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1 한식당 설거지부터 시작해서 칼질 고수가 되다

in #kr-pen6 years ago (edited)

연재 하겠다고 프롤로그 써놓고 14일만입니다. 음... 그동안 뭐했지? 암튼 시작합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20살. 분식집에서 아르바이트만 했던 저는 주방에서 일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서빙을 하던 분식집 주방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자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3층 건물의 매우 큰 한식당에서 주방보조를 구한다고 해서 들어가게 됐습니다. 주방보조는 뭐 설거지죠. 정식으로 주방에 들어가려면 보통 3년 걸린다는 주방 형들의 말에 군대 가기 전에 주방에 들어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3개월만에 주방에 들어가게 됐고 지옥같은 노동이 시작됐습니다. 설거지가 더 쉽더군요.

주방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배운 일은 냉면 삶기, 냉면기에 적당량 담기, 비빔밥에 올릴 달걀 후라이와 소시지 부치기, 돈까스 튀기기, 갈비탕에 들어갈 대파 썰기 등이었습니다. 제가 일했던 식당의 구조는 제 소설 <사랑은 냉면처럼>과 거의 일치합니다. 1층은 조리팀으로 준비된 음식을 조리만 하는 주방이고, 2층은 준비팀으로 조리할 재료들을 썰고 반죽하고 등 실제 조리의 모든 과정을 하는 주방이며, 3층은 반찬을 만드는 곳과 대형 냉장고 및 냉동고가 있고 설거지 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3층 한켠엔 직원들이 밥을 먹을 수 있는 식탁도 있었습니다. 저는 3층에서 설거지만 3개월을 하다가 1층 조리팀으로 승진(?)을 한 거였죠. 그때가 6월이었는데요, 여름 냉면장사의 시작이었습니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냉면은 6,7,8월에 가장 많이 나갔죠.

출근하면 가장 먼저 사람도 들어갈 만한 가마에 물을 담고 끓입니다. 한 시간은 끓여야 하기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이지요. 그다음엔 비빔밥이나 갈비탕 등이 바로 나갈 수 있게 그릇마다 재료들을 담아 미리 준비해놓고, 냉면에 들어갈 고명 등을 챙깁니다. 여름엔 냉면이 하루 평균 천그릇 이상은 나갑니다. 여기에 다른 식사까지 해서 1층에서만 2천그릇 정도가 하루 매출이었습니다. 냉면은 정말 손이 너무너무 많이 가는 음식인데요, 한 명은 출근해서부터 퇴근할 때까지 반죽만 합니다. 하루에 많게는 20포대 정도 반죽을 합니다. 물론 기계반죽이지만 사람손이 많이 갑니다. 땀으로 샤워하며 반죽을 하지요. 한 명은 냉면을 익혀야 하고, 한 명은 익힌 냉면을 받아 얼음물에 비빈 다음 적당량 그릇에 덜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어 명은 고명과 육수, 다데기 등을 준비하지요. 냉면을 익히고 담는 인원 2명은 1층에서 일했고, 반죽하는 사람 1명과 재료 준비하는 사람은 2층 준비팀 주방에서 일했습니다. 한참 피크타임땐 냉면 주문이 20~30개 밀리는 건 기본이었으니 음식을 빼는 사람도 정신 헷갈리기 쉽상인 정말 전쟁터 같은 주방이었습니다.

이 전쟁터같은 1층 주방과 달리 2층 주방은 음식을 직접 조리하는 곳이 아닌 준비만 하는 곳이라서 여유가 있습니다. 대신 중요한 일은 2층에서 다 했지요. 주방장과 부주방장 등 장급들은 대부분 2층에서 일했고 경력이 적고 실력이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 1층에서 일했습니다. 1층은 전쟁터니까요. ㅎㅎㅎ 그렇게 여름을 냉면과 전쟁을 치룬 저는 가을이 되어서 또 한 번 행운을 맞습니다. 냉면장이 퇴사한 겁니다. 으잉? 사장은 인건비 줄인다고 냉면장 충원을 안 했고, 저는 1층에서 일한지 3개월만에 2층으로 또 승진(?)을 합니다. 뭐 이런 초고속 승진이 다 있나. 설거지 3개월도 최단기간 기록이었지만, 1층 3개월도 최단기간 기록을 세우며 진짜 냉면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준비팀이 있는 2층으로 가게 됩니다. 제 평생 운 중에 대부분을 이때 다 쓴 건지 암튼 운이 정말 좋았습니다. 냉면장이 없기 때문에 주방장에게 직접 냉면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여름이 끝나 한가해진 냉면부 일을 하며 겨울을 보냈습니다. 물냉면 육수, 비빔냉면 다데기(냉면 양념장), 회냉면 회 손질 및 양념, 손반죽 등을 모두 배웠습니다.

겨울엔 냉면이 잘 안 나가서 좀 한가합니다. 그래서 육부 일도 배웠고, 그래도 시간이 남아 전골부, 탕부 등의 일도 다 배웠습니다. 반찬만드는 일도 배우고 싶어서 시간만 나면 3층 주방에 올라가 일을 도와줬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 저는 한 시간 먼저 출근했습니다. 원래 10시 출근이었지만 9시에 출근해서 내 일을 빨리 해치우고는, 다른 부서들 다니며 도와준다고 하고는 썰고 썰고 또 썰었습니다. 일을 너무 빨리 배워버리니까 주방장은 '내 살다살다 너처럼 빨리 배우는 놈은 처음이다. 넌 내가 키워줄게.'라고 했을 정도였고, 칼 가는 법을 익히려고 시간 날 때마다 칼만 갈기도 했습니다. 칼 가는 법을 배우려고 세 달 정도 갈았는데요, 나중엔 제 칼이 주방장 칼 다음으로 잘 들었고, 그 칼 덕분에 제 칼질 실력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성장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채소를 썰어버리겠다는 각오로 식당 내의 모든 채소를 다른 부서 다니며 다 썰어주고 다녔고 내 일만 하고 놀아도 되는데 일찍 출근해서 내 일 끝내놓고 다른 사람들 일을 다 도와주며 실력이 쑥쑥 자랐습니다. 주방장이 나중엔 갈비도 제게 맡겼는데요, 아무에게도 안 맡기는 갈비를 제게 처음으로 맡겼을 정도였습니다. 갈비뿐만 아니라 소고기 다듬는 일까지 배워버렸으니, 게다가 알려주면 프로급으로 배워버리니 주방장과 다른 장들이 보기에도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겨우 20살에서 21살로 넘어가던 겨울이었습니다. 봄이 올 때쯤엔 제 칼질 실력은 주방에서 주방장 다음이었고, 식당 매뉴 중에 못하는 음식이 없었습니다. 20살 가을부터 21살 봄까지 6개월 정도 동안 그냥 다 배워버렸습니다. 어이없게도요.

그래서 너무 교만했습니다. 주방장의 총애와 실력만 믿고 주방 형들에게 대들었고, 나보다 실력 떨어지는 형들에게 잔소리도 엄청 많이 했습니다. 칼질 똑바로 못한다고 나보다 열살도 더 많은 형들에게 잔소리를 참 징하게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미움도 많이 받았고 싸우기도 많이 했지요. 교만을 넘어 인성 제로가 되버렸습니다. 겨우 21살짜리가 실력좀 된다고 건방짐이 하늘을 찔렀죠. 그래서 벌을 받았습니다.

매년 여름이면 냉면부 5~6명으로도 일을 다 하지 못해 쩔쩔맸다고 했더군요. 그런데 제가 냉면부를 맡은 21살 여름엔 겨우 4명으로 하나도 안 힘들게 일했습니다. 오히려 여유도 있었죠. 칼질실력이야 뭐 눈 감고 썰어도 한석봉 엄마가 울고갈 실력이었고, 달걀 하루 필요량인 500~1000개도 혼자서 5분이면 다 깠습니다. 달걀 까기 기네스 나가라고 주위에서 말할 정도였지요. 예전엔 반찬부 아줌마들이 전부 달라붙어서 하루종일 달걀을 깠다고 하더군요. 반죽이야 한 명이 전담했고, 냉면에 들어가는 무며 오이며 혼자서 순식간에 썰어버렸습니다. 혼자서 두세 사람 몫을 해버리니 주방장과 사장은 절 좋아했지요. 물론 그 외 사람들은 저를 그닥...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여름 냉면장사를 끝낸 9월 1일. 저는 제 교만함으로 벌을 받게 됩니다. 냉면가마가 터진 겁니다. 냉면가마 폭발로 저는 전신 25% 면적에 2.5도라는 심각한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고 화상 후유증으로 오른손이 마비됩니다. 그렇게 저는 장애인이 된다는 판정을 받게 됩니다. 21살 9월이었습니다. 겨우 21살에 장애인이 된다는 판정을 받게 됩니다. 인서울 대학에 갈 성적이 됨에도 등록금을 구하지 못해 대학을 포기했고, 가난을 벗어나고자 악착같이 일했던 저는 오른손 마비라는 장애인이 된다는 절망에 빠지고 맙니다.

(다음에 이어서...)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0 프롤로그

(아이고 이런, 다 써놓고 보니 평어체로 써야 하는데 경어체로 썼네요. 에잇. 그냥 경어체로 쓰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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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ㅠㅠ그런사연이 있었군요 ㅠㅠ그다음은어떻게될지 ㅠㅠ

스팩타클한 인생사네요. 잘보고 갑니다 팔로우할게요 자주소통해요~

화려한 20~21살입니다. ㅎㅎㅎㅎㅎ

헐....
안타깝네여

헛... 리스팀 감사합니다. ^^

잘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

잘 읽었습니다. 저도 다음 편을 기다리겠습니다.

다음편도 곧 올릴게요. ^^

힘든 이야기인데..
읽는 저는 재미 있네요
옆에서 듣는 것 같아요

재밌게 읽혀야 할 텐데... 라며 썼어요. 재미 없으면 읽지 않을 테니... ^^
재밌게 읽으셨다니 다행이에요. ^^

원래 글은 장처럼 묵혀둘 수록 더 진국이랍니다ㅎㅎ
나하님의 진국 이야기 기대하겠습니다:)

일부러 묵혔다기보다는... 다른 곳에 연재했다가,,, 반응이 없어서 강제묵힘을 당한... ^^

냉면가마가 터져 다쳤다니..안타깝네요..
다음편이 너무 궁굼해요

다음편 언능 올릴게요. ^^

지난편도 기억이 나는데, 이번편도 몰입해서 읽었어요. 농도짙은 스무살을 보내셨네요. 다음편도 기대할게요.

아주아주 찐~~~한 스무살을 보냈네요. ㅎㅎㅎ

한달음에 읽었습니다.
너무 안타깝네요.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멋진 성장을 하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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