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100] 위스키를 더 맛있게 먹는 방법, <런던의 위스키 바>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3 years ago

술꾼에게 바는 블랙홀 같은 곳이다. 다양한 술을 먹고 싶다는 강력한 중력에 이끌려 한번 발을 들이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그런 곳. 주머니 사정 같은 것은 홀랑 잊고 본능이 이끄는 대로 술을 마실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주머니 가벼운 술꾼에게 바는 위험한 장소이다. 그래서 바에 자주 가지는 않는다. 위스키 바에 가서 잔술을 마시느니 시음회에 참여하거나 보틀로 마시는 것이 훨씬 가성비가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배경이 외국으로 바뀌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히 위스키를 저렴하게 마실 수 있는 나라라면 더욱. 친구의 결혼식 때문에 런던을 찾았지만, 결혼식 다음으로 큰 이벤트는 위스키 바였다. 아무리 시간이 여의찮다고 해도 주 종목이 위스키인 술꾼이 영국까지 와서 위스키를 마시지 않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시간이 많지 않아 여러 바에 갈 수 없기에 평소보다 더욱 공들여 검색했다.

세상사 모든 것은 과유불급이지만, 좋은 위스키만큼은 아무리 넘쳐도 충분하지 않다. <마크 트웨인>

합격. 멜로디 바는 마크 트웨인의 문장이 적힌 홈페이지 첫 화면부터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일일이 확인하기에도 벅찬 방대한 위스키 리스트 중에서 무엇보다 내 눈길을 끈 건 10ml 다섯 잔으로 구성된 테이스팅 세트였다. 한국에서는 쉽게 구하지 못하는 위스키를 상당히 저렴하게 제공하고 있었다. 런던의 중심에서 꽤 벗어나 있었지만 문제는 되지 않았다. 구글 지도에 ‘꼭 가야 할 곳’이라는 의미로 노란 별표를 달아 저장했다.

대도시의 교통 체증에는 이골이 났지만, 런던은 그 차원이 달랐다. 빨간 이층버스가 빽빽하게 들어찬 런던은 도시 전체가 거대한 주차장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런던에 오자마자 교통체증에 호되게 당했기에 버스는 최대한 배제한 채 튼튼한 두 다리와 지하철만을 이용하면서 지냈지만, 멜로디 바로 가는 길에는 버스를 피할 수 없었다. 외곽으로 나가는 길 역시 어김없이 밀렸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가야 하나 싶었다. 조금 싼 가격에 현혹되어 시간 낭비를 하는 건 아닌지 버스 안에서 잠시 번뇌했지만,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기대감은 커져만 갔다.

가까스로 도착한 멜로디 바는 크지 않은 호텔에 딸린 바이자 레스토랑이었다. 일반 바와는 달라서 바텐더와 마주 보고 앉을 카운터석조차 없었다. 위스키를 마시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였고 야외에서는 작은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바에 앉아 바텐더와 도란도란 위스키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시고 싶었는데 자못 당황했다. 엉거주춤 바텐더와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주문할 메뉴는 이미 정해져 있었지만, 다시 한번 메뉴판을 확인하고는 바텐더에게 말했다.

KakaoTalk_20230324_163652314_03.jpg

“스프링뱅크 테이스팅 세트로 주세요.”

스코틀랜드 캠벨타운에 있는 스프링뱅크는 19세기에 설립된 유일한 양조장이다. 맛있기로 정평이 나 있고 특히 어떤 증류소보다 골수팬이 많은데, 최근에는 그 가격이 치솟은 데다가 물량조차 없어 구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내가 마신 스프링뱅크 라인업이 엔트리급이라 그런지, 그저 내 취향이 아닌 건지 늘 궁금했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러니 이 순간이 스프링뱅크에 대한 나의 입장을 다시 확인할 기회이다. 다섯 개의 글렌캐런 잔에서 빛나는 황금빛의 스프링뱅크와 방금까지 그들이 찰랑이던 보틀이 나란히 줄 서 있는 모습은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경건한 마음으로 한 잔씩 맛을 보았다. 직관적으로 맛있는 모든 맛을 조화롭게 담은 느낌이었다. 맛의 놀이동산. 하지만 그래서 아쉽고 재미가 없었다. 가장 기대했지만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 24년 독병이었다. 24년이라는 숙성 기간에 한껏 부푼 마음으로 입을 댔는데 알코올 맛과 인삼 맛밖에 나지 않았다. 허탈한 마음이었다. 롤러코스터를 탔는데 가장 높은 지점에서 멈춘 느낌. 다행히 시간이 지나고 물을 섞으니 맛이 피어났다. 인삼 같은 맛이 죽고 단맛, 짭짤한 맛, 오렌지 맛이 새롭게 태어나고 부드럽다 못해 우유 같았다. 와인만 에어링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위스키 역시 맛이 만개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

KakaoTalk_20230324_163652314_02.jpg

다음으로는 라프로익 카치아스 5종을 주문했다. 라프로익은 나의 최애 증류소다. 처음에는 눈을 반짝이며 술을 마셨지만 점점 집중도가 떨어졌다. 이 희귀한 술을 마시면서도 감상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날 사무치도록 외롭게 만들었다. 전날의 과음으로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간단히 테이스팅 노트를 쓰고 나서는 핸드폰을 보며 지루하게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당신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이죠?”
“네?”
“위스키를 다섯 병이나 줄 세워 두고 혼자 술을 마시고 있다니 놀라워서 그래요.”
“이걸 전부 시킨 건 아니에요. 테이스팅 세트를 마시고 있어요.”
“이 바에 테이스팅 세트가 있어요? 처음 알았네요. 라프로익 카치어스? 라프로익은 알지만 이 시리즈는 처음 봐요.”
“네. 한정판이에요.”
“잠시 앉아도 될까요?”

좋지 않은 컨디션에 꾸역꾸역 이곳까지 온 걸 후회하려던 참에 폴이 나타났다. 그는 골프와 위스키 업계의 사업가로 직원들과 함께 회식 중이었다. 야외에서 파티를 벌이던 사람들이 폴의 일행이었다.

“이거 마셔 볼래요?”

폴은 술꾼답게 정장 안주머니에서 은색의 플라스크를 꺼내어 흔들었다.

“무슨 위스키인데요?”
“맞춰 봐요.”

갑작스러운 블라인드 테이스팅이다. 마시던 위스키 한잔을 허겁지겁 비우고는 폴의 술을 받았다. 피트향이 아주 은은하게 감돌았다.

“보모어?”
“땡! 글렌스코샤예요.”
“아. 그렇네요.”

이름을 듣고 마시니 글렌스코샤 특유의 맛이 더욱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한 차례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마친 뒤 우리는 위스키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다. 왜 위스키를 마시는지, 무슨 위스키를 좋아하는지. 술로 맺어진 사이답게 우리의 이야기 주제는 오로지 술이었다.

"내가 사실 처음 위스키를 마신 건 아주 어렸을 때예요. 집에 위스키가 많아서 호기심에 마셨거든요. 그때 집에는 좋은 위스키는 없고 전부 저렴한 블렌디드 뿐이었죠."
"전 사실 위스키를 싫어했어요. 제가 처음 위스키를 먹은 게 인도인데 인도 위스키는 진짜 끔찍하게 맛없었거든요."

"아까 술병으로도 짐작했겠지만 전 피트를 좋아해서 꼭 아일라에 가서 위스키 증류소 투어를 하고 싶어요."
"스코틀랜드는 정말 자연, 자연, 자연 밖에 없어요. 너무 심심해요."
"위스키가 있잖아요? 위스키를 마시러가는 거죠."
"정말 열정적이군요."

"폴 저는 라프로익이 가장 좋아하는 증류소이고 라프로익 25년이 제 인생 위스키인데 당신이 좋아하는 위스키는 뭔가요?"
"음, 좋아하는 위스키는 많은데 즐겨마시는 건 토마틴 18년과 아벨라워 16년이에요."

나이, 성별, 인종, 결혼 여부, 재산의 규모까지 조금도 비슷한 구석이 없는 폴과 나였지만 위스키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같았다.

"오늘 젠, 당신과 만나서 정말 좋아요. 저는 물론 술을 좋아하지만 술보다 중요한 건 함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맞아요. 저도 늘 그 생각을 해요. 함께하는 사람이 좋으면 술이 비싸냐 좋냐는 이미 문제가 되지 않아요. 사실 오늘 제가 마신 술들 전부 맛있었지만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오늘이 이렇게 특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을거예요.
“무엇보다 당신은 참 영리한 사람이에요. 누군가에게 흥미를 끌게 만들잖아요.”

KakaoTalk_20230324_163652314_01.jpg

나는 멋쩍어하며 머리를 긁었다. 술에 대한 순수한 욕망이 영리함으로 읽히는 건 좀 의아한 일이다. 다시 밖으로 나가 폴의 직원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이미 한창 무르익은 회식 자리에는 처음 보는 라벨의 시바스 리갈과 제임스 이디 위스키가 있었다. 보라색 옷을 입은 시바스 리갈은 싱글 그레인이었다. 싱글 그레인은 보리가 아닌 곡물, 주로 밀이나 호밀, 옥수수 등으로 만드는 위스키다. 클라이드 강둑에 자리 잡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곡물 증류소 중 하나인 스트래스클라이드 증류소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특별한 맛은 아니지만 묵직하고 크리미한 단맛과 시트러스한 과일의 맛이 나쁘지 않게 어우러졌다. 제임스 이디 10년 위스키는 처음 보는 이름과 라벨이라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정보를 찾아보니 하이랜드 증류소인 티니니치의 싱글몰트를 병입한 술로 팔로 코타토 셰리와인 통에서 20개월 동안 숙성된 싱글몰트 위스키였다. 도수도 짱짱한 56.9였다. 제임스 이디는 1800년대 활동했던 양조업자이자 증류소로 트레이드 마크 엑스라는 블렌디드 위스키가 대표 상품이었지만 1940년대까지 생산되고 사라졌다 재작년 이디의 증손자와 조카에 의해 다시 시작해 다양한 싱글몰트를 내고 있다고 한다. 고소한 견과류의 맛이 인상적이고 쉐리 위스키에서 느껴지는 건포도의 맛이 났다. 사실 위스키는 맛보다는 둘 다 처음 경험하는 술이라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즐거웠다.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되어 마시는 낯선 위스키만큼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것이 어디 있을까? 혼자 탐구하며 맛을 음미하는 시간도 좋지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마시는 술은 더 기분 좋게 내 안에 스며들었다. 길지 않은 시간 술자리가 이어지고 어느덧 파할 시간이 되어 다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이건 당신에게 주는 선물이에요.”

KakaoTalk_20230324_163652314_04.jpg

폴은 남은 시바스 리갈 싱글 그레인을 내게 건넸다. 정말이지 애 둘 딸린 유부남만 아니었으면 당장이라도 프로포즈를 할 뻔했다. 그만큼 감격스러웠다는 말이다.

“호텔 이름이 뭐예요? 우버 잡아줄게요.”
“아뇨. 정말 괜찮아요. 버스 타고 갈게요.”
“너무 늦어서 엄청 기다려야 할 거예요.”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는데도 폴은 기어코 우버를 불렀다. 또 한 번 프로포즈할 뻔 했지만 꾹 잘 참았다. 편안하게 숙소로 돌아가면서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오늘의 마법 같은 만남을 되새겼다. 술꾼으로 태어나길 잘했다. 오늘, 기어코 이곳에 오길 잘했다. 말하자면 4년마다 한 번 찾아오는 2월 29일생의 생일처럼 흔치 않게 들뜬 밤이었다.

Coin Marketplace

STEEM 0.04
TRX 0.32
JST 0.085
BTC 60738.44
ETH 1602.69
USDT 1.00
SBD 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