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시티 프리퀄] 닥치고 날 좀 구해줘

in stimcity •  15 days ago




닥치고 날 좀 구해줘

+ Nuremberg, Germany



독일에 들어섰습니다. 계속되는 캠핑이 이제 좀 지겹기도 합니다. 편안한 숙소에서 하루쯤 여독을 풀어도 좋겠습니다. 베를린까지 한 번에 달려가기에는 조금 먼 거리라 중간에 뉘른베르크에서 하루 쉬어가기로 합니다. 다행히 저렴한 가격에 아파트먼트를 렌트할 수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욕조와 거실, 넓은 부엌이 달린 아파트먼트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와~우, 좋네. 사람이 이런 데서 살아야지.”

 
다들 살짝 흥분하며 깨끗하고 넓은 숙소에 만족합니다. 불편한 식사 준비에 고생이 많았던 한스와 잭은 요리기구와 각종 식기가 잘 갖춰진 부엌에 대만족입니다.

 

“이런 날 술이 빠질 수 없지. 독일 하면 맥주 아니겠니. 맥주 사러 가자!”

 
장을 보러 가야겠습니다. 맛있는 독일 맥주가 곁들여진 근사하고 편안한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내 마트에 들러 장을 봅니다. 아차! 시간이 좀 늦었군요. 일찍 점포 문을 닫는 유럽 마트들을 생각해 서둘러 마트에 들러 봅니다. 생각보다 맥주가 별로 없습니다. 아마도 술만 따로 파는 매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유럽은 나라마다 주류 판매에 대한 정책이 다릅니다. 정해진 시간 이외에는 술을 판매하지 않는 곳도 있고, 전문매장에서만 주류를 구입해야 하는 곳도 있습니다. 술 문화는 한국만큼 자유로운 곳도 드문 것 같습니다.

 

“맥주가 생각보다 종류가 별로 없네요.”
 
“여기가 전문점이 아니어서 그럴 거야. 그래도 맛은 봐야지.”

 
유명하다는 메이커들은 찾아볼 수가 없고 현지산으로 보이는 몇몇 종류만 눈에 띄입니다. 일단 사고 봅니다. 매장이 문 닫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인간다운(?) 공간에서의 식사인데 술이 빠질 수는 없습니다. 세 사람 모두 양손 가득 장을 보고 숙소로 돌아갑니다.

 

“아쉽다. 다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누구요? 다른 멤버들이요?”
 
“응. 내 직관에는 왠지 이번 여행의 정원이 6명이었을 것 같단 말이야. 3명이 안 온 거지.”

 
남은 3명은 누구였을까요? 누군가는 태초부터 이번 여행에 초대되어 있었습니다. 부름에 응답한 건 멀린과 한스, 잭이었지만 6명 또는 밴드가 깨어지지 않았다면 10여 명의 팀원이 이번 여행에도 함께 했었겠지요.

 

“지난 미국투어 때 내가 물어봤었어. 다음번에는 어디로 버스킹을 갔으면 좋겠냐고 말이야. 그때 누가 스위스라고 했어. 그래서 이번 여행 일정 짜는데 스위스는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지.”
 
“그게 누군데요?”

 
멀린은 여기 오지 않은 멤버 중 1명이었는데 정확히 누구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누군가의 무의식 속에 이 팀의 다음 행선지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위스를 말한 누군가는 이번 여행에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우주는 갈라졌습니다. 이들은 같은 경험과 기억을 공유하고 있으나 같은 우주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스와 잭은 스위스를 거쳐 독일에 와있고 다른 이들은 한국에 머물러 있습니다. 남은 이들은 버스킹 투어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고, 떠나간 이들은 자신들의 우주를 구축해 가고 있습니다.

우주가 달라지면 우리는 서로의 기억에 의존해서 소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 속 서로는 현재의 인물이 아니라 과거의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닙니다.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누군가들은 실체가 없습니다. 그것은 나의 왜곡된 기억 속에서 편집되어진 캐릭터일 뿐, 실재의 누군가가 아닙니다. 같은 공간에서 24시간을 함께 지내도 동상이몽 하는데, 기억 속의 그들이 지금의 나와 소통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그냥 어젯밤 꿈속에 만난 누구보다 왜곡된 허상입니다.

 

“어! 카톡 왔어요. 은미한테서요.”
 
“정말?”
 
“와~우. 이건 뭐지? 무슨 국면으로 들어가는 거지. 형 빨리 읽어봐요!”

 
은미는 떠나간 멤버 중 한 명입니다. 은미는 밴드가 깨어진 뒤에도 한동안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밴드를 떠난 뒤에도 한스와 연락을 끊지 않고 계속 상호작용을 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6개월 전쯤부터 아무 이유도 없이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합니다. 한스가 계속 카톡을 보내도 읽지 않고 무응답 상태가 계속 되어오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가 보다 생각하면서도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카톡이 온 겁니다. 그것도 매우 긴 장문의…

 

“뭐라고 썼어요? 잘 지낸데요?”
 
“읽어보지 말까? 나도 씹어볼까 봐. 한 6개월쯤.”
 
“형, 쪼잔하게~~”

 
큭 어찌 읽어 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서운하긴 하겠지만 한스가 그동안 기다려 온 시간의 무게가 그냥 뻗대 볼 만큼 가볍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읽어 봐야겠지?”
 
“그럼요. 아~ 궁금해 죽겠네.”
 
“그럼 읽어 보마. ‘안녕하세요. 오빠 잘 지내셨죠. 은미에요…..’ ”

 
카톡 치고는 제법 긴 장문의 내용입니다. 읽어 내려가는 한스의 목소리가 점점 톤 다운됩니다. 다들 기대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가 예상치 못한 내용에 분위기가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모두들 이 의외의 상황에 기대하는 마음들이 있었습니다. 여행의 흥미로운 반전의 계기가 되어주지 않을까? 팀의 멤버십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지 않을까? 남은 자들의 마음은 기다림입니다. 버려진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중이라고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은미는 팀 분위기를 좌지우지할 만큼 영향력이 큰 멤버였어. 은미의 탈퇴와 합류 여부가 다른 멤버들에게도 영향을 많이 끼쳤지. 존재감이 컸던 탓에 한스도 기대하는 마음을 접지 않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지. 그런데 뭐랄까? 이번 메시지는 그냥 ‘내 장비 돌려주세요.’ 였어.

 
은미는 밴드에게 자기장비를 빌려 주었었나 봅니다. 그동안 왜 연락을 할 수 없었는지, 어떻게 지냈는지 구구절절 길게 말하고는 있지만, 결국 용무는 빌려 간 장비를 돌려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한스에게는 공식적인 이별선언처럼 들렸을 거야. 6개월을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문자 해서 장비를 돌려달라는 이야기가 말이야. 마치 이별하는 연인이 얼굴도 대면하지 않고, 문자로다가 자기 서운한 감정만 잔뜩 쏟아놓고는 내가 그동안 사준 선물 돌려달라는 듯이 느껴졌을 테니 말이야.

 
카톡을 다 읽어 내려간 한스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 아무 표정도 없습니다. 물론 잭도, 멀린도, 아무 말이 없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트렁크에 잔뜩 실린 맥주와 음식재료들이 무안해 하며 바스럭거릴 뿐입니다.

 

“장비 돌려달란 얘기네요. 우리 여행 중인 거 몰랐나?”
 
“그러게. 여행 중이어서 돌려줄 수가 없다니까, 그럼 자기 장비를 내가 사고 돈으로 달래. 새 거 사게.”
 
“왜 하필 이 타이밍이었을까? 그리고 6개월이나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불쑥 연락해서 장비를 돌려달라고 할 만큼 비싸고 중요한 장비인가? 그게?”
 
“글쎄요. 뭐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무슨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한스에게는 매우 직관적인 상황임에 분명해. 어쨌든 더 이상 그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으니까. 이별선언 같은 거를 당했으니, 설득해서 돌려놓던지 아니면 수용하던지 해야 할 타이밍이 되어버렸어.

 
결국 숙소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워져 버렸습니다. 다들 애써 내색도 하지 않고, 농도 던지고,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지만, 쉽게 잊혀지고 가라앉을 감정이 아닙니다. 결국 무거워진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건 잭이었습니다.

 

퍽!

 


잭이 실수로 와인을 깨버린 거야. 아니 실수였는지 직관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게다가 더 어이가 없었던 건 사 온 맥주들이 대부분 무알콜 음료였다는 거야.

 

“아~ 진짜 안 도와주네. 와인이랑 맥주랑 잔뜩 마시고 오늘 취해버릴라고 했는데.. 이거 술 마시지 말라는 계시인가?”

 
한스는 올라오는 감정을 술로 풀어버리려 했었나 봅니다. 그걸 알았는지 몰랐는지 잭은 와인을 깨버렸고, 맥주는 모두 무알콜 음료였습니다. 되는 게 없는 날이군요.

 

“멀린, 어떻게 하죠?”
 
“뭘 어떻게 해. 나 같으면 당장 베를린으로 오라고 한다. 비행기 표 끊어주면서 말이야. 은미가 그동안 상담을 받아야 할 만큼 마음도 좋지 않고 어려운 시간들이었다며, 이럴 때 확 끌어 땡겨야지.”
 
“오~ 그거 괜찮네요. 그럼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나요? 형 어떻게 생각해요?”
 
“음.. 그러게 베를린으로 오라고 한다구요? ”
 
“그래. 차도 새로 렌트하고, 일정도 다시 짜고,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는 거지. 지난주 설교 말씀처럼 말이야. 아비라면 뒤로 물러나 있지 말고 나서서 상황을 바꿔 가야지.”

 
멀린은 지난 주의 설교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한스와 잭은 여행 중에도 매주 본교회의 설교 말씀을 따로 녹음을 부탁하면서까지 챙겨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의 설교는 자녀들의 갈등을 방관하여 죽게 만든 아버지 다윗 왕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복동생 다말을 강간한 아들 암논을 처벌하지 않고 놓아두었습니다. 이에 분개한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은 암논을 살해하고 마침내 아버지 다윗에게도 반기를 들다 결국 요압 장군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됩니다. 이 모든 상황에서 아버지 다윗은 직접 나서서 해결하지 못하고 계속 방관만 하다, 자식들을 죽음으로 내몰게 됩니다. 아버지라면 그래선 안됩니다. 앞에 선 자는, 리더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원하는 대로 하게 두는 게 아닙니다. 벌어지는 대로, 일어나는 대로 방치하는 게 아닙니다. 설교의 주제는 그것이었습니다.

 


한스는 떠나간 멤버들에 대해서, 늘 그 아이들이 사랑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안타까워했어. 사랑을 충분히 받을 수만 있다면 잘 성장할 수 있을 텐데, 사랑이 부족해서 늘 두렵고 경계한다고 안타까워했어. 한스 또한 늘 공동체, 밴드, 팀의 연합에 대해서 말하며, 사랑이면.. 사랑이면.. 된다고 강조해 왔지. 그래서 나는 한스에게 그게 사랑이면 당장 가서 머리끄뎅이라도 탁 틀어쥐고 끌고 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어. ‘넌 내가 책임질 테니까 잔말 말고 따라와!’하면서 말이야. 오히려 그걸 원했던 게 아닐까? 하고 말이야. 사랑이 뭘까? 한스의 사랑은 뭘까? 그 사랑이 뭔데 다 떠나간 걸까?

 
아침이 되었습니다. 어제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 다들 저녁만 먹고 제 공간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나절, 멀린의 방 옆 욕실에서는 한스가 욕조에 몸을 담그고 분노의 반신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멀린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한스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합니다. 한스는 어젯밤에 잘 잤을까요? 술에 만취해 잠들어 버리고 싶었을 텐데.. 그나마 욕조가 있어 다행입니다. 평소 좋아한다던 반신욕이라도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잘 잤니?”
 
“저 멀린이 말한 대로 은미한테 베를린으로 오라고 했어요.”
 
“정말? 뭐래? 온대?”
 
“비행편까지 다 알아보고, 어떻게 오면 되는지 다 캡처해서 보내주고, 비용은 내가 다 부담할 거니까 걱정 말고 오라고 했는데, ‘제가 거길 왜 가요? 그럴 돈 있으면 장비 값이나 주세요.’ 하더라구요.”
 
“음.. 닥치고 내 장비나 내놔! 그거네..”

 
‘닥치고 내 장비나 내놔’.. 이로써 한스의 기다림은 끝이 났습니다. 미루고 미루었던 직면은 이루어졌습니다. 은미는 자신의 태도를 명확히 했고, 한스는 더 이상 ‘아닐 거야, 아닐 거야, 기다리면, 기다리면 될 거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별은 확인되었고 상처는 외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넌 이미 떠났는데
난 아직 너의 방인 줄
착각하며 열어 봐
아직도 니가 보여
아직도 니가 들려

 


자유와 사랑.. 사람들은 자유를 원하는 것 같지만, 사랑을 말하는 사람은 실은 구속을 원하는 거야. 사랑만큼 강력한 구속이 어디 있겠어? 생각과 감정을 모두 점령당하는 데 말이야.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말하면서 이별의 이유를 찾지. 언제든 벗어나려고 말이야. 하지만 그건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만남은 어려워지고 인연은 옅어지게 돼.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야. 그래야 의존하지 않고 온전히 사랑할 수 있어.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대부분은 차라리 자신을 강력하게 구속해 줄 사랑을 찾아다니지. 겉으로는 자유를 이야기하고 구속을 두려워하지만, 속으로는 강력하게 자신을 구속해 줄 상대를 원하고 있는 거야. 나의 모든 것을 강력하게 구속하고 통제해줄 사람을, 그래서 이별의 이유조차 들이댈 틈을 주지 않는 강력한 구속을 말이야. 도망가 봐야 부처님 손바닥일 수밖에 없는 강력한 통제를 말이야. 만남과 이별을 반복할수록 구속에 대한 욕구는 더더욱 강해져.

 
그래서 사람들은 사이비 종교와 독재집단에 빠지기도 합니다. 구속에 대한 욕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더욱 강렬해집니다.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 무한 경쟁의 사회에서, 자유는 어디 가져다 쓸 데가 없습니다. 대신 구속은 적어도 댓가를 지불해 줍니다.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만큼 독립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차라리 자유를 담보로 무한한 책임을 져주길 기대합니다. 그래서 강력한 구속을 찾아다닙니다. 치른 대가에 비해 보상은 보잘 것 없어도, 강력한 소속감만 얻을 수 있다면 괜찮습니다, 좋습니다. 그럴듯한 회사 뱃지와 출입증, 명함이 주어진다면 쥐꼬리만한 월급이어도 상관없는 겁니다. 무한 자유의 백수보다 소속감이 분명한 회사의 부속품이 훨씬 사랑스럽습니다. 아니 사랑받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온갖 스트레스와 개 같은 취급에도 떨려 나가지 않으려 무진 애를 씁니다.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구속입니다. 지독하게 벗어나고 싶던 월요병이 백수가 되는 순간, 목숨을 주고서라도 바꾸고 싶은 귀족병이 되어 버립니다. 뛰쳐나온 회사, 조직보다 못한 곳이라도 월요병만 제공해 준다면 또다시 기어들어갑니다.

 


구속을 원하는 사람들은 시험하지. 리더를, 연인을, 상대를.. 자신을 얼마나 구속해 줄 수 있는지 계속 도마에 올려놓고 시험해. ‘이래도 안 자를 거야?’, ‘이래도 안 버릴 거야?’, ‘이래도 이별하지 않을 거야?’ 일부러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려고 하는 상대의 의지를 시험하지. 전기고문하듯 점점 전압을 올려가면서 말이야. 한스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어. 적어도 지금까지는.. 포기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걸 알아. 은미는 말이야. 그래서 계속 전압을 올리고 있지. 그런 게 아니었다면 구구절절이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냥 장비 돌려달라는 말만 했겠지. ‘닥치고 내 장비 내놔!’가 아니라 ‘닥치고 날 좀 구해줘.’인 거야.

 
한스가 그걸 알까요? 그러고도 사랑할까요? 결국 다윗 왕처럼 멤버들 간의 갈등을 방관하던 한스는, 멤버들이 서로 찌르고 베어 대는 동안 무력하게 뒤로 물러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그에게서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은미는 한스에게 묻고 있는 겁니다. ‘날 좀 더 구속해 줄 수 없어요? 오빠 이것 밖에 안돼요?’

 

“멀린, 한스 형이 7월 말까지만 기다리겠대요. 그 후론 끝이래요.”

 
7월 말은 밴드의 스튜디오 계약이 끝나는 날입니다. 장소를 이동하고 나면 난 아직 너의 방인 줄 착각하며 열어 볼 일이 없을까요? 한스에게 문자를 보낸 은미는 한스의 우주에 실존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한스의 우주에 살고 있는 은미는 아직도 부재중입니다. 그의 카톡의 ‘1’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스는 또 기다립니다. 7월 말까지 또 기다립니다. 닥치고 내 장비나 내놓으라는 은미는 다른 우주에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을 구해달라고 SOS를 보내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스는 그녀의 우주로 뛰어들 자신이 없습니다.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 속으로 그녀를 구하러 순례를 떠날 자신이 없습니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스스로 어둠의 동굴에서 나와, 늪을 건너고, 마법의 성을 넘어, 자신을 찾아오기 전에는 만나 줄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스는 7월 말이 지나고, 아직 대화창에서 ‘1’이 지워지지 않은 자신의 우주에만 존재하는 그녀를 삭제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한스에게 닥치고 제발 날 좀 구해달라며 SOS를 치고 있는 다른 우주 속 그녀의 메시지는, 독일 뉘른베르크에 혼자 남아 슬피 울며 떠돌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구속해 줄 누군가를 찾아다니며 말입니다. 멀린은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랑과 구속의 서사시를 가슴 아프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우주에 숨어서 그렇게 외로울 뿐이야. SOS를 날려 보지만, 우주와 우주가 도킹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괴로워지지. 그걸 계속 반복할 수는 없어. 외롭던지 괴롭던지 선택해야 해. 도킹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다간 자신의 우주가 모두 파괴되고 말 테니.

 
이날 이후로 남은 여행 내내 한스와 잭은, 다른 멤버들에 대해서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한스는 작심이라도 한 듯 버스킹에 집중했고 마음과 감정을 모두 담아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내색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깊게 베인 상처는, 때로는 히스테리로, 때로는 무거운 침묵으로, 때로는 사소한 짜증으로 불쑥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멀린은 그럴 때마다 내가 이러려고 여기까지 니들을 데리고 왔나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답니다.

 


이미 도킹을 해버렸으니 어쩌겠어. 여행을 마치기까지는 지지고 볶고 해야지. 대신 너희도 나도 도망 갈 수는 없어. 여기는 유럽이니까. 그게 사랑일 거야.

 
한스와 은미는 그렇게 이생의 연(緣)을 다하게 된 걸까요? 그들은 아픈 만큼 성숙해졌을까요? 아프려고 또 다른 누군가의 우주를 찾고 있을까요? 아직도 ‘1’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박살 난 유리창은 암스테르담에 버려져 있다 | 닥치고 날 좀 구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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