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어느 겨울날 재주소년을 듣다가 흘렸던 눈물을 기억하기 위해

in #stimcitylast year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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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홈피 다이어리 20051221
특이사항 : 맨날 움
이유 : 모름


최근에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읽었다. 작가는 책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이 공간, 우리 신경들의 연결 속 기억의 흔적들에 의해 펼쳐진 초원이다. 우리는 기억이다. 우리는 추억이다.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갈망이다. 기억과 예측을 통해 이런 식으로 펼쳐진 공간이 시간이다. 때로는 고뇌의 근원이지만, 결국은 엄청난 선물이다.


시간에 끌려다니지도 시간과 마주 서지도 않지만, 나는 늘 시간에 사로잡혀 있다. 흐르는 시간을 느끼며 시간의 모양을 생각한다. 처음과 끝이 없는 긴 실처럼 생겼을 거라고 생각하다가, 씨실과 날실이 드나들며 이룬 직물처럼 수많은 시간이 엮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가, 포개진 문서 더미의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간 날카로운 핀처럼 중첩된 모든 시간 속에 동시에 존재하는 나를 생각하다가.

뿌연 창문을 닦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 그러다 창밖 풍경을 어렴풋이 본 것 같아서 시간의 모양을 가늠하는 일을 멈추기로 했다. 그건 매끈한 곡선을 두어 개 이어 그려놓고 그걸 산의 모양이라고 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산을 충분히 멀리서 바라볼 때야 산의 모양이, 하늘과의 경계가, 제법 분명해 보이는 선이, 눈에 들어온다. 풍경으로부터 충분한 거리를 확보해야 산과 강을, 바다와 호수를 담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 경계선은 여전히 산의 모양이 아니다. 산의 본질은 더더욱 아니다. 산에 관한 이야기는 옛날 옛적 미니홈피 다이어리에 썼던 것인데 얼마 전에 발견했다. 나는 이미 시간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산을 멀리서 바라보는 수준으로 어설프게 세계를 인식하기 때문에 시간이 흐른다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순서대로 존재한다고 '느끼고' 있을 뿐이다. 다만 기억하기 때문에 시간을 느낀다.


무슨 개똥 같은 소리냐 싶겠지만,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서 온 마음을 다해 진지하다. 최근에 싸이월드가 시간 속에 스며든 나의 기억을 통째로 없는 셈 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억하는 수고를 더는 대신 그곳에 너무 많은 흔적들을 남겨두어서 허투루 둘 수 없었다. 사실 디지털카메라 덕분에 미니홈피가 온 국민의 앨범과 일기장이 되어 가던 때부터 내 기억력은 서서히 퇴화했다. 기술의 진보로 인간은 가진 능력을 꾸준히 기술에 양보하는 (때로는 잃는) 중인지도 모른다. 구글맵 없이 낯선 도시의 거리를 서성인다는 것은 이제 상상도 못 할 일이니 말이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뿌시던 날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뇌의 신경망을 컴퓨터와 연결해서 학습 정보를 입력하면 순식간에 10개 국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있음은 물론 생전 춰보지 않은 춤도 출 수 있다고 한다. AI가 대신 무엇이든 학습해줄 것이다. VR 세계에서 밥도 먹고, 여행도 가고, 섹스도 하고, 죽음도 그곳에서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감각과 기억에 대한 정보를 클라우드에 저장해서 인간의 의식을 이식하는 영혼의 Copy & Paste 도 그렇게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게 결정적이다. 나라는 인간이 보낸 20대가, 10년 동안 내게서 나온 모든 생각과 느낌에 대한 방대한 양의 데이터가, 그곳 미니홈피에, 그 공간에, 쌓여있다. 그걸 없는 셈 칠 수는 없다. 미니홈피 클라우드에서 20대 나의 의식을 고스란히 불러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기억을 게을리했으니 책임을 좀 물어야겠다. 미니홈피는 그냥 앨범과 일기장이 아니다. 기억이 곧 나라는 증거다. 그래서 싸이월드가 서비스를 지속하든 600억 원에 팔려나가든 600만 원에 팔려나가든 상관없이 미니홈피를 최대한 그 모습 그대로 저장하여 내가 가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아이디랑 비밀번호를 갖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아스타리아가 방법을 찾아냈다. 리플릿이 열쇠다. 사진과 다이어리는 물론, 내 일촌들과 주고받았던 댓글들, 도토리 털어서 샀던 주크박스의 음악들, 내 방보다 더 열심히 꾸몄던 미니룸까지, 다 불러내어 저장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여전히 AI니 VR이니 하는 것들에 거부감이 든다. 시리든 기가지니든 영 마뜩잖고 걔들에게 작은 부탁 하나 해본 적 없다. 소피아양의 얼굴은 여전히 꿈에서 볼까 두렵다. 그러고 보면 기계를 때려 부수던 노동자들의 마음은 분노보다 공포였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기술은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방하기 위해 진보한다고 믿는다. 인간의 '시간'을 이해하려는 리플릿과 같은 기술도 세상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쓰다 보니 지나치게 심오해졌지만, 이건 본격적으로 미니홈피 백업을 장려하는 글이다. 아스타리아를 응원하는 글이다. 리플릿이 내 미니홈피를 구해주겠다고 나섰으니 지켜볼 일이다. 함께 지켜보고, 응원하고, 소문도 내주시길. 분명 그다음에 무언가 또 기다리고 있을 테니.

리플릿의 첫번째 도전, <구해줘 미니홈즈> 텀블벅 펀딩 후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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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 지워버렸어요. 싸이월드도, 페이스북도, 다른 블로그도.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아서 그 곳에 남아있던 그림의 흔적들이 한번씩 아쉽긴 해요. 글도 몇개 그리운 것들이 있구요. 하지만,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지도 않은 저에게 기억이 흐릿한 것들은, 물리적으로 저장해 둔 것을 꺼내가며 유지해야 할 정도로 대단한 기억은 아닌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림도 그리고 연주도 하고 글도 쓰고 김리님은 창문이 세 개나 있네요. 글 많이 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