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시티] 82년 생 김지영과 86년 생 동백이 그리고 83년 생 춘자
82년 생 김지영
_ 영화 ‘82년 생 김지영’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한국의 여성들에게 그것은 이제까지 태생적 의무였습니다. 때론 그것만 잘하면 되는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성인 여성의 성적표, 자격증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굴레이며 속박이지만 도피처이고 방패막이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것은 기쁨이고 보람입니다. 해 본 사람은 알 수 있습니다. 아니 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댓가를 요구합니다. 시간과 기회를 포기해야 하고 나의 인생을 녹여 아이에게 증여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지금 이 시대에 더욱 그렇습니다. 아이가 아이를 돌보고 대가족이 아이를 기르며 마을이 아이를 책임지는 공동체가 아닌, 오롯이 남자와 여자에게 그리고 여자 일방에게 책임이 전가되어 버린 과도기의 시대에, 그것은 더욱 자신을 녹여내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 과도기에 걸려 버린 82년 생 김지영은 과감하게 비혼, 탈출산을 선언할 수 없었습니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과 사회의 인정욕구에 묶인 자신에게 그 권리를 저당잡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하는 작가로서의 삶이 아닌 그런대로 괜찮은 직장인의 신분은 차선일 뿐입니다. 국문과 출신 작가의 삶이 최선이라면, 글 좀 쓸 줄 알아 선택한, 아니 수많은 경쟁자를 뚫고 쟁취해낸 홍보회사의 합격증은 아무리 기뻐도 차선입니다. 정신줄을 놓아야 할 만큼의 거대한 스트레스가 기다리고 있는 구시대적 삶으로의 퇴보일 뿐입니다.
82년 생 김지영에게 잘못 선택했다 말하고 싶지만.. 핑계 없는 무덤이 없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으니 타박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제라도 큰 산을 넘어 얻어낸, 집안의 대들보 남동생의 만년필일지언정 자신의 이름 석 자가 박힌 그것으로 글쓰기를 시작했으니 그녀의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작가는 이 출판 불황의 시대에 100만 부를 팔아제꼈으니 말입니다.
86년 생 동백이
7살 때 엄마에게 버려진 고아에, 아들내미 하나를 바라보고 사는 미혼모, 게다가 오가는 사람마다 집적대지 못해 안달인 술집 여주인. 그녀에게는 심지어 치매에 걸린 생모까지 책임져야 하는 구질구질한 팔자가 놓여있습니다. 요즘 세상에도 이런 삶이 있을까 싶지만 요즘 세상에도 아들 낳지 못한 며느리를 구박하는 시어머니가 있으니 이런 팔자도 있는 겁니다. 사람 인생이 다 팔자소관인 겁니다.
그러나 동백이는 씩씩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걸을지언정 마음을 숙인 적이 없고 팔자가 원망스러울지언정 팔자에 묶여 있지만은 않습니다. 팔자가 내어놓는 시선과 절망 앞에 ‘그러라지 머’ 하고 후루륵 넘겨 버리고, 술을 팔지언정 마음을 팔지 않으며 언제나 올곧게 자신의 삶을 뚜벅뚜벅 마주합니다. 도망치지도 외면하지도 않고 팔자가 내어놓는 모든 드라마에 주연으로 당사자로 당당하게 대응하고 딱 부러지게 쏘아줍니다.
그녀에 대해서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회장님의 말이면 충분합니다.
“동백이는 난 년이여. 시커먼 콩나물시루에 가둬놔도 빛 들어올 구녕을 찾아내는 애라구. 갸는..”
_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운명과 마주하는 난 년 동백이.
어둠 속에서도 반드시 빛을 찾아내는 동백이.
86년 생 동백이.
나도 너의 편입니다.
83년 생 춘자
그녀는 던킨도너츠에 앉아 미친듯한 한숨을 몰아쉬다가 마침내 울어버렸습니다. 임용고시를 포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차마 집에는 알릴 수가 없었다. 매일 아침 집을 나섰고, 동네에 있던 던킨도너츠에 가서 커피 하나를 시켜놓고 몇 시간이고 멍 때렸다. 적당한 저녁에 집에 돌아가서 오늘 수업이 힘들었네 어쨌네 저쨌네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이때를 떠올리니 지금 막 또 눈물이 나려는 참이다. 아... 주책... 그런 생활을 한 달쯤 계속했다. 작정하고 술을 진탕 마신 날, 집에 들어가서는 엄마 아빠에게 엉엉 울며 사실대로 고했다. 나는 임용고시를 보지 않을 것이다. 사실 학원에 가지 않은 지 좀 됐다. 그들은 의외로 담담했고, 내게 되물었다. 그럼 취업할 거야? 여전히 울먹이면서 말했다.
‘나는 글을 쓰고 싶어.’
그녀는 사실 교사가 꿈이었습니다. 운도 좋았습니다. 남들은 임용고시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해 교육대학원에 진학하기도 하는데, 점쟁이도 부러워하던 그녀의 좋은 팔자는 그녀에게 별 어려움 없이 교직을 이수할 수 있는 자격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역사학과에서 임용고시 합격자를 배출하면 커다란 현수막이 붙는다. 역사과 중등 교사는 역사학과가 낼 수 있는 거의 최상급 아웃풋이다. 누구는 굳이 교육대학원까지 가서 임용고시를 치를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내가 턱걸이로 교직 이수를 하게 되는 바람에 기회를 잃었던 내 동기는 교직 이수자 명단 발표가 있던 날 마시지도 않는 술을 마시며 엉엉 울었다고 들었다. 날 얼마나 원망할까. 그래도 일단 시험을 한 번은 봐야 하지 않겠냐며 나를 설득하겠지 생각하고 있던 내게 교수님은 자신도 청년 시절 문학도를 꿈꾸었다고 말했다. 문학을 하고자 한다면 시를 읽어야 한다고 좋아하는 시집을 추천해주셨다. 또 한 번 운이 좋았다.
그녀는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자신이 이 시스템 속에서는 교사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82년 생 김지영이 이 악물고 버텨내다 정신병에 걸려 버린 그 시스템. 86년 생 동백이 같이 난 년이 아니고는 감당해 낼 수 없는 그 시스템. 부모의 기대와 인생의 차선을 살기 위해 그 시스템에 진입할 수는 없다고 선언해 버렸습니다.
운 좋게 교직 이수 과정에 들 수 있었고, 3학년 때 휴학을 했다. 임용고시를 준비한답시고 국립중앙도서관에 다녔다. 엄마는 매일 아침 도시락까지 싸주며 날 응원했고, 나는 주로 공상을 했다. 그곳은 공상을 위해 완벽하게 설계된 공간이었다. 공상의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 만들어 낸 두 작품을 모 문학상에 출품했다. 심사위원이 그 소설을 다섯 줄 이상 읽었을 것 같지는 않다. 복학하고 그해 봄에 모교로 교생 실습을 나갔다. 한 달 동안의 실습을 마치고 정말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보 같게도 좋은 교사가 될 수 있다고 착각했다. 고작 '교생 실습'을 통해서 말이다. 학기를 마치고 임용고시 준비 학원에 등록했다. 시스템이 원래 그러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3개월 치 수강료를 한꺼번에 냈다. 벽돌처럼 무겁고 두꺼운 전공 서적과 교육학 서적을 받아 들었다. 교생 실습의 달콤한 추억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단 한 번도, 일기에조차 '써' 본 적이 없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 시절의 이야기를 '말'로 꺼내놓을 때면 곧잘 운다. 그렇지만 '쓰기' 위해서는 나와 대화해야 한다. 나는 아마 곧 혼자 울게 될 것이다. 제길... 정말 쪽팔리지만 열흘 만에 짧은 고시생(?)으로서의 생활을 때려치웠다. 엄마가 수강료를 내주었고, 여전히 아침마다 집을 나서는 내 뒤통수에 파이팅을 날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치열한 전장에 들어선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좋은 교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운이 좋았다.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단 열흘이 걸렸을 뿐이니까.
그리고 그녀는 그길로 여행을 떠납니다. 지구는 둥그니까 걷고 또 걸었습니다. 걷다가 만난 기가 막힌 절경에 감동하여 인도 산골짝 라다크에서 카페를 열기도 하고 그곳에서의 3년간의 기록을 모아 책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라다크에서 만난 티벳인들의 삶에 공명하여 티벳독립운동을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나는 글을 쓰고 싶어’
우리는 [스팀시티]에서 그녀의 글을 만나 볼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깨고 나온 82년 생 김지영의 글도, 박복하지만 언제나 당당한 86년 생 동백이의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모두가 소중한 우리의 그녀들이고 모두가 편들어 주어야 할 나의 카멜리아들입니다.
자신을 찾아오라며 가라앉은 [스팀시티]는 춘자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선택한 용기 있는 춘자들의 글을 세상에 내어놓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녀들은 엄마의 한 숨과 나중에 얘기하자며 돌아누워 버린 아버지의 등짝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도 그 말을 내뱉는 내 목소리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리고 엄마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듯한 표정을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아빠는 나중에 얘기해 하고 다시 자리에 누워버렸다. 엄마는 '글 쓰는 사람'은 평생을 곤궁하게 사는 줄로 알고 있었다. 엄마도 나름의 근거를 댔다. 이루어놓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도무지 반박할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야. 나는 달라. 할 수 있어. 그냥 되지도 않는 말을 하며 큰소리를 치고는 방으로 돌아와 한참을 엉엉 울었다. 마음이 후련했다.
아니야
나는 달라
할 수 있어
말할 수 있다면, 그 되지도 않는 말을 하고 큰소리를 치고는 [스팀시티]를 찾아 오십시오. 당신을 맞아 줄 춘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꿈을 이뤄줄 마법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꿈의 대륙 아스타리아가 심겨질 당신의 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82년 생 김지영은 영화이고 86년 생 동백이는 드라마이지만 83년 생 춘자는 현실입니다. 지금이고 미래입니다. 곧 춘자의 큰소리와 아스타리아의 첫 번째 몽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시커먼 콩나물시루에 가둬놔도 빛 들어올 구녕을 찾아내는 동백이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그것을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서 마법사는
82년 생 김지영에게 용기를 내라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86년 생 동백이에게 나는 언제나 너의 편이라고
83년 생 춘자에게 너는 다르다고 너는 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떠들어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