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시티 프리퀄] 음란한 소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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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한 소시지

+ Lutherstadt Wittenberg, Germany



베를린으로 가는 길에 비텐베르크에 들렸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도시라고 하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도시의 공식 명칭이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 (Lutherstadt Wittenberg)’ 이네요. 이 도시에서의 루터의 위상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어련하겠습니까? 인류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고 사건인데요.

 


이번 여행은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자연스럽게 종교개혁자들의 발자취를 쫓는 여행이 되어버렸어. 비텐베르크도 베를린 근처가 아니었다면 들릴 생각을 못했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이건 우연의 일치인지? 계시인지? 올해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였던 거야.

 
그렇습니다. 올해는(2017년)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 부설 교회 정문에, 그 유명한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며 시작된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멀린 일행은 그것도 모르고 비텐베르크에 들렸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방문한 당일이 루터의 결혼기념 축제가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도시가 떠들썩하더라고, 여기저기 전통의상 입은 사람들이 막 지나다니고, 각종 장터와 공연, 행사가 벌어지고 있는 거야. 우리는 그날이 토요일이어서 주말 행사를 하나 했는데, 알고 보니 매년 루터의 결혼기념일(6월 13일) 경에 열린다는 ‘루터의 결혼기념 축제’였던 거야.

 
공교롭게도 6월 13일은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날과 일치합니다. 루터가 의도하고 날을 잡았는지는 모르지만, 사실 기독교의 공인만큼 루터의 결혼은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중세 기독교에서 금기시하던 신의 여성성을 공식적으로 교회 내부로 끌어들인 엄청난 사건이었으니까요.

 


생각해 봐. 신의 여성성을 억압하느라 마녀사냥을 해댄 기독교였어. 그리고 그 상징이 사제의 독신주의였다고. 게다가 루터의 아내가 된 카타리나는 수녀였어. 이게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이야. 지금으로 치면 목사가 공식적으로 동성 결혼을 한 것만큼의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루터의 아내가 된 카타리나는 실은 종신서원을 서약한 수녀였습니다. 그녀가 루터의 아내가 된 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성직자가 독신을 통해 육체의 거룩한 제의를 걸친다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영혼에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니며, 기도와 금식을 통해 선행을 행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영혼에 유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경건과 자유를 얻게 하는 것은 다른 것임에 틀림없다. _ 마틴 루터

 
루터의 개혁적인 메시지들에 크게 감동한 카타리나는, 수녀원을 탈출할 결심을 하고 주위의 수녀들을 설득합니다. 그리고는 루터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자신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이죠. 그런데 당시의 교회법으로는 수녀원을 탈출하다 잡히거나, 도와준 사람 모두 사형에 처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루터는 결심을 하고, 1523년 4월 6일 부활절 밤, 카타리나와 12명의 수녀들을 청어통에 몰래 숨겨 탈출시키게 됩니다. 루터는 탈출한 수녀들의 장래와 생계를 위해 짝을 지어주고 결혼을 시켜 주었는데, 카타리나는 루터와의 결혼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단 자신은 독신 서약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 했고, 결혼으로 인해 야기될 사회적 비판과 로마교회와의 싸움, 그리고 지지자들의 동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비난은 실로 대단했지. 결혼 계획이 발표되자, 한순간 ‘세기의 스캔들’로 떠올랐어. 사실 지금도 신부랑 수녀랑 결혼한다고 하면 말들이 많을 텐데 어땠겠어. 그 당시에 말이야. “수도승과 그의 연인이 한자리에서 나뒹구니, 적그리스도가 태어나리, 웃을 일은 아니리.” 이런 노래가 불려질 정도였어.

 
‘호색적인 배교자’, ‘혼인도 하기 전에 동거한 작은 쥐새끼 하녀’, ‘신과의 언약을 저버린 채 육체적 욕망을 채우려는 음란한 자들’ 심지어 ‘유토피아’의 저자 토마스 모어는 ‘루터가 부끄러움도 없이 한 수녀와 근친상간의 색정에 빠졌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신에게 헌신한 영적 남매로서 둘의 결혼은 근친상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루터는 ‘만일 결혼이라는 것이 없다면 세상은 황폐해지고, 모든 피조물이 無로 돌아가며 하나님의 창조도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며 1525년 6월 13일 카타리나와의 결혼을 강행했습니다.

 


사실 루터뿐만 아니라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도 세 명의 아이를 둔 과부와 동거를 하고 있었어. 그 역시 아내를 둔 다른 10명의 사제와 함께, 성직자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교회에 청원을 했다가 거절당하자, 1522년 결혼을 강행했지. 루터보다 3년이 빨랐어. 하지만 당시의 시대 분위기는 교회 지도자들의 타락이 절정으로 달해 있던 때라, 교리상으로는 사제의 결혼을 금지하면서도 공공연히 아내와 정부를 두고, 심지어 그들의 생활비를 공식적으로 교회에서 지급받기도 했어. 눈 가리고 아웅인 상황이었지. 이에 종교개혁자들은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하고, 사제의 결혼을 공식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거야.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사제의 결혼을 공식화한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여성의 지위가 교회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된 것입니다. (사모라는 지위로 국한되었으나) 감추어지고 억압되었던 신의 여성성이 공식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중세의 마녀사냥은 신의 여성성을 억압함으로써, 신의 여성성의 그림자인 ‘마녀’를 필요로 하게 되었어. 의식의 균형을 위해, 강력한 선善인 ‘신의 남성성’에 대항하는, 강력한 악惡으로서의 ‘신의 여성성의 화신’이 필요했던 거지. 그 결과는 모두 알다시피 매우 참혹한 것이었어. 그럼에도 있는 것을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거야. 루터의 결혼은 그런 신의 여성성을 공식적으로 교회 내에 복원시킴으로, 더 이상 ‘마녀’로서의 신의 여성성의 그림자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지. 억압하지 않고 그 기능을 인정함으로써 신교가 시작되었고, 이러한 신교의 정신은 매우 빠르게 사회를 개혁하게 되었지.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가정의 역할이 바뀌며 시장 경제 형성을 이끌었다. 결혼을 인구 유지 수단으로 여기고 부부간 사랑도 금기로 묶었던 중세 교회와 달리, 루터 이후 가족이 중요한 사회 단위로 자리 잡았다. 서구에서 핵가족은 사회의 중심이 되고 지방 분권적인 통치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경제의 주축으로 떠올랐다. 영적 생활과 경제적 활동이 분리되던 과거와 달리, 생산과 가족이라는 세속적 세계관 속에서 자본주의가 싹텄다. 루터의 결혼 사건은 인간의 성적 욕구 충족과 금욕 차원을 떠나 경제사에서도 전환점이었던 셈이다.
 
_ 김성룡 연구논문, 《종교 개혁과 가정의 의미 제고》

 


‘여성의 영혼 유무를 논할 만큼, 여성의 지위가 동물과 같았던 당시의 기독교 세계관에서, 사제의 독신주의 철폐는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 역사에서 보듯이 가정의 실질적 주체이자, 남자의 숨은 권력자로서 여성의 역할은, 거의 지배적이라고 봐도 좋아. 권력자들 뒷편의 여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더 막강하니까. 루터와 카타리나도 예외는 아니었어. 루터의 개혁을 채찍질 한 건 카타리나였으니까.

 
카타리나는 매우 강한 여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생계의 모든 것을 책임지며 가정을 이끌어 갔습니다. 집안일은 모두 그녀의 몫이었으며, 또한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생계에서 닭과 돼지를 치고, 야채를 기르며 집안일을 돌보았고, 또한 수녀원에서 배운 양조기술로 맥주를 담가 수입을 얻었습니다. 카타리나는 생활력이 매우 강한 아내였으며, 또한 이재에도 밝아 어려운 살림에도 돈을 모아 땅을 사들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루터의 종교개혁 작업에 열정적으로 헌신했을 뿐만 아니라, 남편이 의지가 약해지거나 좌절하지 않도록 독려하였습니다.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루터가 문제에 부딪혀 좌절해 있자 카타리나가 상복을 입고 나타났다고 합니다. 루터가 왜 갑자기 상복을 입었냐고 묻자 카타리나는 “당신이 좌절해 있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돌아가신 게 분명한 것 같아요.”라고 하며 루터를 몰아붙였다고 합니다.

 


루터를 몰아붙인 게 맞아. 아마도 루터는, 카타리나가 아니었으면 종교개혁 작업을 계속 지속할 수 없었을지도 몰라. 개혁이 중단되고 원점으로 돌아가면 자신들의 선택이 어떻게 되겠어? 신성모독의 화신이 되고, 카타리나 자신은 마녀로 끌려가 화형을 당했을지도 몰라. 멈출 수 없는 선택이었지.
 
루터는 신혼 때는 카타리나를 ‘도미나(Domina)’, ‘나의 아내’라고 부르다, 나중에는 ‘나의 주인’이라는 뜻의 ‘도미누스(Dominus)’라고 불렀대. 심지어 카타리나의 애칭도 ‘캐티’에서 종종 ‘케테(Katie, 사슬)’로 바꿔 불렀다고 해. ‘내가 악마와의 싸움을 견딜 수 있다면 케테의 짜증도 견딜 수 있겠지.’라며 힘겨워 하기도 했어. 하지만 사랑은 변치 않아서 ‘케티는 베네치아와도 바꿀 수 없다.’고 애정을 포현하기도 했대. 내 생각에는 루터도 그렇고, 츠빙글리도 그렇고, 결국 사랑을 이루고 사랑을 보장받기 위해서 종교개혁에 헌신하게 된 거 같아. 사랑의 힘이 그렇게 위대하지. 그들 모두 목숨을 건 도전이었다구.

 
루터는 카타리나를 수녀원에서 구출하기 위해 사형을 각오하고 목숨을 걸었습니다. 츠빙글리 또한 그 모든 종교개혁의 이면에 자신의 사랑을 실현하고자 하는 동력이 숨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겉으로 이런저런 명분을 내세우긴 하지만, 결국 그것들을 실현시키기 위한 동력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아니 사랑에서 비롯된 게 아니면 그냥 반짝이고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멀린 그거 아세요? 핵융합이 핵분열보다 훨씬 더 에너지가 크게 발생한다는 사실 말이에요.”

 
한스는 여행 중에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며, 핵융합이 핵분열보다 에너지가 더 크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융합하려면 먼저 분열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신의 여성성을 분열시켰다가,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용기와 헌신으로 말미암아 신의 여성성과의 융합을 일으켰습니다. 물론 이에는 목숨을 건 도전이 있었습니다. 신부와 수녀가 결혼하기와 같은.. 그러나 그 융합의 에너지는 너무도 커서 인류사 전체를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영혼이 없는 동물 취급을 받다 가정의 리더로 복귀한 여성들은, 서구사회에 가부장적 질서를 빠르게 무너뜨리고 그 자리를 자본주의로 대체하였습니다. 이 에너지의 파고는 유럽 대륙을 넘어 아메리카 대륙, 나아가 아프리카 대륙까지 접수하고는 아시아의 한국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유례없는 개신교 부흥의 역사를 이룩하고는, 그 열매인 자본주의의 산업부흥의 결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부유해지고 풍요로워졌습니다. 신의 남성성과 여성성의 결합의 결과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미흡합니다. 이것에는 온전하지 못한 다리가 있습니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을 촉발시킨 결정적 사건 중 하나로 ‘소시지’ 사건이 있어. 사순절 기간에 소시지를 먹었다고 고발당한 거야. 츠빙글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음식의 선택과 자유에 관하여》라는 글을 발표하고 종교개혁의 시동을 걸기 시작하지. 사순절 기간에 왜 소시지를 먹으면 안 되지? 그것은 욕구에 관한 거야. 그것은 본능에 관한 것이지. 욕구와 본능을 죄의식으로 덮으면 사람들은 꼼짝없이 통제 당하게 되는 거야. 절대성의 강력한 무기이지. 핵분열 말이야.
 
종교적 도그마는 사람들의 욕구와 본능을 분열시켜 통제함으로써 에너지를 얻는 거야. 게다가 분열된 에너지는 그림자를 만들기 마련이고, 그림자의 억압은 ‘마녀사냥’과 같은 필연적 작용을 발생시키지. 분열의 에너지는 통제의 수단으로 강력해. 하지만 그렇게 분열되었던 것이 융합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분열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에너지를 발생시키지. 세계 전역을 휩쓸고 지배한 종교개혁의 흐름을 봐봐. 사회 전반에 자유도와 혁신도를 증가시켰어. 그래서 이러한 체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나라들은 신흥 강대국으로 떠올랐고, 그 개혁의 파고에 동참하지 않았던 스페인 같은 나라들은 정체되고 뒤로 밀려났지.

 
스페인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이 종교개혁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성요한, 로욜라의 예수회 등과 같은 카톨릭 내부의 정화 운동으로, 나름 개신교의 개혁적 흐름을 차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도리어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핵융합의 흐름에서 벗어나 도태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신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융합할 기회를 놓친 스페인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초 국가(남성우월주의)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융합의 흐름에 어울리지 않게, 신의 여성성은 아직도 반쪽자리 복원밖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아. 신의 여성성의 복원과 융합의 결과로 탄생한 개신교가 지속적으로 개혁해가지 못하고, 자신들의 전신인 구교적 권력으로 다시 분열하게 된 거야. 그것은 여성성의 지위와도 관련이 있어. 금기로 묶인 여성성의 지위는 개신교에서 핵가족 제도에 도로 묶이게 되지. 그러니까 성性에 대한 금기 말이야.

 
음식에 대한 금기는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먹는 것에 관해서 만큼은 신의 금기를 넘어섰습니다. 그러나 잊으면 안 됩니다. 사순절 기간에 소시지를 먹었다고 지옥에 떨어질 뻔한 시절이 있었다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것에 비견하는 어처구니없는 수준의 금기가 살아있다는 것 말입니다. 권력화하기 시작한 개신교는 적어도 식욕을 금기로 묶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남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性) 말입니다. 성욕에 대한 금기는, 교권자들로 하여금 신도들을 통제하기 위한 참기 어려운 유혹입니다. 다시 돌아가야겠습니다. 목사에서 제사장으로, 교황으로, 말입니다. 달콤하거든요. 어떻게 하겠습니까? 성욕을 핵가족의 울타리에 묶는 것입니다. 그 정도는 개신교 교리로 가능할 것 같아 보입니다.

 


융합은 그 그림자를 포함한 전체성이 핵심이야. 그중 일부를 남겨놓는 것은 온전한 융합이 아니야. 분열의 씨앗이 남아있게 되는 것이지. 모든 금기는 처음에는 그림자를 다루기 위해 생겨나. 경전에 기록된 음식에 대한 금기들은, 대부분 당시의 식습관과 위생환경으로 인해 생겨난 것들이었어. 어떤 맥락 속에서 생겨난 것들이라고. 그러다 맥락은 사라지고 통제 수단으로서의 금기만 남게 되는 것이지. 그게 도그마가 되는 거야.
 
음식에 대한 금기가 교회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비만과 폭식, 음식 쓰레기, 음식으로 인해 생겨나는 질병의 위험들이, 교회의 통제가 아닌 개인의 통제로 권력이 되돌려진다는 것을 의미해. 그림자까지도 포함한 복원인 것이지. 그러니까 신의 여성성의 복원에는 그 그림자에 관한 것까지 함께 복원되어야 한다는 거야. 심지어 동시대의 시각으로 그것이 ‘호색적인 배교자’, ‘혼인도 하기 전에 동거한 작은 쥐새끼 하녀’, ‘신과의 언약을 저버린 채 육체적 욕망을 채우려는 음란한 자들’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말이야.

 
이제는 적어도 사순절에 소시지를 먹는다고 한들, 지옥에 갈 거라고 믿는 신앙인은 없습니다. 너무 먹어서 비만이 되고 고지혈증에 당뇨와 성인병에 걸린다 한들,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지 적어도 죄가 아닙니다. (탐식은 한때 교회에서 정죄했던 7대 죄악 중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식욕의 그림자이지만 더 이상 신앙의 금기에 속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잘 관리해 가야 할 부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성욕에 관련된 어떠한 금기도 개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건강하지 못하거나 과도할 수는 있을지언정, 금기에 속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지옥에 갈 일은 아닌 것입니다. 신의 남성성과 여성성의 융합에는 이러한 그림자 또한 포함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림자를 따로 떼어 놓은 채 삼위만으로 융합을 시도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길거리에서 딸딸이를 치게 되는 거야. 쪽팔리게 시리.. 이젠 간통도 불법이 아닌 시대에, 혼전순결과 자위행위를 신앙의 금기로 섬기다, 성부, 성자, 성령을 합한 만큼 세진 신의 여성성의 그림자가 부지불식간에 덮쳐 그림자를 드러내는 바람에, 온 세상 사람들에게 마녀사냥을 당하게 하는 거야. 신상을 탈탈 털린 채 CCTV에 찍힌 얼굴을 온 세상에 알리고, 어떻게 흔적을 지울 수도 없는 온라인 주홍글씨를 웹 문신으로 새기게 되는 거야.

 
이제는 성性을 금기라고 얘기하기도 무색할 만큼, 다들 알아서들 잘들 하고 다닙니다. 그러나 아직 그것이 우리의 관념 속에서 ‘핵가족’의 울타리에 갇혀 있는 만큼은, 여전히 금기로 작동하고 그림자로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여성들 스스로가 핵가족의 울타리를 걷어내고 싶어 하지 않아서 일지도 모릅니다. 성(性)과 생계, 성(性)과 가족제도를 연계시키는 이상, 신의 여성성과 남성성의 온전한 융합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그 울타리에서 빠져 나오지도 못한 채, 영혼과 마음만을 분열시켜, 그 과정에서 나오는 지독한 방사능으로 자녀들과 다른 가족들을 암에 걸리게 만듭니다. 스스로 가둔 감옥에서 모두 함께 핵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워할 필요 없어. 카타리나가 사형을 두려워하였다면 종교개혁은 없었을 거야. 그냥 잠시 비린내 나는 청어통에 들어갔다 나오면 끝나는 일이야. 그리고 핵가족의 봉쇄수도원에서 죽어갔으면 알지 못했을, 자신의 생활력과 재능을 곧 발견하게 될 거야. 그리고 자신을 ‘나의 주인’으로 부르며 사랑해 줄 진정한 연인을 만나게 되는 거야.
 
남성들 또한 루터처럼 목숨을 걸 수 있다면, 그녀를 위해 말이야. 그리고 온갖 비난에도 그녀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다면, 자신의 꿈을 위해 헌신하는 든든한 여주인을 섬길 수 있게 될 거야. 기왕에 섬길 거면 직장 상사보단 낫잖아.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로서 우리의 숙제는 핵가족의 울타리를 걷어내는 거야. 루터와 카타리나처럼 목숨을 걸고 용기를 내서 말이야. 신의 여성성의 그림자를 분리하지 않고 남성성과 온전히 융합시킴으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거지. ‘호색한’소리를 들으면 어때? ‘개혁자’로 영원히 남을 텐데.

 
루터와 카타리나의 선택은 비난만 받았던 것이 아닙니다. 비텐베르크의 시민들은 루터의 결혼을 대대적으로 환영했고, 광장에서 열린 피로연에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비텐베르크 시장은 “우리 시의 상징이며, 개혁을 하려는 루터가, 42년간 독신 생활을 청산하고 결혼하게 된 것은 하늘의 무한한 은총”이라고 말하며 루터의 결혼을 축하했습니다. 시민들은 이에 화답하듯 정성을 모아, 축하금으로 루터와 카타리나에게 140굴덴을 선물했습니다. (당시 돈으로 소 70마리를 살 수 있는 액수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 축하는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매년 계속되고 있습니다.

 

“멀린 ‘드래곤 볼’ 보셨어요?”
 
“봤지. 우리 세대 중에 그 만화책 안 본 사람이 없을걸. 아직도 나오니?”
 
“그럼요. 아직도 연재되고 있어요.”
 
“난 베지타(주인공을 상대하는 악역) 이후엔 보다 말았어. 맨날 반복이잖아. 물리치면 또 나오고 또 나오고..”

 
잭과 멀린, 세대 차가 이십 년 가까이 나는 데 아직도 ‘드래곤 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인공 손오공과 악의 대결을 그린 이 만화는, 계속 강력한 악의 세력이 등장하면서, 몇 십 년째 연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듣고 있던 한스가 한마디 합니다.

 

“그러게요. 그런데 그 만화 보면 신기한 게 있어요. 주인공이 세진만큼, 상대편도 더 세진다는 거예요.”

 


오호라~ 한스 네가 눈치를 챘구나. 악은 선의 그림자이니까. 본체가 커질수록 그림자도 커지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니. 그러므로 악을 없애는 방법은 선을 없애는 거야. 본체가 사라지면 그림자가 사라지듯 말이야. 손오공이 강해지는 이상 그만큼 나쁜 놈도 강해져야 하지. 드라마가 계속되려면 말이야. 그러나 연재를 끝내는 방법은 간단해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선善이 죽는 거야. 그러면 악惡도 같이 사라지지. 선/악이 하나로 융합해서 대결이 끝나버리면 [THE END]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거지.
 
그런데 주인공이 살아남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니? 속편이 제작되는 거야. 더 센 악당이 등장하는 거지. 그리고 그걸 계속 반복하면 막장드라마가 펼쳐지는 거야. (그래서 주인공이 죽은 매트릭스는 속편이 나오지 않는 거고, 드래곤 볼은 연재를 이어가는 거지.) 어쩌겠니? 우리가 無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존재는 그림자 없이 존재할 수가 없는 걸. 그러니 인생은 막장드라마의 연속인 거야. 다만 분열과 융합을 반복할 뿐이지.

 
그렇습니다. 그림자는 내가 빛 가운데 실존하는 이상 영원히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잘 다루어져야 할 것이지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종교와 관습은 끊임없이 금기를 생산하며 그림자를 제거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제거하려고 든 것은 그림자가 아니라, 그 그림자의 주인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림자를 통제한다는 핑계로 사람을 통제하고 억압하였습니다. 그들은 빛과 그림자, 선과 악의 매커니즘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그림자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드리우고 키우고 성장시켰습니다. 그림자가 커진다는 건 본체가 커진다는 의미이니까요. 그림자가 강해진다는 것은 본체가 강해진다는 것이니까요. 그것이 매커니즘 입니다. 알았다면 금기를 깨고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부터 살펴야 합니다. 그림자는 죄가 아니니까요.

손오공의 그림자는 베지타입니다. 매트릭스의 네오의 그림자가 스미스 요원인 것처럼. 드라마를 더 드라마틱하게 하고 싶으면 그림자를 더욱 억압하면 됩니다. 그러면 길거리에서 CCTV에 찍혀 들통이 나는, 기가 막힌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습니다.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가 없는.. 그러나 금기를 깨고 신성모독을 일상화하면 막장 드라마는 점점 사라지고 삶은 좀 밋밋해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것을 ‘행복’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가 날 위해서 하신 일이 더 많은데, 사실 나는 그리스도보다 내 아내를 더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 _ 마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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