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說 스팀시티 영웅전] 82. 초이스 블루 (Choice Blue)

in #stimcity4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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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후 우울증



운명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오의 행보는 밝고 경쾌했습니다. 출발은 몇 개월 뒤로 정해졌고, 남은 몇 개월은 이제 시작될 위대한 여정을 위한 준비의 시간으로 촉박하게 느껴졌습니다. 일정표를 짜고, 크루즈 스케쥴을 최대한 알아보고, 최적의 경로와 적절한 크루즈 선택을 위해 꼼꼼하게 관련 정보를 체크했습니다. 낯선 여행입니다. 크루즈 여행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은 한국적 상황에서 모든 것이 낯설고 정보가 부족했지만, 선택의 무거운 과정을 통과한 이오에게는 그 모든 것이 흥미롭고 즐거운 과정으로 느껴졌습니다.



"한국에 아직 크루즈 여행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지만, 이제 막 관심이 싹 트고 있는 시기이도 하고, 또 매스컴에서도 하나둘 크루즈 관련 프로그램들이 나오고 있던 상황이었어요. 이오는 이를 잘 활용하면 크루즈 여행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접근들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다양한 시도를 모색했어요. 관심이 있을 만한 기업, 단체, 관련 업계에 코웤 및 홍보, 협찬을 제안할 제안서도 만들고, 컨택리스트도 만들어서 메일도 보내고 제안도 했어요. 이미 라다크에서의 카페 창업기도 책으로 만들어 본 경험이 있기에, 크루즈 여행을 통해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 볼 수 있겠다는 확신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죠."



그러나 현실은 좀처럼 핑크빛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선택의 확신은 현실을 뒤집을 것 같지만, 오히려 현실은 선택의 진정성을 확인하려는 듯 빡빡하고 엄혹하고 냉정한 반응만을 보이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반응 없는 제안은 조금씩 사람을 지치게 하고, 흥분에 찼던 계획은 점점 두려움과 막막함으로 장벽처럼 마음을 둘러싸는 것입니다.



"초이스 블루(Choice Blue), 선택 이후 결심의 흥분이 가라앉으며 밀려드는 우울증. 마법의 용어인데, 누군가 자신의 운명을 바꿀만한 선택을 하고는, 막상 그것을 실행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의심과 회의, 번복과 취소의 갈등이 밀려오는 시기를 말해요. 그래서 선택 이후의 행동, 착수는 빠를수록 좋아요. 준비 기간과 공백이 길어지면 마음에는 어느새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또아리를 틀기 시작하면서, 의심과 두려움이 자신감을 잠식해 가고 번민의 나날들을 반복하다, 마침내 취소와 번복의 악수를 두게 만들죠. [스팀시티]가 지구행진을 선택한 라총수에게 45일이라는 짧은 준비 기간과 방향, 체류 조건 등을 까다롭게 지정한 이유는, 그러한 초이스 블루를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였어요. 사람들은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불안해하거든요."



그러나 이오의 여정은 남들이 해보지 않은 새로운 여정입니다. 크루즈를 타고 서쪽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거슬러 가는 여정은, 좀처럼 선례를 찾아보기 쉽지 않은 여행인 것입니다. 두려움이 타고 들려면 얼마든지 들 수가 있습니다. 복잡하고 낯설다는 이유를 대자면 취소하고 번복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신감을 잠식당한 마음이 핑계를 찾으려면 산처럼 많은 핑계를 댈 수도 있습니다. 가족들의 반대와 진로, 기회비용 상의 문제, 혼자 하는 여행, 바다 여행의 위험성. 하자고 들면 타이타닉의 예를 들어가면서까지 마음을 흔들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음.. 잠식을 방치하면 걷잡을 수 없게 돼요. 차라리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 놓이면 오히려 사람들은 해결책을 찾는데, 해볼 만 하거나, 반대가 없는 상황에 놓이면, 오히려 갈등에 빠져 버리고는 합니다. 다들 하지 말라고 할 때는 그렇게 하고 싶다가, 아무도 반대하지 않고 심지어 권유하는 일에는 마음이 식어버리기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선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발력이 필요해요. 선택의 방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지지해주는 반발력, 그것은 불편해 보여도 오히려 선택을 견고하게 지지해주는 버팀목이 되어주는 경우가 많아요. 대부분의 경우는 그것이 재정 부족인데, 오히려 이오의 여정은 그러한 반발력조차 해소된 상태였어요. 이오의 여행경비는 이미 라총수의 여행경비에서 재투자되기로 결정되어 있었으니까요. 돈 없어서 못 가겠다는 핑계도 댈 수 없는 상황이었죠. 특이한 상황이죠?"



돈이 없어 못 가게 될 때, 무언가를 재정부족의 이유로 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더더욱 가고 싶고, 더더욱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막상 그 돈이 생기면 본전 생각이 나고, 이걸 다른 데 쓰면 어떨까? 마음이 흔들리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선택은 본인이 하는 것이고, 번복도 본인의 의지에 달린 일입니다. 선택을 대신해 줄 수없는 것처럼, 번복도 막아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오는 풍족하지는 않지만, 필요한 경비를 이미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라총수에게 마련된 여행경비에서, 약속대로 이오의 새 프로젝트인 '크루즈 여행'에 투자하기로 결정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들떠있던 선택의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텐션이 점점 떨어져 가고,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만 같던 각종 제안과 협력 프로젝트들은 기약 없이 늘어지고 있었습니다. 초이스 블루가 마구 밀려드는 시점으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어쩔까요? 물론 이오가 선택을 번복했을 리는 없었을 겁니다. 이제까지의 그의 삶의 행보를 보면, 이미 약속된 일을 스스로 거두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이오는 본인이 말했듯이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어요. 상실의 시대를 지나오며 마음이 텅 비어버려서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어요. 활력이 넘치는 때라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깊은 우울에 이미 빠져든 상황에서 다시 힘을 내는 데에는, 새로운 전기가 필요해 보였어요. 어떤 반발력이라도.. 그런데 그때 [스팀시티]로부터 강력한 특단의 조치가 내려왔죠. 근데 그게 참.."



반발력, 반발심



[스팀시티]의 강력한 특단의 조치는 이오와 라총수의 일시적 단절이었습니다. 그것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조치였습니다. 라총수는 일본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다음 남미 일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잠시 한국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고, 이오는 한두 달 뒤 시작될 여정을 준비하고 있는 막바지였습니다. 이오는 얼마 남아있지 않던 에너지를 거의 소진하여 우울 모드로 접어들고 있었고, 라총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두 사람의 여행에 모두 영향을 줄 위기의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오의 초이스 블루가 깊어지면 라총수도 친구로서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죠. 그렇다고 분리된 여행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어요. 언제나 함께였던 두 사람이 이렇게 분리되어 각자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도 새로운 일이었고, 낯선 상황이었죠. 이제까지는 주로 라총수가 일을 주도하고, 이오는 서포트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 두 사람의 익숙한 호흡이었어요. 그런데 모든 것을 스스로 주도하고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이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 같아요. 안타까운 상황이었지만, [스팀시티]는 기존의 역할 구도를 깨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어요. 새로운 도전에 임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의 역할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주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러려면 이오와 라총수 모두의 홀로서기가 필요한 상황이었죠. 이전까지의 관계 패턴, 역할 패턴을 깨고 새로워져야 할 시점이었어요. 그것은 이미 예언되어 있었죠. 라총수가 떠나기 전, 풍총수의 타로에서 나왔던 그 컵 말이에요. 컵을 깨지 않고서는 다음 세계로 나아갈 수 없다던.."


이 아홉개는, 나인 홀컵스는, 이제 다음 세계로 가는, 그 풍요 속에서 다음 세계로 간다 이런 건대, 이 컵을 하나도 깨지 않고 저 득도한 이 불상이 있는 위치로까지 가는 건 불가능해요.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그렇게 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여행을 통해서, 이 여행 자체에서 라총수님이 이제 자기를 던져 버리고..

_ 풍총수의 타로해석



컵은 깨어져야 합니다. 만다라가 부숴졌듯이 말입니다. 라총수의 아홉 개의 컵은, 이제까지 라총수가 이루었던 모든 관계와 업적, 경험과 지식, 신념과 생각을 모두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를 지금 깨뜨려야 한다고 [스팀시티]는 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깨어져야 할 컵은 이오와의 관계였습니다. 아니 기존의 방식과 역할인 것입니다. 이제는 이오 역시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자기 프로젝트의 책임자로서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주도적으로 실행해야 할 때가 이른 것입니다. 이오는 물러서지 않고 용기 있게 선택했고 이제 나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초이스 블루의 상황도 자신의 힘으로 극복하고 떨쳐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법사는 [스팀시티]의 어려운 명을 전달해야 했습니다.


"두 분은 이오의 여정이 시작될 때까지 소통할 수 없습니다. 만남은 물론이고 전화와 문자, 카톡, 메일 무엇도 안됩니다."



"라총수는 무슨 소리냐며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어 했어요. 하지만, [스팀시티]로부터 전해 온 직관과 타로카드의 예언을 설명하자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요. 라총수는 직관의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이것은 마법사의 말도, [스팀시티]의 명령도 아닙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새롭게 전환될 절체절명의 타이밍이라는 걸, 그도 이오도 명확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것은 이미 오랜 해묵은 문제였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오가 과거에 남겨두고 온 마음 없이, 버텨내야 했던 시간을 이제 끝마쳐야 할,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서로 알고 있었습니다. 계기가 필요했을 뿐.."



두 사람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불같이 화를 내며 마법사에게 꺼져버리라고 했을까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지으며 떠나버리고는 단절은 마법사의 몫이 되었을까요? 그런 일은 마법사의 일상이고 여기 스팀잇에서도 그러한 단절이 여러 번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법사의 몫이 아닙니다. 단절 역시 당사자의 선택이고 마법사는 그것을 존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이번 생은 여기까지라는 당사자의 선택을 존중하여, 마법사 역시 뒤로 물러나 다음 생을 기약하는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다음 생이 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전 생에도 그들은 그랬습니다. 다시 한번 이번 생에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을 뿐입니다. 아무도 선택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번복 역시 당사자의 온전한 몫인 것입니다.



반발력은 반발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반발심의 방향에 따라 우주는 분리되기도 하고, 분리되었다 다시 합쳐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반발심이 타인으로 향할 때는 분노와 복수심이 불타오르고, 이것은 결과와 상관없이 이별과 분리로 강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반발심이 자기 내면으로 향하게 되면 분노와 복수심이 아닌 의지가 불타오르게 됩니다. 반발심은 자기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어쨌든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자신이고 외부에서는 그저 에너지를 전달해 줄 뿐입니다. 반동을 일으켜 상승할 것인지, 바닥에 처박혀 버릴 것인지는 누구도 대신 결정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이오도, 라총수도, [스팀시티]의 조건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아.. 이것은, 얼마나 엄청난 '수용'입니까? 세상의 어느 누가 도대체 그런 얼토당토않은, 터무니없는 조건을, 폭력적이고 버르장머리 없으며, 싸가지 없고 재수 없는 조건을 '수용'할 수 있을까요? 마법사는 1,000년을 지내오며, 그런 일고의 반발도 없는 '수용'을 본 적이 드물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스팀시티]의 역사에 길이 남을 가장 위대한 '수용'인 것입니다.



"마법사도 놀랐어요. 말을 전달하자마자, 내 그럴 줄 알았다, 어디 마법사 나부랭이가 남의 관계에 간섭하고 지랄이야! 욕을 바가지로 먹고 팽개쳐지지 않음 다행인 거예요. 아니 대부분 그랬죠. [스팀시티]의 과정에서도, 마법사는 그보다 훨씬 상식적인 상황에서도, 단지 직관을 따랐다는 이유로 사기꾼, 정신병자 소리를 듣고 배척당해 왔어요. 물론 모두 이해합니다. 21세기에 직관이고 마법이고 다 무슨 개소리겠어요. 하지만 이 21세기는 사람이 우주로 날아가고, 인공지능 로봇이 인류를 위협할지 모르며, 평행우주와 다차원의 세계로까지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고 있는 시대예요. 여전히 평면지구를 신봉하는 이들이 존재하듯, 마법의 세계와 직관의 언어를 이해하는 영혼의 기사들이 함께 공존하는 시대이기도 하죠. 마법사는 그러므로 직관의 언어로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보편과 초월이 공존하는 시대에서 어떤 이가 영혼의 기사인지 알아보려면, 직관의 언어를 말해보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거든요. 배척하는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우주에 거할 자유를 존중하고, 수용하고 반응하는 이들과 함께 미래를 향해 가면 될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에는 선악도, 윤리도, 도덕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선택이 있을 뿐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들이 듣고, 용기 있는 자들이 따를 뿐입니다. 나는 마법사고 직관을 전달할 뿐이에요. 직관을 전달했다는 이유로 당하는 배척은.. 어차피 뭔 짓을 해도 그럴 사람인 거예요. 그런 건 그저 '실례했습니다.' 하고 지나가면 되는 일이죠. 그렇게 마음먹지 않으면 이 짓 못 합니다. 아무나 마법사가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역시 아무나 총수 하는 것도 아니더군요. 게다가 총수의 친구도 역시.. 그건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워낙 드문 일이라.."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라총수와 이오는 [스팀시티]의 조건을 '수용'하고 일절 모든 연락을 끊었습니다. 시한은 물론 이오의 여정이 시작될 때까지였고, 그것을 일절의 항변도 없이 수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두 사람이 괜히 그것을 수용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단절을 중단시키는 마법을 부릴 줄 아는 마녀(?)였나 봅니다. 마법의 세계를 이해하는, 매우 소수만이 부릴 줄 아는 차원 이동의 기술로 마법을 해제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연한(?) 재회'입니다.



우연한 재회



"그러니까, 연락을 단절하고 얼마가 지나지도 않았어요. 일주일이 지났나? 열흘이 됐나? 라총수와 마법사가 어느 카페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누가 카페 문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누구였냐구요? 으아아아악! 이오요! 이오였어요. 아니 세상에.. 심지어 그는 우리를 발견하지도 못했어요. 우리가 부를 때까지. 우연히 만난 거죠. 우연히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서 재회하게 된 거예요."



우연한 재회, 이것은 마법의 규칙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마법의 규칙을 따르자면 분리된 관계는 만나 지지 않습니다. 한동네, 옆집에 살아도 만나 지지 않습니다. 마법의 직관에 의해 단절된 관계는 수많은 생을 거쳐도 잘 만나 지지 않습니다. 단절이란 결국 서로의 우주가 분리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것은 같은 공간에 있어도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가까이 있으면서도 좀처럼 마주쳐지지 않기도 합니다. 물론 3차원의 시공간 개념으로는 지구 상 어딘가 같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3차원을 넘어 중첩된 시공간으로 개념을 확장시키면 우리는 같은 시공간에 머물고 있는 게 아닙니다. 같은 시간대를 살고 있어도 우리는 서로 다른 우주로 분리되어 있고,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영혼의 차원으로까지 생각을 끌어올리면, 마주 앉아 있어도 서로 다른 우주에 머물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물며 물리적으로 만날 수 없게 된 관계는 분리된 우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는 약속을 하고 만나도 어긋납니다. 같은 자리에 등지고 서서 서로의 위치를 전화로 확인해도, 만나지 못하고 어긋납니다. 그래서 단절을 중단시키는 예외의 경우는 '우연한 재회'입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분리된 관계가 하나의 우주로 다시 합쳐졌다는 명징한 싸인입니다.



"처음에는 너무 놀라서 두 사람이 짜고 날 속이고 있는 건가 싶었어요. 하지만 이오가 엄청난 연기력을 발휘한 게 아니라면(학창시절에 연극반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정말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다른 자리에 앉으려 하고 있었어요. 게다가 라총수도 갑작스런 이오의 등장에 깜짝 놀라고 있었죠. 두 사람이 짠 거라면 마법사 몰래 만났겠죠. 굳이 마법사가 있는 자리에 나타날 이유가 없는 거죠. 그리고 결정적으로다가, 우연한 재회가 일어나면 단절이 풀린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거든요. 그건 마법사들만 아는 규칙이니까. 그 순간 모두가 당황했지만, 마법사는 직관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죠. 아.. 마법이 풀어졌구나. 이오가 분리되지 않으려 라총수를 찾고 찾았구나. [스팀시티]의 우주를 붙들었구나.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놀라서 잠시 정신이 나가 있었어요. 마법사니까, 멋진 척은 해야 하니까, 당황하지 않은 척, 자연스러운 척, 다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이 있었지만.. 음, 그러고 보니 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이 아니라 마법사였네요. 하하하 나도 연극반 출신이긴 합니다."



단절의 상황은 각자가 해소할 수 있습니다. 해결해야 할 삶의 조건들을 해결하고 나면, 운명은 다시 서로를 끌어당깁니다. 어차피 단절되고 분리되었다는 것은 서로가 다른 우주에 머물기 시작했다는 얘기이니, 만나려고 해도 만나 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가 같은 운명의 경로에 들어서면, 약속하지도, 미리 정하지도 않았는데, 마법처럼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법의 규칙은 단절된 관계 사이에 우연한 재회가 일어나면, 그 조건이 해소되었다고 간주합니다. 이오와 라총수 사이의 단절이 그렇게 해소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오의 의지였을 거예요. 이 상황, 단절에까지 이르고 있는 이 상황을, 더 이상 가만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강렬한 염원이, 라총수가 머물고 있는 우주로 이오를 이끌었던 것이죠. 참으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마법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1,000년을 마법사 노릇을 했어도, 그런 경우를 보는 일은 흔치 않거든요. 이오님~ 멋져 부러! 짝짝짝!!!"


'가슴이 울렁이고 자꾸 초조해지며 우울하다.'
'몸도 마음도 답답하고 자꾸 한숨이 난다.'

여행, 특히 긴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내가 반복적으로 겪는 증상이다. 준비할 것은 많은데 끝까지 미루다가 전날 밤에야 가까스로 짐을 싸고 밤을 새우고 공항으로 향하기 일쑤고, 이번에도 그랬다. 이런 증상을 내 주변 사람들도 공통적으로 겪는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는데 특히 최근에 결혼식을 마치고 몇 주 뒤에 긴 신혼여행을 떠난 친구 역시 이런 감정을 느꼈다는 이야기에 이건 하나의 공통적인 현상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가장 들뜨고 행복한 것이 마땅한 신혼여행을 앞두고조차 이런 감정을 느낀다면 그게 보편적인 게 아니고 뭐란 말인가!

즐겁지 않고 떠나기 싫은 느낌. 긴 여행을 가기 전 이 복잡한 감정에 이름을 붙이자면 ‘트래블 블루’가 좋을 것 같다. 눈치챘겠지만 ‘메리지 블루’에서 따왔는데 스스로 선택하고 준비해온 큰 결정인데 두려운 것도, 그것이 삶을 꽤나 바꿀 거라는 것도 닮아있으니까. 이건 여행에서 혼자라 짊어질게 될 외로움이나 우울의 감정과도 결이 달라서 친구와 같이 떠날 때도 늘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곤 했다. 그 이유를 더듬더듬 풀어본다면 어떤 낯선 모양의 곳에서 어떤 낯선 사건이 나를 어떻게 덮칠지 모르는 불확실함과 내가 오랫동안 비운 자리를 보며 아무도 나를 떠올리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이 뒤엉킨 게 아닐까?

_ [월드 크루즈 투어] 인투더크루즈홀 / 이오



이오의 '초이스 블루'는 그의 강렬한 염원으로 인해 우연한 재회로 해소되었으나, 그 이후에도, 그의 고질적인 '트래블 블루'로 전환되어 꽤나 질척거렸나 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블루를 해결하는 다섯 글자, 마법의 감탄사를 우리는 라총수에게서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시발몰라'



그리고 결국, 상하이발 운명의 크루즈에 올라탄 이오의 입에서 나온 감탄사는,


‘우와 신기해, 와 진짜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야. 우와 우와 졸라 신기해!’

_ [월드 크루즈 투어] 인투더크루즈홀 / 이오



였습니다.



"초이스 블루를 해소하는 방법을 알려 드리지요. 그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바로 하는' 것입니다. '그냥 하는' 것입니다. 하기로 했으면 그냥 바로 하는 겁니다. 학창시절에 모두 경험했듯이, 정답은 언제나 처음 했던 생각입니다. 취소와 번복이 정답이 되는 경우는 야식 주문뿐입니다. 그러니 예비동작, 준비동작을 생략하거나 최소화하고, 일단 시작하고 보는 겁니다. 하기 전에는 세상이 다 무너질 것 같지만, 막상 해보면 별 거 아닙니다. 인생 뭐 별거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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