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8 일등 직장인이 되다

in #kr6 years ago

실패한 얘기만 쓰려다 성공 얘기를 쓰려니 좀 어색하긴 하군요. 하하하하. 암튼 저는 혼을 다해 다시 한 번만 해보고 기구설계를 그만두기로 합니다. 회사는 미용기기 회사였지만 의료기기법상 의료기기 회사였습니다. 설립한 지 1년이 됐고, 그동안 기구설계 없이 디자인 출신 연구소장이 설계하고 있었죠. 연구소장님 나이도 있고 해서 3D는 할 줄 몰라서 그동안 2D로만 설계했더군요. 그나마도 디자이너가 설계해봤자지요. 설계를 할 줄 아는 디자이너도 있긴 합니다만 많이 부족한 건 사실입니다. 디자인도 2D로 하고 설계도 2D로 하려니 많이 벅찼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연구소장 역할에만 집중하려고 디자이너 2명 기구설계 2명을 채용했던 것입니다.

사장님은 엔지니어 출신이었습니다. 직접 설계를 한 건 아니고 현장에서 기계를 다루며 금형(붕어빵 찍는 틀 같은 거라고 보면 됨. 플라스틱을 찍어내는 금형을 사출금형이라 함.)을 했던 분이었죠. 맨손으로 시작해서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여기서 알아두셔야 할 점은, 보통 부모 도움 없이 무일푼으로 사업에 성공한 사람은 자기애가 매우 강하고 고집불통인 성향이 강합니다. 모든 사장님들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 제가 여러 사장님들 만나 보니 대게 그렇더군요. 엔지니어 출신에 무일푼으로 성공한 사업가여서 카리스마도 매우 강했고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이 본인이라고 생각하는 오너였습니다.

입사하자마자 저는 초음파 고데기를 설계했습니다. 초음파를 다뤄본 적은 없지만 고데기는 설계해본 적이 있어서 1주일 동안 철야하며 끝냈습니다. 연구소장님도 사장님도 매우 만족해하셨지요. 제가 직장생활하며 철야하며 일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요, 이 회사엔 입사하자마자 주 내내 철야로 시작해선지 그냥 회사에서 먹고 자고 하는 생활이 시작됩니다. 일정은 언제나 짧고, 저는 그 일정에 맞추기 위해 매일 철야를 합니다. 출퇴근 지하철에서 버리는 시간이 합해서 2시간이니, 그냥 2시간 잠이나 자자고 집에 안 들어가기 시작한 거죠. 보통 새벽 4시나 5시까지 일한 다음 바닥에 박스 깔고 잤습니다. 이 회사는 주 5일 회사가 아니었기에, 일요일 오후에 출근해서는 다음 주 토요일 오후에 퇴근하는 일상이 이어집니다. 일요일 오후에 출근한 이유는, 대부분의 일정이 월요일 아침까지여서였죠.

저는 성격이 더러워서 회사 다니며 늘 디자이너와 싸웠습니다. 게다가 품질, 생산, 영업 등 모든 부서와 욕 비스므리한 말을 내던지며 싸웠죠. 하지만 이 회사에선 책대로 살아보기로 했기에 아무하고도 싸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회사 모든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들기 작전에 들어갔지요. 물론 인간관계, 대화법, 직장백서 등의 자기계발서에서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책이야 이론일 뿐이지... 그래도 해보자... 했습니다. 그리고 의외로 쉽게 회사 모든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듭니다. 디자이너와는 디자인이 먼저냐 설계가 먼저냐 니가 고치라며 싸웠고, 품질과는 니 기준이 맞니 내 기준이 맞니 싸웠고, 생산에선 이따구로 설계해놓고 조립하라는 거냐고 덤비면 똑같이 막말로 대응했고, 영업이 타사 제품은 어떻고 우리 제품은 어떻고 이따구로 개발해놓고 팔라는 거냐고 하면 그럼 니가 개발하든가 삼성 연구원들이랑 일해라고 똑같이 욕성 발언을 퍼부었죠. 하지만 이 회사에 와선 모든 직원들을 제 편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냐고요? 하하하하하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자기계발서들이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궁금하면 읽어보시면 될 듯요.

보통 제품디자이너들은 가공법 등의 제조법을 잘 모릅니다. 어린 디자이너일수록 더 심하지요. 그냥 라이노(3D 툴)나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나 만질 뿐이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입사하고 한 달 후에 입사한 디자이너는 반 설계자라고 해도 될 정도로 제조방법에 대해 거의 다 알고 있었으며 성격도 온순했고 거의 완벽주의에 가까웠습니다. 디자인이 너무 어렵거나 설계할 방법이 안 나오거나 조립구조가 완전 꽝이면 기구설계자인 제가 고생합니다. 매일 집에도 안 가고 회사에서 먹고 자고 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제가 설계를 못 풀고 있으면 디자인을 알아서 고쳐주더군요. 게다가 제조방법을 잘 알고 있어서 제가 화낼 일도 없었습니다. 말을 하면 대부분 다 알아들을 정도였지요. 정말 제가 만난 제품디자이너중에 최고였습니다. 예쁘게 싸게 성능도 나오게 디자인을 해내는 디자이너는 처음이었지요. 이런 최고의 디자이너와 함께 일하나는 것 자체가 행운이었습니다. 보통 디자이너도 설계자와 많이 싸웁니다. 자기가 정성 들여 디자인해놨는데 설계자는 이걸로 설계 못한다고 억지를 부리죠. 화를 내고 제조방법도 모르니까 이따구 디자인이나 한다고 막말을 하기도 합니다. 제가 그랬지요. ㅎㅎㅎㅎ 하지만 이 회사 온 이후로는 안 그러기로 했으니 디자인이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골 때려도 아무리 어이없어도 그냥 아무 말 안 했습니다. 디자이너는 그런 제가 마음에 쏙 들었고 지금도 서로 연락하며 지냅니다. 제가 연락하며 지내는 유일한 제품디자이너지요.

기구설계자는 생산과도 많이 싸웁니다. 아니 생산이 시비를 걸지요. 조립하기 힘들게 설계하면 일 생산량이 줄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집에도 안 가며 일하는 상황에서도 생산에 가서 일을 도와줬습니다. 공정불량(조립 하다가 나온 불량)은 온전히 관리자들 몫인데요, 생산 직원들은 0.1초도 어김없이 8시간만 근무하기에 관리자들이 공정불량을 해결해야 합니다. 저는 공정불량 도와주며 같이 밤새우기도 했습니다. 생산 입장에선 매우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도와줄 필요도 없는데 도와주겠다고 와서는 꼬박 철야해야 해결할 양의 일을 거의 매일 도와줘서 퇴근할 수 있게 해줬으니까요. 저야 뭐 그 생산 관리자 퇴근하면 내 자리 와서 또 새벽까지 내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생산 관리자도 제 편이 되었습니다. 조립이 아무리 더럽더라도 절대 화를 안 내더군요. 오히려 '고민해볼게요. 방법이 나오겠죠.'라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바빠서 새로 설계한 제품의 시제품이 막 나왔을 때입니다. 당연히 제가 조립 시범을 보이며 함께 조립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너무 바빠서 못하고 있었더니 이미 조립을 다 해놨더군요. 웃으며 '바빠 보여서 그냥 제가 혼자 했어요. 일 보세요.'라고 해서 놀라기도 했습니다.

기구설계자는 품질(QC)와도 늘 싸웁니다. 서로 자기 기준이 맞는다고 싸우기도 하고, 도면 가지고도 싸우고, 납품 들어온 부품들 불량이라고 싸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품질에서 자기 말이 맞는다고 하면 알았다고 맞춰줬습니다. 뭐 해달라면 다 해주고, 뭐 만들어 달라면 다 만들어주고 그냥 순한 양처럼 다 해줬지요. 그리고 품질에서 문제가 생기면 제가 업체와 만나 해결해줬습니다. 품질에서 잘못한 일을 제가 할 일도 아닌데도 나서서 해결해줬습니다. 디자이너와 안 싸우려고 내가 힘들어도 참고, 내 시간 내서 생산 도와주고, 내 시간 내서 품질 도와주다 보니 저는 늘 주 1회 퇴근하며 회사에서 먹고 자고 했습니다. 온 회사에 돌아다니며 해결 못하는 일들 다 해결해주고, 타 부서에서 못하는 거 다 해주다 보니 회사 내에서 만능 해결사가 돼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뭐 문제만 있으면 제게 도움을 요청했고, 저는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제 일을 하나도 못할 지경이 이르렀습니다. 온종일 남 일만 해주다가 밤이 돼서야 제 일을 하며 4~5시에 잠들었지요.

저는 심지어 해보지도 않은 영업, 마케팅, 기획 일까지 다 해주기에 이릅니다. 물론 이 모든 건 그냥 500여권의 독서력으로 한 일들입니다. 책대로 살기로 작정하면서 저는 너무 힘들어 늘 잠이 부족했습니다. 개발 일정 지키려고 하루 2~3시간을 자며 일했으니... 연구소장은 물론 사장도 저를 좋아했고 심지어 사장님은 '너는 도대체 할 줄 모르는 게 뭐냐? 모르는 게 뭐냐? 내 세상 살다 너 같은 사람은 처음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직원들 어느 누구도 신뢰하지 않던 분이 저는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사장님이 손님들에게 저를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들마다 하는 말이 '이 분이 바로 늘 말씀하시던 그분이군요. 사장님께서 얼마나 자랑을 많이 하시는지 아주 지겹도록 자랑하고 다니세요.'라고 말합니다. 알고 보니 사장님이 만나는 사람들마다 제 얘기를 하고 다닌 겁니다. '회사에 기똥찬 애가 하나 있는데 원래는 기구설계인데 모르는 게 없고 못하는 게 없다. 일에 미쳐서 퇴근도 안 하고 회사에서 먹고 자고 하는데 일도 잘하고 말도 잘하고 요즘 세상에 이런 인재가 없다.'라고 온 동네에 소문을 내고 다녔던 것이죠. 얼마나 많이 소문을 내고 다녔으면 사장님 지인들과 거래처 사람들 중에 저를 모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자... 독자님들은 저처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고요? 저렇게 1년 동안 살다가 병에 걸려 입원하고 말았거든요. 집에도 안 가고 회사에서 먹고 자며 2~3시간 자기를 1년. 몸에 이유를 모를 열이 나기 시작합니다. 이때가 신종플루가 유행할 때였고 이미 몇 사람 죽고 난리가 난 때였죠. 저는 감기 증상과 함께 고열 증상이 나타납니다. 회사에도 이미 신종플루 때문에 결근한 사람이 있던 때였죠. 1년 동안의 강행군으로 체력은 요즘 스팀 시세만큼의 바닥이었기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 결과는 3일 정도 걸리기에 해열제 처방을 받고 집에 누워 있었는데 와~~~ 정말 서럽더군요. 몸에 열은 나지, 계속 울렁거리며 토할 것 같지, 겨울이라 춥지. 아~~ 내가 너무 바보처럼 1년간 살았구나 싶었습니다. 어리석었구나 싶었습니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았을까, 마치 노예처럼, 일중독자처럼 미친듯이. 아마도 그동안 받은 차별이 너무 억울했나 봅니다. 너무 억울해서 너무너무 억울해서 그동안 받은 차별이 너무너무너무 억울해서 그랬나 봅니다. 그래서 악바리가 됐나 봅니다.

검사 결과는 다행히도 음성. 신종플루에 걸린 건 아니었더군요. 그래도 계속되는 열 때문에 병원을 옮겨 다시 검사를 받았습니다. 의사는 제 증상을 보더니 피검사와 간 초음파를 해보자고 하더군요. 증상이 딱 간염이라며. 헐... 뭐야. 그전 의사는 신종플루 같다 더만. 역시 의사를 잘 만나야 합니다. 세상에 돌팔이 많아요. 울렁거리는 이유가 간염이 아닐 수도 있으니 내시경도 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간 초음파, 피검사, 내시경을 했고 병명은 A형 간염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입원.

저는 대략 열흘 동안 입원을 합니다. 퇴원한 후에도 비슷한 삶이 이어졌고 1년 후 또다시 입원을 합니다. 이번엔 결핵. 나를 버리고 온 혼을 다해 일만 하며 살았더니 1년 만에 간염, 그리고 다시 1년 만에 결핵에 걸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렇게 저는...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음에 이어서...)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0 프롤로그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1 한식당 설거지부터 시작해서 칼질 고수가 되다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2 화상 후유증으로 손이 마비되다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3 내 18년 직업 기구설계의 시작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4 학력차별 나이차별 성별차별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5 재수가 없는 걸까 내가 재수없는 걸까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6 끝도 없는 불이익 학력차별
나는 실패한 직장인이다 | 7 재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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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 나하님은 정말 드라마를 찍으면서 살고 계시네요.
식당에서 다시 설계로 가서 병을 얻었다니...ㅠㅠ

지금은 괜찮으시죠?

저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인생은 드라마틱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 간염도 결핵도 다 치료됐지만 저는 여전히 야근에 철야에... ^^

Vastly thought out! Yup.

디자인이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골 때려도 아무리 어이없어도 그냥 아무 말 안 했습니다.

이러는 동안 몸 안에 스트레스는 쌓인데다가 불철주야 일에만 매달리니 몸이 아픈 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네요~

지금은 건강하신거죠??
재미있는 글 잘 읽고 갑니다~^^

지금 회사에서도 허구헌날 철야중입니다. ㅋㅋㅋㅋㅋ

책대로 사시니 병을 얻으셨군요...;;
몸이 보내는 신호라고 생각해요ㅠㅠ 소진하듯이 사는 삶은 이어갈 수 없죠. 에고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안타깝네요 ㅠㅠ

naja님의 치열했던 직장이야기를 들으니 반성이 절로드네요. 그런데 저정도 인정이면 당연히 보상도 따라와야하는거 아닌가요? 문득 다 잘하시는데 사업을 하시지 못한 사정이 있으셨나 생각이들어요.

시간이 많이 지난 일이라... 구체적으로 적긴 좀 어려웠지만,,, 책에서 말한 대로 살아봤어요. 힘들긴 하더군요. ㅎㅎㅎㅎㅎ
사업 생각도 해봤는데요, 여기 제조쪽은 완제품 사업하려면 자본금이 최소 20억 정도 들어가요. 부품쪽으로 하려면 결국 인맥이에요. 인맥으로 납품하는 게 거의 전부라고 보면 되는데요, 저는 한 직장에 오래 있지도 않았고, 인맥이 좋지도 못했어요. ㅎㅎㅎㅎㅎ 그리고 개발 서비스 쪽은 이미 제조업이 망하고 있기 때문에 기존 업체들도 폐업하고 있던 중이라 새 사업은 사실상 불가했어요. 결국 제조업 붕괴로 인해 들어갈 사업도 없었죠. ^^

몰입도 짱입니다 ㅎㅎ 정말 잘읽고 있어요

아핫... 몰입도가 좋았다니 정말 너무 기쁩니다. 이런 응원의 글들이 저를 춤추게 한답니다. 다음 편도 언능 올릴게요. ^^

넵 기대하고 기다릴께요~~

열정이 대단하신분 같네요 ㅎ
재미있게 잘 보고 갑니다. ^^
지금은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시길 바래요 ~!!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잖아요. 남이 장군이 좋은 시대를 못 골라 태어난 것처럼, 저는 제조업이 붕괴되는 대한민국에 태어난 게 잘못인... ^^

헉... 지금은 괜찮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뭐 괜찮습니다. ^^

전쟁같은 현실속에서 승리를 쟁취하셨군요

그나저나 철야하고 그래서 몸 상태가 말이 아닐텐데..

아프면 다 소용 없지요 ㅠㅠ

몸 관리 잘 하시길 바래요~

직장이 바로 전쟁터가 아닐까 생각해요. 현대인의 전쟁터. ^^

몸관리 잘 하셔서 전쟁터에서 승리 쟁취하시고 대박 가즈아~

결핵이라니 ...에고 몸아프면 다 허무해지죠ㅜㅜ

결핵은 무조건 6개월 동안 약을 먹어야 해요. 저는 그래도 약한 결핵이었기에 지금은 멀쩡하답니다. ^^

헉 이번엔 몸이 ㅠㅠ 지금은 쉬어가면서 하시죠~?

아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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