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100] 네가 그런 사람이어서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5 years ago (edited)

IMG_2446.JPG
뱀파이어 미니카. 소요시간 30분.



재작년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조카와 함께 살던 몇 개월이 벌써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진다. 함께 살던 때에 우리는 잠자리에 들기 전 언제나 서로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그에게 고모와의 옛날이야기 시간은 자기 전 양치질 같은 루틴이어서 나의 귀가 시간이 평소보다 늦어져도 예외가 없었다. 자정을 넘길 정도로 늦어지지 않는 이상 내가 들어올 때까지 기를 쓰고 버텼고, 자다가도 내가 집에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지면 깨어나 눈을 비비며 방에서 기어 나오기 일쑤였다. 그러니 나에게 도망칠 구석은 없었다. 더는 나올 이야기가 없어도, 죽도록 피곤해도,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도 기필코 10~15분 분량의 이야기를 즉흥적으로 창작해내야 하는 것이다.

'고모가 어렸을 때~'로 시작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언제나 나였다. 나는 늘 이 이야기가 실화임을 강조했고, 내 조카는 그것을 믿었다. 대부분 모험담인데 사실 매번 원형 a(용감한 주인공과 친구들이 힘을 합쳐 숲의 비밀 혹은 바다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모험을 떠나고 악당인 줄 알았던 비밀의 존재를 만나는데 그 존재가 사실 외로운 겁쟁이일 뿐이며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어 결국 그와 친구가 되는...)의 변형 a-1, a-2, a-3에 불과했지만, 내 조카는 꽤 날카로운 리스너라 이야기 구조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금세 이상함을 느끼고 그 부분을 콕 짚어 지적했다. 이야기가 너무 무섭게 흘러가면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엔 울어버리지만, 극적 긴장감이 너무 떨어져도 '이거 말고 다른 이야기 해줘' 해버린다. 그럴 때면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끝까지 들어야지' 근엄한 척 꾸짖고는 서둘러 이야기를 끝마쳤다.

내 조카가 지어내는 이야기는 대체로 5분 안에 끝나고, 해골, 마녀, 거인, 프랑켄슈타인 같은 애들이 자주 등장했다. 짧지만 엄청난 액자식 구성이라 미로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마치 가만히 서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는 것과 같아서 시작과 끝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했다. 개연성을 따지기보다는 순간순간의 감정에 집중하며 격렬한 리액션을 보여주곤 했다. 그건 이야기를 하는 것만큼 어려웠다.

그러고 보면 내 조카는 참 용감하고 따뜻한 아이다. 나는 어렸을 때 지독한 울보에 겁쟁이였는데. 엄마와 잠깐이라도 떨어지면 세상이 끝난 것처럼 몇 시간이고 대성통곡하던 애. 손에 뭐라도 묻으면 누가 닦아줄 때까지 아무것도 만지지 않고 열 손가락을 모두 새 발톱처럼 오므린 채 끝끝내 버티던 애. 엄마 아빠는 이 애가 과연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학교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무척 염려했다고 한다. 사실 이건 나의 기억이 아니다. 엄마 아빠, 그리고 이모와 삼촌들의 증언이다. 유년 시절의 기억 중에 그들의 증언과 일치하는 장면이 딱 하나 있기는 하다. 하나둘셋인가 딩동댕유치원인가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내가 다니던 유치원에 촬영을 나왔던 날이다. 원생들과 다 같이 체조하는 장면을 찍어야 하는데 다른 아이들이 생글생글 웃으며 깡총깡총 뛰며 신나게 몸을 흔드는 동안 맨 뒷줄에서 서서 내내 우는 바람에 선생님들 애를 먹였던 애가 나다. 나는 끝까지 몸을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촬영은 나를 빼고 진행되었던 것 같다, 아마. 엄마는 내가 우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사진첩에 따로 모아 두기도 했는데 서럽게 우는 애를 달래지 않고 사진을 찍다니 고약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사랑스러운 지혜지만 다 큰 숙녀가 이렇게 울 때면 너무 속상해요!'라고 적어놓은 엄마의 코멘트가 너무 귀여웠다. 나의 분리불안은 학교에 입학하며 자연스럽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울보는 여전히 울보다. 슬퍼도 울고, 화가 나도 울고, 기뻐도 운다. 나의 감정이 눈물을 끌어내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남이 울 때도 따라 운다. 조카랑 동화책을 읽을 때면 그 애가 자꾸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확인한다. 동화책을 읽을 때 자주 울었기 때문에 또 고모가 우는 건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아가였던 내 조카는 2년 사이 어린이가 되었다. 어려운 부분은 도와줘야 하지만 종이접기를 제법 잘하고, 동화책도 줄줄 읽는다. 적혈구니 혈소판이니 예상치 못한 말들을 해대기도 한다. 이번 추석 연휴에도 조카와 옛날이야기 시간을 가졌다. 오래간만이라 이야기가 잘 떠오르지 않길래 '이번엔 네가 먼저 해'하고 시간을 벌었다. 조카가 해준 이야기 안에는 해골과 마녀 대신 괴상망측한 이름의 귀신들이 대거 등장했다. 신비아파트에 나오는 귀신이라고 하는데 찾아보니 너무 무섭게 생겼고, 이야기도 6세에게는 적절하지 않았지만, 내 조카 역시 어린이집에서 사회생활 하려면 어쩔 수 없겠구나 싶기도 하다. 조카의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내가 지어낸 이야기는 요즘 출근길에 조금씩 읽고 있는 소설 <모비 딕>과 피노키오 이야기를 뒤섞은 것이다. <모비 딕>을 읽기 시작한 건 2년 전인데 아직 끝이 아득하다.

역시나 '고모가 어렸을 때~'로 시작하는 이번 이야기는 커다랗고 하얀 고래 '모비 딕'에게 팔을 빼앗긴 할아버지의 부탁으로 고래 배 속에 들어가 그의 팔을 찾아오는 모험담이었다. 고래가 숨을 쉬기 위해 물 밖으로 나왔을 때를 노렸다가 고래가 입을 벌리면 입 안으로 들어가서 할아버지의 팔과 그 밖에 고래가 삼킨 다른 동물들(거북이, 문어, 불가사리 등)을 모두 데리고 고래 배꼽으로 탈출하는 주인공의 용맹함을 잘 표현해야 했다. 배꼽 근처에 도착했을 때 고래 배 속에서 할아버지를 불러야 하기 때문에 동굴 안의 메아리를 재현하느라 애를 먹었다.

조카와 나누었던 옛날이야기 시간이 내게는 정말 소중하다. 조카가 더 어릴 때는 틈만 나면 떠나버려서 함께 놀아주기는커녕 얼굴도 보기 힘들었기 때문에 늘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어느새 우리는 떨어져 있던 시간을 극복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는 관계가 되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그 애의 말과 행동이 실제로 내게 큰 힘이 된다. 조카니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애가 그런 사람이어서 좋아하는 것이다. 그 애 역시 내가 고모니까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런 사람이어서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의 말과 행동이 그 애에게도 큰 힘이 된다면 좋겠다. 이번 연휴에는 마법 반지를 선물했고, 가슴에 손을 모으고 주문을 외우는 법을 가르쳐줬다.

Sort:  
 5 years ago 

행복이 전해져오네요.

저는 왜 갑자기 영화 "잉크하트"가 떠오를까요? :)

Coin Marketplace

STEEM 0.04
TRX 0.32
JST 0.083
BTC 60116.64
ETH 1564.69
USDT 1.00
SBD 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