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 - 가면축제에서 찾은 자유

in #tripsteem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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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파가 보내준 베니스




그 해 겨울에는 물이 나오지 않았다. 하룻밤 사이에 5층 옥상에 설치된 물탱크 안의 물이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2011년 기록적인 한파가 부산을 덮친 날 나는 텅 빈 커피가게 안에서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헛수고라는 것을 알면서도 옥상까지 걸어 올라가 물탱크 안에 펄펄 끓는 물 7리터를 들이부었다. 그러기를 반나절. 밤이 되자 기온은 더 내려갔고 얼음은 녹아주지 않았다. 2주가 흘러도 기온이 영하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물을 다시 쓸 수 있게 될 때까지 가게를 닫을 수 밖에 없었다. 문 앞에 임시휴업이라는 팻말을 걸었다. 한참 입 소문을 타던 시기여서 방학을 맞아 찾아오는 대학생들이 아쉬워하며 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한 달이 지나자 추위가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물탱크 안의 물이 녹으면서 옥상에서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관이 파열되었다. 물은 옥상외벽을 물바다로 만들더니 건물외벽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1층으로 뛰어내려와 직수가 유입되는 밸브를 잠그고 건물주에게 전화를 했다. “너희가 쓰고 있는 수도를 왜 내가 관리해야 하느냐.”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건물주를 찾아가 장사를 할 수 있게 보수해 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봄이 될 때까지 임대료는 꼬박꼬박 통장에서 빠져나갔다. 미쉘양이 갑자기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달 동안 여행을 가자고 했다. 그래서 밀라노 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물론 커피가게를 닫은 채로. 나는 가게 걱정을 떨칠 수 없었지만 진심으로 그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밀라노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고 그 다음날 새벽에 베니스로 가는 기차를 탔다.




베니스의 아침





베니스의 가면축제





여행자를 유혹하는 고가의 가면들



그 날은 가면축제 첫날이었다. 코스튬을 입고 화려한 가면을 쓰고 다니는 인파 속에서 우리는 잠시 멍해졌다. 사람들은 축제를 보란 듯이 즐기고 있었고 무척 행복해 보였다. 물이 안나오는 가게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점점 축제 분위기에 취해갔다. 인파 속에서 이리저리 밀려다니며 노점상에서 멋진 가면도 샀다.






가면을 마련한 미쉘양



노란표식





레알토로 가는 화살표



베니스는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떠안으며 늙어가는 도시이다. 그렇지만 환상적인 광채를 지니고 있다. 그 광채는 깨진 벽돌과 칠이 벗겨진 벽과 덧창들, 습기를 먹고 자란 이끼가 뿜어낸다. 우리는 인파에서 떨어져 호젓한 다리와 벽과 문들을 통과했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벽돌길처럼 이 도시는 노란 표지판이 여행자에게 길을 안내한다. 우리는 창문과 난간, 이상한 무늬로 수놓아진 도시의 얼룩을 하나라도 눈에 더 넣고 싶어 걸음을 빨리 옮겼다.






벽이 예뻤다






카페 플로리안





플로리안의 화려한 천장





산 마르코 광장에 자리잡은 카페 플로리안은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였다. 1720년 오픈한,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 금빛으로 장식된 천장과 벽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공간에서 노곤해진 몸을 녹였다. 커피 한 잔과 달콤한 디저트가 도착하자, 그 순간 더 바랄 게 없어졌다. 문득 비행기표를 끊지 않았다면 물이 안 나오는 가게에서 하루 종일 건물주를 원망하고 있을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 때 나는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해석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의 방향은 내가 원하는 각도로 바꿀 수 있었다. 조종관을 잡은 사람은 바로 나였으니까.




도착한 커피




덧> 이 글은 작년에 썼던 베니스에서 얻은 자유에 사진과 살을 붙인 글입니다.




베니스 - 가면축제에서 찾은 자유



이 글은 스팀 기반 여행정보 서비스

trips.teem 으로 작성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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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물주 위에 건물주라지만 참 야속하네요. 그렇게 나몰라라 하다니. 그래도 덕분이라면 덕분에 밀라노라는 아름다운 곳을 여행하셨네요. :)

네 건물주 덕분에 뜻밖의 소중한 경험을 했답니다^^

뜻하지 않은 여행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가져다 주는 것 같아요~

맞아요 여행은 늘 낯선 것을 만나게 해줘요:)

ㅜㅠ 건물주님 정말 야속하네요.... 많이 속상하셨을 것 같아요 ㅠㅠ 베니스의 이곳 저곳을 찍은 사진들은 마치 보물섬에 있는 보물들을 발견한 것 같아요! ^^ 너무 아름답네요.

돌아오셔서는 수리가 잘 되었길 바래요. 그리고 보얀님, 커피가게를 운영하셨군요! 혹시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커피 좋아하는데, 다음에 또 부산에 내려가게 되면 그 곳에 커피마시러 가보고 싶어요!

베니스는 당일로 다녀온 게 너무 아쉬워요. 다음에 방문한다면 넉넉하게 일주일은 머물고 싶어요. ^^ 여행에서 돌아왔더니 고맙게도 수리를 해주셨어요. 그 일을 계기로 가게를 정리하고 경제적 자유를 꿈꾸었으니 건물주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게 되었답니다:)

안녕하세요. @trips.teem입니다. 베니스 가면축제도 참가하셨네요~ㅋ 베니스는 여행지 자체가 왜이리 고급스러워 보이죠?? 앞으로도 좋은 여행기 많이 공유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베니스는 뷰파인더에 맺히는 상이 모두 그림이 되는 도시예요 응원감사합니다 ^^

물이 안나오니 베니스나 가자! 이런 추진력이 부럽습니다.ㅎㅎ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인데 추진력으로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

저라면 베니스가 아니라 건물주 멱살 잡으러 떠났을 거 같은데 너그러우십니다... ;ㅁ;

그나저나 저 고가의 가면들은 엄청 화려하네요. 하나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

고가이지만 퀄리티가 굉장해서 탐났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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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의 가면 축제에 가셨군요!!! 도피 여행이지만, 가끔은 그렇게 마음의 여유를 찾고, 충전할 여행도 필요한 법이죠 ㅎ 베니스 여행이 힘이 되셨기를 바라요 ㅠㅠ

베니스에서 여행의 맛을 알아버렸죠! 앞으로 여행할 도시를 상상하면 절로 행복해집니다 ^^

우와~ 저도 저런 까만 가면 한번 써보고 싶네요.ㅋㅋ
저한텐 안 어울릴지도 모르지만, 미셸양에게는 완전 잘 어울리네요.

은쟁반에 나온 커피 너무 멋집니다.^^

까만 가면은 가격 대비 퀄리티가 괜찮았답니다! 기회가 된다면 꼭 시도해 보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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