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1948, post 25

웨더스비 교수 씀

제2차 세계대전이후 한국을 위한 국가들의 운명은 당시의 국제적 안보환경에 따라 좌우 되었습니다. 한반도의 운명 또한 당시의 국제정세에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해방공간에 관한 연구는 당시의 국제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었던 이란과 터키 그리고 그리스의 상황을 잘 이해해야 당시의 한반도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들은 매우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당시 한반도와 유사한 입장에 있었던 국가들의 운명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갈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보다 객관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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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전쟁이 끝난 이후 소련이 이웃국가 이란을 위협하는 동안, 소련은 동시에 자국의 전략적으로 남쪽국경에 위치난 터키와 다른 국가들에 심각한 압력을 가했다. 주요 이슈는 흑해에서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매우 협소한 터키 항로를 통한 소련선박의 자유항행이었다. 터키가 흑해에서 더 큰바다로 항해하고자 하는 러시아 선박을 쉽게 봉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해협을 통과하는 항해 문제는 양국간 수세기에 걸친 조약의 주제였다. 그러나 1945년 3월 독일이 항복하기 두달전에, 모스크바는 터키에게 최근의 조약인 1936년 몽트뢰 협약의 개정을 요구했다.

이후 1년 반동안 소련정부는 터키정부에게 해협의 새로운 안보체계를 만들 것을 요구했으며 이것은 소련 군이 터키 영토에 항구적으로 주둔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터키는 이런 요구를 거부했으며, 스탈린은 신문과 라디오와 함께 소련군 25개 사단을 터키 국경에 보내는 강력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에서 영국의 영향력 감소는 미국을 터키에 대한 소련의 위협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로 만들었다.

1946년 봄 미국은 소련의 팽장주의를 “봉쇄”하는 정책을 수립했다. 그리하여, 소련이 그해 8월 해협의 공동통제를 요구하는 불쾌한 메세지를 앙카라에 보냈을때, 트루먼 대통령은 똑같이 강력한 메세지로 응답했다. 그는 미국의 가장 강력한 항모를 동 지중해에 파견했으며 이지역에 이미 주둔하고 있던 미국 해군을 강화했다. 미국의 군사적 지원은 소련의 요구를 거부하는 터키에게 용기를 주었으며, 그결과 해협은 터키의 통제하에 남아 있게 되었다.

인접한 그리스에서는 다른 상황이 미국 관리들을 고민하게 만들었으며,이는 한국에 대한 반향이었다. 독일군이 1944년 10월 그리스로부터 철수할 때, 그리스 공산주의 인민 해방군(ELAS)이 이끄는 대독일저항 운동이 전국을 통제했다. 영국점령군이 그리스 군주정을 회복하고자 하는 시도는 ELSA의 저항을 초래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이 이루어진 그 달에 양측은 국가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하기 위한 국제적인 감시하에 선거를 실시할 것에 합의했다.

선거는 1946년 3월에 실시되었으며, 같은 달 미소 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그리스의 좌파 정당은 선거를 거부했으며 새로이 회복한 군주정에 대항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ELSA는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그리고 알바니아의 새로운 공산주의 정부로부터 군사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트루만 행정부는 소련이 그리스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스탈린은 모호했다. 그는 북부에서 반군정부의 인정을 거부했으며 ELSA에 의미있는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의 거부는 부분적으로 소련이 그리스와 국경이 인접하지 않아서 쉽게 군대와 보급품을 보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는 스탈린이 유고슬라비아의 지역적 세력 강화를 원하지 않았으며, 이는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공산주의자라 할지라도 모스크바에 의해 통제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워싱턴은 스탈린의 그리스 공산주의자에 대한 지원의 한계를 알지 못했다. 영국 외교부가 영국의 경제위기가 심각하여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지원을 끝내야 하며 그리스에서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는 것을 미국무부에 통보한 1947년 2월에 미국은 결국 급박하게 반응했다. 영국정부는 미국이 전투에 돌입한 두 지중해 국가를 구하기 위해 발을 들여 놓아야 된다고 강조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터키와 그리스의 위기에서 생긴 트루만 독트린이 어떻게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 비공산주의 세력을 지원하는 미국의 약속으로 확대되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포스트는 터키와 그리스의 위기에 대한 탁월한 다음의 저서를 참고한 것입니다.
William R. Keylor, A World of Nations: The International Order Since 1945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이번 포스팅을 마지막으로 웨더스비 교수께서 미국으로 돌아가십니다. 다음번 포스팅 부터는 미국에서 보내오실 예정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훨씬 흥미진진한 내용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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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끝이 났지만 오히려 힘의 균형은 더욱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네요.
정말 교과서에서는 배울 수 없는 진짜 지식이네요.

우리는 우리문제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저시기에 스탈린은 대체로 세력확대에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하죠. 소련측도 미국에 적대하기 어려웠던 문제도 있고 언급된 통제받지 않는 문제도 있고....대표적인게 중국이었죠.

스탈린은 대체적으로 세력확대에 적극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ㅎㅎ
예외적으로 안그러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스탈린이 기본적으로 공산주의의 확대를 추구하긴했지만 전쟁 후에는 소련도 그다지 사정이 좋지 않았기에 미국과의 대립은 피하려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당장 핵도 없었고....

드디어 트루먼 독트린의 등장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비공산권을 지켜내는 일이 미국의 개입으로 가능하게 되는 시기
우리는 어떻게 지금의 형세를 해석해야 할지요.
귀중한 자료 감사합니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주고 있는 웨더스비 교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전쟁과 더불어 베트남 전쟁에도 관심이 생겼어요
위즈덤님께서 올려주시는 자료를 보다보면 아마 베트남 전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두 전쟁이 마치 평행이론처럼 닮아있더라고요..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2차세계대전이후의 전쟁은 냉전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니 유사한 측면이 많은 듯 합니다

오늘도 유익한 이야기를 전해 주셨군요 ^^ 잘 배우고 갑니다 ^^

감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미국에서도 좋은글 지속적으로 왔음 좋겠네요.

네 계속 쓰기로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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