안 수입 0원을 기록하며 연말을 맞게 됩니다.

투자자였던 모회사는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투자를 중단합니다. 그러자 회사는 직원들 급여를 못 주게 됩니다. 그동안 이 버스용 통합 계수기 기술에 관심을 보였던 'E' 회사에서 회사를 사게 됩니다. 단 조건은 직원을 반으로 줄일 것. E 회사에선 기구설계자는 반드시 데리고 오라고 했기에 저는 정리해고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정리해고 명단이 발표된 날,,, 저는 해고 대상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사업은 운 때가 맞아야 하더군요. 이때 기가 막히게도 타이밍 끝내주고 새 십원짜리가 나옵니다. 알루미늄에 구리만 씌운 쪼크만한 십원짜리였죠. 이 새 십원짜리를 계수기 핵심장치인 호퍼에 넣고 돌려보니 오작동을 하는 겁니다. 아~~~ 망했다. 연구소장은 제게 호퍼를 개조해서 십원짜리도 인식하게 하라고 했지만 저는 기계설계 경험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때 제가 인생 최대의 실수를 합니다. '노력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노력하다가 못하겠으면 죄송하다고 말하면 될걸 '저 혼자 기구설계와 기계설계를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을 한 명 더 뽑아주시거나 외주로 빼주세요.'라고 한 거죠. 연구소장은 노발대발하며 화를 냈고, 그 후로 저는 매일 갈굼을 당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저는 연구소장과 사이가 안 좋아졌고 결국 정리해고 대상에 들어가게 됩니다. 직장인으로 살려면 상사에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더군요. 감히 조언드리자면 윗사람이 아무리 어이없는 말을 지끄려대고 개소리를 해도 그냥 무조건 '네, 네' 해야 합니다. 그래야 불이익 안 당하더군요. 슬픈 현실입니다. 직장인이란 게 그래요. 개같은 꼴 보며 그냥 참으며 일하는 거. 상사가 곧 내 생명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

E 회사는 상장회사였기에 연봉도 엄청 높았고 복지도 대기업 수준이었습니다. 가끔 신문에 대기업 연봉에 대기업 복지라는 회사로 소개되기도 했던 회사였죠. 꿈에 그리던 회사였습니다. 작은 회사만 전전하던 제가 감히 넘볼 수 없는 매우 큰 회사였죠. 저는 18년 동안 기구설계를 하며 상장회사에 다녀본 적이 없습니다. 작은 회사만 다녔죠. 저는 지금도 제 평생에 가장 안타까운 일 중 하나가 바로 E 회사에 못 간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 회사에 갔다면 아마 제 삶이, 운명이 바뀌었을 테니까요.

저는 겨우 30대 초반에 정리해고를 당합니다. 욕하는 사장도 아니었고 학력차별을 하는 회사도 아니었지만, 자본이 부족한 회사였기에 저는 또다시 퇴사를 하게 됩니다. 참 삶이 허무하더군요. 나는 왜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 나는 왜 이렇게 하는 일마다 안 될까 한스러웠습니다. 연구소장이 날 해고 대상자에 넣지만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재수도 없었고, 성격도 재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만나는 상사마다 저를 미워했을 정도로 재수 없는 사람.

1번째 회사 : 폐업
2번째 회사 : 학력차별 싫어서 퇴사
3번째 회사 : 사장이 욕을 해서 퇴사
4번째 회사 : 폐업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고 경제도 모르는 저는 이때부터 정치인 욕을 하게 됩니다. 이때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을 욕했고, 시장이었던 오세훈을 욕했습니다. 물론 어이없는 인사체계의 공무원 시스템도 욕했지요. 매일같이 욕만 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마치 내가 재수 없어진 원인이 노무현 오세훈이라도 되는 것처럼요. 오세훈이 사업 취소만 안 했어도 제 운명이 바뀌었을 거고, 노무현이 제조업은 놔두고 부동산만 때려잡으려는 것처럼 보여서 죽어가는 제조업 때문에 내가 다닌 회사가 망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4번째 회사를 퇴사하고 저는 5번째 회사에 들어갑니다. 재수도 없고 재수 없는 사람이지만 실력은 인정받고 있었기에 취직은 바로 됐습니다. 오래전부터 알던 분이 제가 언제 퇴사하나 눈여겨봤다가 퇴사하자마자 데리고 간 것입니다. 다행히 무직 기간 없이 바로 취직됐지만, 상장회사를 놓쳤다는 패배감 때문에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제게 다행히도 행운이 찾아옵니다.

(다음에 이어서...)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0 프롤로그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1 한식당 설거지부터 시작해서 칼질 고수가 되다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2 화상 후유증으로 손이 마비되다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3 내 18년 직업 기구설계의 시작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4 학력차별 나이차별 성별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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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이 있는 사람은 언젠가 회사에서 그 실력을 알아주고, 또 인정받을 기회가 올겁니다!! 힘내세용~~ 그래도 회사를 이직하시는 분들은 참 용기있고 대단해요... 전힘들다 힘들다 해도 늘 한 직장에만 벌써 8년째 버티고 있어요... :)

더 좋은 기회가 오려구 힘드셨나봅니당
😊

아... 궁금해요. 이번엔 어떤 회사죠?
공무원....저도 겪어보니까 똑같은 일을
담당자마다 다르게 처리하더군요.ㅋㅋ

그래도 사기당해서 돈 잃은건 아니니 꼭 버티셔서 승승장구되시길 바랍니다~!!

다음 스토리 꼭 보고 싶네요.
화이팅하시고 힘내세요.

너무 재미있어서 한번에 쑤욱~~~재미있어하면 안되는거죠 ㅜ
즐거운 주말되세요

나하님 글을 많은 이웃 분들이 리스팀해주시네요
국가와 일하는 게 참 쉽지 않죠ㅜㅜ

흥미진진합니다.
그동안의 고생은 행운을 맞기 위한
터닦는 시간이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ㅎㅎㅎㅎㅎ

할수 없는걸 할수 없다고 말하는것이 할수 없는대도 할것처럼 해놓고 못해서 더 큰문제를 만드는것 보다 나은데 말이죠ㅜㅠ
어느 회사던 비슷한 문제와 그걸 이길수 없어 중이떠나야만 하는 현실은 이전도 앞으로도 바뀔수 없는건가 봅니다ㅜㅠ

참 파란만장 그 자체네요.
저도 파란만장 이지만 갖다 대지도 못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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