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4 학력차별 나이차별 성별차별

in #kr-pen6 years ago

어렵게 소개의 소개로 들어간 이 회사에서 저는 드디어 3D를 배우게 됩니다. 3D를 배워보니 2D와는 완전히 다르더군요. 음, 뭐랄까 2D는 글자들을 만들어 그 글자로 문장을 만들고 단락을 만든다면, 3D는 바로 문장을 만들어 단락을 만든다고 비유하면 될 듯싶습니다. 2D는 선과 선이 모여 하나의 도형을 만들지만, 3D는 면과 면을 만들어 붙이면 입체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설계라는 게 선만 긋는다고 되는 게 아니고, 면을 만든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2D로만 생각하는 제 뇌는 3D로 생각하는 데 한계가 걸렸는데요, 이게 문제였습니다. 3D로 그리는 방법은 대략 3개월 정도 연습하니 되더군요. 그런데 3D로 설계하는 방법은 가르쳐주는 곳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설계하는 방법은 온전히 저 혼자 1년 정도 연구해서 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회사는 1년 반 정도 다녔는데요, 다니는 동안 3D 툴인 프로엔지니어(Pro-e) 2001버전은 확실히 마스터했습니다. 이상한 곡면만 아니면 대부분의 면을 만들 수 있었고, 설계야 원래 2D로 설계한 실력이 있었기에 일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계속된 승진 실패에, 설상가상으로 기구 팀 팀장이 해고당합니다. 그리고 새로 입사한 신입사원이 저보다 연봉도 높은 불만도 있겠다 해서 잡코리아에 이력서를 등록했습니다. 경력 4년 차가 신입사원보다 연봉이 낮다는 건 못 참겠더군요. 그 신입사원은 석사였고 저랑 동갑이었습니다. 아무리 석사라 치더라도 동갑이라는 게 기분이 더럽더군요. 첫 직장 퇴사했을 때와는 달리 전 3D도 할 줄 알아서 여기저기서 연락이 많이 왔습니다. 그렇게 저는 급여도 올리고 직급도 올리며 미용의료기기 회사로 이직을 합니다.

그동안 저는 가전제품을 설계했습니다. 플라스틱 외관으로 된 전자제품들이었죠. 하지만 이직한 회사는 장비회사였습니다. 미용장비라고, 피부관리숍에 가면 있는 장비들을 제조하는 회사였습니다. 일단 외관은 모든 기기가 철판이었습니다. 게다가 대량생산이 아닌 소량 생산이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수만 수십만 개를 생산하기 위한 설계를 했지만 장비는 기껏 만들어봐야 100여 개더군요. 대량생산이 아닌 소량 생산에 적응해가며 소량 생산을 위한 설계를 익혔습니다. 게다가 보통의 가전제품 기구설계자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판금(외형을 이루는 철판을 자르고 접는 걸 판금이라고 함.)을 익히게 됩니다. 제품들 중엔 고압을 이용한 제품들이 많았는데요, 공압 펌프를 이용한 석션기라든가 산소 분사기 등을 하며 공압에 대해서도 경험을 쌓았습니다. 전 회사에서 망나니 같은 모습을 보였던 걸 다 리셋 시키고 성실히 일하며 좋은 이미지를 만들고 있었는데요, 사장이 자꾸 의심하는 걸 보게 됩니다. 그 사연은 이렇습니다.

전 담당자는 해고당한 거였는데요, 사장하고 대판하고 해고당했더군요. 그런데 이해할만했습니다. 사장이 구입 단가를 너무 후려치니까 업체 관리가 힘들고, 무엇보다도 돈을 빼먹진 않는지 의심을 너무 많이 해서 괴로웠더군요. 저는 평생 기구설계하면서 가격 가지고 장난친 적이 없기에 떳떳했습니다. 게다가 생각 외로 높은 단가를 발견하면 업체 만나서 왜 이 가격이 나왔는지 물어보고 제 가격으로 낮추기도 했으며, 가공방법을 바꿔 구입단가를 낮추기도 했습니다. 이게 쌓이고 쌓여 제가 낮춘 구입단가만 해도 엄청났었죠. 그래서 저는 떳떳했습니다. '난 업체랑 짜고 가격 부풀린 다음 그 돈으로 술이나 사 먹는 그런 놈 아니다.'였습니다. 그런데 사장은 슬슬 의심을 하더니 일하기 불편할 정도까지 됐습니다.

저야 뭐 사장 속인 적 없으니 의심하거나 말거나 그냥 참고 있었죠. 그런데 업체 하나가 저를 모함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품질 깐깐하게 따지고 불편하게 하니까 저를 모함한 거죠. 그러면서 사장이 자꾸 화만 나면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뭐 그전에도 원래 욕을 잘하는 사장이었지만 저한텐 대놓고 욕한 적이 없었거든요. 막 욕을 퍼붓는데, 와~~~ 기분 더럽더군요. 열받아서 업체에 전화해서 내가 언제 당신한테 ㅇㅇ했냐고 시비를 걸었고 그 업체와 원수가 됩니다. 업체를 바꾸고 싶었지만 사장 라인이라 바꾸지도 못하고 서로 으르렁거리다가 사장이 하도 욕을 해서 그냥 사직서를 냅니다. 그땐 제가 무식해서 노동부에 신고하는 것도 몰랐네요. 알았다면 신고라도 하고 나오는 건데.

저는 앞에서도 언급했듯 저는 기구설계자이며 보통의 제품들 제조가격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제품들에 대해 안다고 보시면 됩니다. 당장 손에 들고 계신 스마트폰부터 시작해서 제가 뚜들기고 있는 키보드, 모니터, TV, 냉장고 등 가전제품은 물론 필통이나 손톱깎이 등 눈에 보이는 모든 물건들은 제가 설계할 줄 아는 제품들이고 제조단가도 대충 압니다. 제조 방법을 알고 재질을 알기 때문이죠. 그래서 업체들이 납품단가를 속이려고 하면 금방 압니다. 조사하면 다 나오거든요.

기구설계 잘하는 사람은 튼튼하게, 안전하게, 기능을 발휘하게, 조립이 잘 되게, A/S 하기 쉽게, 품질은 좋으면서 단가는 싸게 등 수십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제품을 설계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3D만 잘하면 기구설계 잘하는 걸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3D는 그리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리는 방법은 머리에 있지요. 기구설계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기술 분야임에도 자격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대학교에 관련 학과도 없고, 어디 교과서도 없으며 관련 책도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종일 접하는 온갖 제품들을 설계하는 직업인데 관련 학과가 없는 이유는 이론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구설계는 이론으로 하는 게 아니라 경험으로 하는 것입니다. 스마트폰 백 년 설계한 사람에게 냉장고 설계하라고 하면 못합니다. 경험이 없기 때문이죠. 이론 없이 순전히 경험치이기 때문에 참 독특한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품을 만들기 위해선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기구가 필요합니다.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는 몇 년만 하면 웬만한 건 개발합니다. 그런데 기구는 몇 년 해가지고는 웬만한 거 개발 못합니다. 이론이 없거든요. 그냥 맨땅에 헤딩하며 배워고 자기 걸로 만들고 그걸 가지고 개발하는 게 기구설계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직을 많이 한 게 흠이면서도 제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직을 참 많이도 했습니다. 나쁘게 해석하면 참을 성도 없고 성격 더러운 거고, 좋게 보면 온갖 별의별 다양한 제품들을 경험해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발 PM(프로젝트 매니저)을 할 정도의 능력이 됩니다. 그러나 뭐,,, 학력 때문에 취업에 어려움을 겪다가, 이제 3D 좀 할 줄 안다고 성질대로 망나니짓하다가, 안 좋은 회사만 돌게 됩니다. 그 시작이 바로 이 의료미용 기기 회사였지요. 홧김에 열받아서 나온 후 저는 소개로 4번째 회사인 버스용 통합 계수기 회사에 들어가게 됩니다.

(음... 쓰다 보니 전문용어가 자꾸 나와서 어렵지요? 최대한 풀어쓰도록 하겠습니다.)

4번째 회사에 들어갈 때만 해도 제가 앞으로 그렇게나 많이 이직할 줄은 몰랐습니다. 첫 회사야 망해서 그만둔 거고, 2번째 회사는 제가 4년 차일 때 입사한 신입사원이 저보다 연봉이 많아서 그만뒀고, 3번째 회사는 사장이 욕을 해서 그만뒀기에 충분히 그만둘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뭐,,,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앞으로 저는 그만둘 때마다 온갖 핑계를 붙입니다. 그리고 일하다가도 뭔가 맘에 안 들면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이직이 습관이 돼버린 거죠. 제가 이직 많이 한 사람으로서 감히 말씀드리자면, 그냥 지금 회사에 계세요. 이직해봐야 거기서 거깁니다. A라는 문제 때문에 이직하면 이직한 회사에선 A라는 문제가 사라지지만 B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B가 싫어서 이직하면 C라는 문제가 생기죠. 어차피 완벽한 회사는 없습니다. 어떤 회사든 문제가 있죠. 실 예로, 학력차별이 싫어서 2번째 회사를 그만두고 3번째 회사에 갔는데요, 3번째 회사는 학력차별이 없는 회사였습니다. 사장은 모든 직원을 실력으로 평가했지요. 학력차별, 나이 차별, 성별 차별이 없는 회사였습니다. 제가 입사했을 때 영업이사가 저보다 겨우 3살 많은 여자였고 고졸이었습니다. 사원으로 입사해서 3년 만에 이사 달았더군요. 사장은 늘 '우리 회사는 학력, 나이, 성별 차별 없다. 일 잘하면 승진이고 못하면 강등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실 예로 일 못한다고 부장을 사원으로 강등시킨 적도 있습니다. 학력과 나이와 성별을 안 보는 파격적인 분이었지만 욕을 엄청 잘했습니다. 맘에 안 드는 직원이 있으면 그냥 욕을 퍼부었죠. 아주 쌍욕을. '학력차별과 욕 둘 중에 하나 골라보라고 한다면 저는 둘 다 싫었죠.

나중에 왜 내가 다닌 회사들은 다 그모양 그꼴이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제가 학력 때문에 정상적인 회사엔 취직이 어려우니 이상한 회사만 다닌 건지, 아님 제가 성격이 안 좋아서 버티질 못하고 퇴사한 건지...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암튼... 이제 4번째 회사인 버스용 통합 계수기 회사에 갑니다. 사장이 엘리트 출신에 깨어 있는 분이었고 점잖으셔서 욕도 안 했습니다. 게다가 학력차별도 없었죠. 근데 이 회사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음에 이어서...)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0 프롤로그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1 한식당 설거지부터 시작해서 칼질 고수가 되다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2 화상 후유증으로 손이 마비되다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3 내 18년 직업 기구설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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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차별과 욕 둘 중에 하나 골라보라고 한다면

저도 둘 다 싫어요.

아마도 모두 같은 생각일듯요. ^^

힘내세요 @naha님 하시는일 다 잘될거에요~

감사합니다. 모두 잘 될 거라 믿습니다. ^^

억!! 여기서 끊으시면... ㅠㅠ ㅋㅋㅋ 작가님.....
치명적인 단점이 무엇이었을까요?

후우 지금 회사에 있으라는 조언이 공감이 가면서도 슬픈 말이네요. ;;
저도 이직을 생각하다가도.. 다른 곳에 가면 생각지도 못한 단점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싶은 두려움에 계속 다니는 중입니다. 어떤 것이 용기일까 맨날 고민하면서 말이죠. 낯선 곳에 가는 용기? 끈기와 인내심..?ㅋ

다음글 기다리겠습니다.

원래 시리즈는 적당히 재밌을 때 끊어야 맛이죠. ㅎㅎㅎㅎㅎ

에고..나에게 100%맞는직장은 없지만 힘드네요
그와중에~저 오늘 취직했슴다 ~^^

결국 100% 만족할 회사는 없더라고요. 음,,, 공무원이란 직업은 안 해봤지만, 공무원은 99%정도 만족할 직업이 아닐까 생각이 들긴 해요.

완전 공감이요ㅠㅠ
아무리 더 좋은 분위기, 더 좋은 조건으로 회사를 옮기려고 노력을 해도 다 거기서 거기더라구요... 꼭 이상한 사람 한 명 이상은 있고 내 능력에 대해 의심하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 ㅠㅠ
나중에는 맘에 안들고 화나는 일이 있어도 그냥저냥 참아가며 일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ㅠㅠ
사회생활 하며 성격 다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고 있어요. 어느 회사에 가나 지랄같은 놈 한 명은 있더군요. 저는 앞으로 연재될 시리지를 보시면 알겠지만 대부분 사장이었어요. 작은 회사의 단점이죠. ^^

li-li님이 naha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li-li님의 [Li & Li] 알흠다븐 가게+리얼전문가+리얼가게 #0046 / 18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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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팀잇 책리뷰대회
    심사위원_ naha/sub>

  • 스팀페이코<blockquot...

    흥미진진 합니다. 버스계수기 회사는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요? 계수기에 돈 속이는 기능을 넣으라고 했을까요?
    비자금을 조성했군요,사장이?
    모든 걸 만드시는 진정 황금손이 분명하십니다. ㅎㅎ

    ㅎㅎㅎㅎㅎ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낭요. ^^

    벌써부터 다음편이 기대되는군요 ㅎㅎ

    ㅎㅎㅎㅎㅎ 뜸들여야짓.

    과연 치명적인 문제가 무엇일지 ....

    궁금하면 다음편 사수요. ^^

    치명적인 단점이 뭘까요?
    헉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네요 ㅎㅎㅎ
    조사하면 다나와 ㅎㅎㅎ 가격을 다 아시다니~ !!

    기구설계 한 지 18년 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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