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說 스팀시티 영웅전] 83. 프라하, 안녕..
눌어붙은 마음
과거에 붙들리는 마음은 탐닉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두 마음 다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머리는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붙들린 마음은 좀처럼 놓아지지가 않습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발걸음은 서성이고, 밀착된 마음은 단단히 눌어붙어 좀처럼 떨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눌어붙은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꿈을 좇는 이들은 무엇에도 좀처럼 눌어붙는 일이 없기에 발걸음이 가볍고 경쾌합니다. 춤을 추며 살아가는 이들 역시 한 곳에 발길을 놓아두지 않기에 미련과 갈등이 없습니다. 몸이 가는 대로 다음 발걸음을 놓아주지 않으면 스탭이 엉켜서 넘어지고 말 테니까요. 하지만 꿈을 좇지 않고, 춤을 추지 않아 눌어붙은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단단하게 밀착되어 좀처럼 떼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냥 떼어냈다가는 크게 살점이 떨어져 나갈 수도 있으니 조심스럽게 녹여 내야 합니다. 상처가 남으면 볼 때마다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날 테니 흔적을 남기지 말고 잘 떼어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습기를 가득 머금게 해서, 눌어붙어 굳은 마음이 말랑해지고 풀어지도록 살살 녹여내야 합니다. 그것에는 수평선 위로 지는 석양과 한가득 물기를 머금은 해풍만 한 것이 없습니다. [스팀시티]가 이오에게 바닷길을 제안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라나다에 도착한 이오는 좀처럼 프라하에 가지 못하고 유럽대륙을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그라나다로 다시 돌아와 남겨두고 온 마음을 찾았으니, 이제 함께 가지 못했던 프라하로 날아가, H에게, 과거에게, 이별을 고해야 합니다. 나는 이제 나아갈 거라고, 미래로, 나의 세계로, 나의 붉은 사막으로..
인생을 회복시키고 변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긋났던 지점으로 돌아가 다시 새로운 선택을 하는 겁니다. 시공간은 분리된 것이 아니니, 어긋난 과거의 지점으로 돌아가 다시 하는 선택은, 우리의 현재를 바꾸고 미래를 변화시킵니다. 인생이 새롭게 정렬되고 아픈 과거는 기억 속에서 사라집니다. 대신 달라진 선택과 연결되는 새로운 과거가 우리의 역사 속에 새롭게 기록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눌어붙은 마음으로 지탱하는 현재는, 그것과 함께 자신을 썩어들게 만들고 침몰시키고 파괴시킵니다. 점점 단단해지고 굳어진 나머지 딱딱해져서 부러지거나 바스러져 버립니다. 물론 그것 역시 영혼의 선택이니 막아줄 수도 바꿔줄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 그것의 극단에까지 이르면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고 재가 되어 새롭게 태어나게 되기도 합니다. 용기가 있다면, 용기가 크다면, 그 선택 역시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처럼) 그러나 그 선택에 마법사는 동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법사는 그 선택을 권유할 수도, 제안할 수도 없습니다. 마법사는 도전하는 이들의 가이드이며, 과거를 바꾸고자 하는 이들의 미래기억전달자이기 때문입니다. [스팀시티] 역시 그런 선택을 하는 이에게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길이 다릅니다. 하지만 누구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오는..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떠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아니 떠나지도 못했을 겁니다. 아픈 과거와 이별하고 새로운 과거를 장착하려고 바닷길을 거슬러 올라온 것입니다. 압니다. 누가 뭐랍니까? 할 겁니다. 해낼 겁니다. 하지만 한 번에 떼어내면 아프잖습니까?!
지칠 대로 지친만큼, 단단히 눌어붙어 버린 과거의 기억은 좀처럼 떼어낼 엄두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새 정이 들어버린 과거의 상흔과 조금이라도 이별을 연장하고픈 마음이 계속 맴도는 것입니다. 친숙해진 것들과의 이별은 그것이 무엇이라도 언제나 어려운 것이니까요. 결국 고통 역시 지나고 나면 추억이고, 막상 떼어내려고 하면 무엇이든 헤어지기는 아쉬운 법입니다. 하지만 이오에게는 친구가 있습니다. 아픈 과거를 새로 기억으로 덮어씌워 줄 역전의 동지 말입니다.
‘미친 짓’도 ‘늘 하던 짓’도 아닌 ‘혁신적인 짓’이며 ‘새로운 짓’을 하러 길을 떠난 너는 포그처럼 담대하고, 침착하고 재기 있게 너의 여행을 잘 꾸려나갈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넌 내가 살면서 본 중 가장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고, 용기 있고, 자신이 생각하는 행동에 주저함이 없는 사람이니까
"동쪽은 미래로 가는 여행이고 서쪽은 과거로 가는 여행이에요. 서쪽으로 배를 타고 떠나 사랑을 찾아야 해요. 새로운 H를 찾아야 해요."
남미에서 합류하려던 나의 일정은 마법사님의 마법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너는 동으로 나는 서로 지구를 뺑 돌아 우리는 암스테르담에서 만날 것이다. 늘 옆에 있던 네가 없어 허전하겠지만, 길 위에서 만날 너와 손을 붙잡고 밤새 이야기를 쏟아낼 날을 기다리며 나 역시 길 위에서 홀로 설 것이다.
_ [위즈덤 레이스 + BOOK 100] to 라라님 (feat. 80일간의 세계 일주) / 이오
새로운 과거
41일간의 항해, 그리고 체류 기간을 포함하여 총 두 달여간의 여정을 마친 이오는, 마침내 그 땅 그라나다로 돌아왔습니다. 결심하고 준비한 시간에 비하면 바다를 거슬러 서쪽으로, 과거로 돌아오는 시간은 경쾌하고 짧았습니다. 망설일 시간도 없이, 계획된 일정에 따라 시간은 흐르고 공간도 달라졌습니다. 오히려 지체할 새 없이 나아가는 시공간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했을 겁니다. 질척이는 마음은 아쉬움을 길게 늘어뜨리기 마련이니까요.
다시 그라나다로 돌아온 이오는, 그에게 같은 시공간에서 새로운 과거를 장착시켜줄 반가운 해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역전의 동지, 라총수와의 재회가 그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혼자서 후회와 아픔만 가득한 공간에 들어서기보다, 그 시공간을 새로운 만남, 달라진 과거로 덮어씌울 수 있다면, 같은 시공간의 기억도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도울 수 있다면 새로운 과거를 만드는 일을 도와야 합니다. 그것은 [스팀시티]가 원하는 일입니다. 원래 일정은 암스테르담에서 두 달여 뒤에나 만나게 되어 있었지만, [스팀시티]는 두 사람의 그라나다 재회를 전격적으로 도왔습니다. H와의 아픈 기억을 옛 친구, 새 친구들과의 새로운 기억으로 덮어씌워야 하니까요. 덕분에 라총수는 남미대륙에서 출발하여 뉴욕을 거쳐, 그라나다에 입성한 이오를 환영하러 날아갈 수 있었습니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말이죠.
2월 3일 상하이를 출발하여 3월 31일 스페인 말라가에 도착했다. 피치 못하게 싱가포르에서 두바이로 단 한 번 비행기를 탄 것을 빼고는 총 4번 41일간 배를 타고 아시아에서 유럽까지 항해했다. 누웠다 잠에서 깨면 대부분 나라가 바뀌어있었고 시간이 딜레이되는 걸 몸소 느끼며 바다를 떠다녔는데 시간은 한 시간 한 시간 앞으로 감겨 지금은 한국보다 7시간 늦은 시간에 머물고 있다. 12개국을 거쳤고, 중국해를 아라비안해를 아덴만을 수에즈 운하를 에게해를 지중해를 건넜다.
외롭기도 했고 충만하기도 했고 눈물겹게 행복하기도 했고 피로하기도 했던 시간을 통과해 도착한 말라가에서 라총수를 만났다. 둥근 지구의 서쪽으로 과거를 헤엄쳐온 나와 동쪽으로 미래를 날아온 그녀는 만나자마자 재잘재잘 길 위의 이야기들을 해댔다. 정말이지 비현실적인 만남이었다. 실수로 말라가 시내가 아닌 10km 떨어진 작은 도시 토레몰리노스에 숙소를 예약했는데 바다를 품고 있는 조용하고 아기자기한 마을은 가만히 있기 제격이라 우리는 바로 사랑에 빠져 버렸다. 이것 또한 실수가 아닌 정해진 운명의 이끌림이었겠지. 지나쳐온 여행의 시간보다 더 지쳐있던 우리는 이곳에 한참을 머물며 글을 쓰고 충전의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_ 지구는 둥글다, 서쪽으로 가자 / 이오
"역전의 용사들이 한 사람은 대륙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한 사람은 대양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각자 지구 반 바퀴를 돌아 그라나다에서 다시 재회하게 되었어요. 이 사람들 정말 대단합니다. 눈 덮인 히말라야를 맨몸으로 뚫어내지를 않나, 이제는 지구를 마구 휘젓고 다니기까지. 암튼 지구는 정말 둥근 것이 맞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두 사람 다 지구 끝 절벽에서 추락하여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말았겠죠. 그러나 두 사람, 두 친구는 차곡차곡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정확히 지구를 한 바퀴 크게 원운동한 것입니다. 그리고 몸으로 증명해 보인 것이죠.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온 세상, 나의 친구를 다 만나고 오겠네!!"
친화력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오는, 정말 온 세상에 친구를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럽대륙에서도 반가이 환영해 주고, 심지어 재워 줄 친구들을 얼마든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그는 유럽대륙을 자기 동네처럼 쏘다녔습니다. 오랜 친구, 새로운 친구, 크루즈에서 만난 친구, 젊은 친구, 나이 든 친구 할 것 없이 여기저기 흩뿌려 놓은 그의 관계자본, 우정자본을 마음껏 쓰고 다녔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스팀시티] 글쓰기 유랑단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약속한 대로, 암스테르담에서 다시 만났고, 프랑크푸르트와 뤼데스하임을 거쳐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그를 보냈습니다. 프라하로..
"유럽대륙에서 친구들과 새로운 과거를 마음껏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전에 마지막 의식을 치러야 합니다. H를 혼자 떠나보냈던 프라하로 가서, 그에게, 자신의 과거에게, 못다 한 이별을 고하는 의식을 말이죠."
서성이던 발걸음에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입니다. 스트라스부르를 떠나는 이오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습니다. 알함브라 궁전과 이별한 무함마드 12세처럼 가상의 궁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잊지 못한 추억 속에 잠겨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시름시름 앓으며 하루하루 죽어가는 일을 많은 이들이 하고 있고, 그것도 역시 인생의 한 방식임을 죽어간 많은 이들이 증명해 왔으니까요. 그러나 그러면 삶은 그 장면에서 멈추어 버립니다. 정지화면만을 송출하는 모니터 속에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니 남은 생뿐만 아니라 다음 생, 그다음 생 역시 정지화면의 연속일 뿐입니다.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되지 않는 모니터는 지지직거리는 정지화면외에는 내보낼 것이 없으니까요. 이오는 타임머신을 타고 2017년, 그때로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서쪽으로, 바다로, 새로운 인연, 새로운 친구, 새로운 추억, 새로운 감상들을 가득 채우며 거슬러 올라 온 것입니다. 아픈 기억을 상쇄시킬 새로운 기억과 즐거운 추억들을 가슴 가득 채우며 거슬러 올라 온 것입니다. 아픔의 기억과 새로운 추억의 무게는 이오의 마음의 저울에 달아보아야 알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도 대신 측정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저울이 프라하에 있습니다. 그 마음의 저울에 달아 본 무게에 따라, 이오는 발걸음을 가볍게 하거나, 여전히 마음을 짓누르는 무게감 속에 발걸음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프라하는 아픈 과거의 마무리이자, 새로운 미래의 시작점입니다. 그의 연인 H가 그곳에서 새로운 생으로 나아갔듯이, 갈라진 길에 이미 들어서 버린 이오도 역시 안녕을 고하고 이미 선택한 자신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프라하, 안녕..
이오는 그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대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