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100] 언니에 대하여
글쓰는 걸 배우고 싶어 들어간 국문과에서는 글쓰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수업에서 짧은 글을 쓰거나 소모임에서 희곡을 돌아가면서 쓰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나보다 두 학번 선배인 한아 언니는 유일하게 국문과에서 진지하게 소설을 쓰는 사람이었다. 졸업하기 전에 등단을 한 언니가 난 늘 자랑스러웠다. 언니와 많이 가까운 건 아니었다. 같은 소모임이긴 했으나 언니는 이미 활동을 하지 않았기에 답사나 뒷풀이에서 가끔, 나도 언니도 철학과를 다전공했기 때문에 몇 개의 철학 수업을 같이 들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지, 어떤 글을 써야할지를 고민하는 내게 언니는 언니가 할 수 있는 조언들을 해줬다. 필사에 대해서, 먹고 사는 것이 녹록치 않을 것이므로 다른 자격증을 꼭 딸 것에 대해서.
그다지 끈끈하지 않았던 우리는 졸업을 하고는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고 가끔 누군가의 결혼식에서, 단톡방에서나 마주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와인을 먹고 취기에 언니에게 메일을 한통 보냈다. 언니가 아이를 소재로 쓴 글을 보고나서이다. 내 사랑과 응원의 글에 언니도 나를 응원하며 지지해준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는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면 정말 행복할 줄 알았는데 행복이란 게 얼마나 복잡한 조건을 가진 것인지, 어른이 되니 이제야 알겠네. 그래도 복잡한 어른의 세계란 얼마나 멋진 것이냐? 단, 자기 욕망에 솔직하고 떳떳할 수 있다면 말이야.
언니의 메일은 감동스러웠지만 나는 다시 메일에 답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작년에 언니의 소설로 오랜만에 언니를 만났다. 결혼한 여성, 엄마인 여성을 소재로 다룬 단편 소설책이다.
그런 거 있잖아요. 이 시대의 정언명령은 ‘너 자신이 되라’인데 ‘엄마 되기’는 그와 정반대라는 생각이 들어요. 엄마 되기는 내가 되면 안 돼요. 나 자신이 되는 순간 아이들이 대가를 치르게 되니까. 참 그런 게 아이러니하죠. 아이들은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사랑이 있는 것처럼 구는데, 그러기에 우리는 스스로를 사랑하기도 벅찬 불완전한 존재들이거든요. 그럼 아이에게 줄 사랑은 어디에 있나, 그 사랑 없음에 매일매일 고민했어요.
259, 대담 :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계속한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의 결말이 ‘엄마가 된 여성’들에 대한 어떤 전망을 보여주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리라는 기원을 담아 썼던 것 같아요. 글쓰는 엄마로서 내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계속해나간다고 하더라도 어떤 관계의 확장과 또 뭐랄까, 실패에서 오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실패한 그 자리에서 또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그런 위로를 줄 수 있다면 좋겠어요.
273, 대담 :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계속한다
두 아이의 육아를 하면서 하나하나 공들여 짜내려간 언니의 글도 좋았지만 대담 또한 흥미로웠다. 매순간 충돌한다는 작가의 '나'와 엄마의 '나',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싸움을 계속한다는 말이 자꾸만 남는다. 작가로 사는 것도 녹록치 않을터인데 작가와 엄마를 겸한다는 것의 무게는 가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실패에서 오는 자유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 낙관적임이 언니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 책을 읽고 몇 주 뒤에 책장의 책을 정리하다가 <자기앞의 생>을 꺼냈다. 가장 맨 앞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생일을 축하해! 이 책 속에 '꿈도 계속되면 악몽이 된다'란 구절이 있는데 우리의 꿈은 악몽이 되지 않길 바래. 독서와 유머, 철학만 있으면 못할 게 없다는 거 알지??"
선물하는 사람의 이름은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언니의 선물이었던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