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시티 프리퀄] 알을 뚫고 나오려면

in stimcity •  2 months ago




알을 뚫고 나오려면

+ Calw, Germany


새는 알을 뚫고 나오기 위해 싸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알을 뚫고 나온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너무도 유명한 구절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모두들 한 번쯤은 읽어 보았을, 적어도 제목 정도는 들어봤을 유명한 작품입니다. 멀린의 유럽 여행 일정의 동선에 헤르만 헤세의 生의 흔적이 걸쳐져 있습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독일과 스위스의 경계에 있는 도시 ‘칼프’, 그리고 그가 생의 말년을 보내고 잠든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경계의 ‘몬타뇰라’. 러시아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독일에서 자랐으며, 스위스에서 인생의 후반부를 보내야 했던 헤세는 경계를 매우 싫어했습니다.

 

“경계선보다 더 증오스러운 것, 경계선보다 더 얼빠진 것은 없다.” _ 헤르만 헤세

 
그는 러시아인도, 독일인도, 스위스인도 아닙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었으나 그렇다고 불교신자는 아니었습니다. 경계인의 삶은 참으로 피곤한 일입니다.

 


경계에 서고 싶은 사람은 없어. 다만 여기서도 저기서도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경계에 서있을 수밖에 없는 거야. 경계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새로운 영역을 만드는 것뿐이지.

 
헤세는 혼란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냅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입학한 신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정신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입학한 일반학교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서점 점원, 시계 부품공장 견습공을 전전하였습니다. 부모님은 헤세에게 종교적 신념을 강요하였고 그의 작품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결혼생활도 순탄치 않았는데 두 번의 이혼과 아내의 정신병, 아들의 중병, 바닥난 재정상태로 아이들과 뿔뿔이 헤어져 지내야 하는 등 여러 어려움을 감당해 내야 했습니다. 40대 초반의 헤세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신과 크눌프는 서로 그의 생애가 무의미했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했으면 지금과 달라질 수 있었을까, 모든 게 이렇게 밖에 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에 대해 서로 이야기했다.
 
“제가 열네 살 때 프란치스카한테 버림을 당했을 때입니다. 그 일만 없었더라면 저는 무엇이든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저는 파괴되고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 저는 전혀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지요. 아, 뭐라고 할까요? 잘못이 있다면 당신이 저를 열네 살에 죽이지 않았다는 것뿐입니다. 그때 죽었다면 저의 생애는 익은 사과처럼 아름답고 완전했을 것입니다.”
 
신은 충고했다.
 
“이제 탄식한들 무엇하리요. 모든 것이 좋았고 올바르게 진행되어 달리는 될 수 없었다는 것을 그대는 모르는가? 아니면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신사가 되고, 공장의 주인이 되어, 처자를 거느리고 저녁에 주간 신문을 읽는 신세가 되고 싶단 말인가? 그런 신세가 되더라도 자네는 곧 달아나 숲속에서 여우 곁에 자거나, 새장이나 놓고 도마뱀을 키우는 짓을 할 것이 아닌가?”
 
“왜 저는 그 모든 것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또한 왜 옳은 사람이 못되었을까요?”
 
“보라!’하고 신은 말했다.
 
“나는 지금의 그대를 달리 만들 수 없었다. 나의 이름으로 그대는 방황했고, 정주(定住) 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자유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켜 주었다. 나의 이름으로 그대는 어리석은 일을 하여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그대 속에 있던 내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고 또한 사랑을 받은 것에 불과했단 말이다. 그대는 나의 아들이요, 나의 동생이며, 나의 분신이었다. 그래서 그대가 맛보고 겪은 모든 괴로움은 나도 똑같이 체험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럼, 이제 더 한탄할 것이 없는가?” 하고 숨은 신의 음성이 물었다.
 
“이제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 모든 것이 좋은가? 모든 것이 그대로 되었는가?”
 
“네, 모든 것이 되어야 할 대로 되었습니다.”
 
신의 음성이 점점 희미해지며 때로는 어머니의 음성같이, 때로는 헨리엔트의 음성같이, 그리고 때로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리자베트의 음성같이 들려왔다. 크눌프는 다시 눈을 뜨려 했으나 해가 비쳐 곧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양 어깨 위에 두텁게 쌓인 눈을 털고 싶었으나, 그보다 이제 와서는 다를 어떤 의욕보다도 자고 싶은 의욕이 더욱 강해지는 것이었다.
 
_ 헤르만 헤세 <크눌프> 中

 


자신을 살아내려다 지친 경계인은 그대로 잠들고 싶어지지. 갈등을 감당해내느라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버린 뒤에는, 에너지를 회복하기 보다 그냥 방전 상태로 사라지고 싶어지는 거야. 신은 모든 것이 되어야 할 대로 되었다고 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生은 무의미해지는 거야. 모든 것이 그냥 없었어도 그만인 것이지.

 
헤세가 가장 애착을 가졌던 인물 ‘크눌프’. 그의 고향 칼프에는 ‘크눌프’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저축은행 앞이네요. 자신이 살아내지 못한 일상성과 보편성의 상징인 저축은행을 뒤로하고 동상이 서 있습니다. 멀린은 물끄러미 ‘크눌프’ 동상을 바라보며 지나온 길에 방문했던 스위스 몬테뇰라의 헤세를 떠올립니다.

 


여기 칼프에서 몬테뇰라까지 쫓겨나다시피 하며 내려가는 과정은, 헤세에게 모든 것이 좋지 않으냐며 어쩔 수 없다던 神을 넘어, 전일성(全一性)의 神인 아브락사스에게로 가는 순례의 여정이었어.

 
헤세(1877~1962)는 몬테뇰라에서 융(1875~1961)을 만나게 됩니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공간에서 자신을 추구해 나간 두 인물은 마치 소울메이트처럼 닮아있습니다. 출생과 죽음의 시기도 비슷하고, 두 사람 모두 목사와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가정환경도 비슷합니다. 인생의 한 시점에 인도 여행을 통해 동양 사상에 심취했던 면도 비슷하고, 스위스의 외딴곳에서 각자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간 공통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안정적이었던 융과 달리 헤세는, 그를 둘러싼 세계와의 불화가 계속되었습니다. 결혼생활도 순탄치 않았고 나치에 반대하는 바람에 탄압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나치는 그의 저작을 방해하기 위해 출판용지를 배당하지 않음으로써 출간을 막기도 하였습니다.)

 
상처 입은 자신의 반쪽이었을지 모를 헤세를, 융은 전일성의 세계로 이끕니다. 그리고 먼저 알을 깨고 나온 융을, 헤세는 데미안을 따르는 싱클레어처럼 받아들였습니다. 그와 그의 제자에게서 심리분석을 받으며 자신을 치유해 나간 헤세는, 자신을 괴롭혀 왔던 이원적 신앙에서 벗어나 빛과 어두움, 선과 악을 한 몸에서 통합해 낸 새로운 신 ‘아브락사스’를 만나게 됩니다. 이를 기점으로 그의 문학세계는 기존의 상처와 반발의 청소년기를 배경으로 하던 성장소설(페터 카멘치트, 게르트루드, 로스할데, 수레바퀴 밑에서 등)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세계와 무의식을 깊이 경험해 들어갑니다. (데미안, 싯다르타, 知와 사랑, 유리알 유희 등)

 

“지금 나는 어렵고 종종 견딜 수 없는 삶의 상황 속에서 융에게 심리분석의 충격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뼈 속까지 깊게 파고들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발전적으로 나아가게 해줍니다. 융 박사가 나의 분석을 아주 확실하고 뛰어나게 천재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것만을 말씀드립니다.”
 
_ 헤세의 편지 中

 
융과 만난 지 닷새 후, 헤세는 꿈속에서 데미안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는 그 유명한 소설 [데미안]을 집필하게 됩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도덕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소. 그러나 마찬가지로 당신 자신도 도덕가여서는 안 되는 것이오. 당신 스스로를 남과 비교하지 마시오. 자연이 당신을 박쥐로 만들었다면, 당신은 자신을 타조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오. 당신은 종종 자신을 괴짜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길을 간다고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오. 저 불과 구름을 보시오. 그래서 예감이 떠오르고 당신 영혼의 목소리가 말을 시작하면 당신은 그것에 몸을 맡겨 보시오. 그런 행위가 선생님이나 아버지나, 또는 어떤 신의 마음에 들까 어떨까를 물을 것도 없이....... 그런 물음 때문에 사람은 결국, 땅 위에 걷게 되고 화석이 되고 마는 것이오.
 
싱클레어! 우리의 신은 아브락사스, 그는 신이면서도 악마이고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모두 자기 안에 가지고 있소. 아브락사스는 당신의 어떤 생각에 대해서도, 또 당신의 어떤 꿈에 대해서도 거스르지 않는다는 걸 명심하시오. 당신이 더 이상 흠잡을 곳 없이 완전하게 된 날에, 비로소 아브락사스는 당신 곁을 떠날 것이오. 그는 당신을 떠나 자신의 사상을 끓이기 위한 새로운 냄비를 어디선가 찾게 되겠지요.
 
_ 헤르만 헤세 <데미안> 中

 
‘아브락사스(ABRAXAS)’는 고대 희랍의 신으로 선과 악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상징입니다. 융과 헤세는 그들의 사상과 작품에서, ‘오직 善’인 기독교의 이원론적 신관에서 벗어나 선과 악을 한 몸으로 하는 일원론적 신에게로 나아가야 비로소 온전한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류가 그를 잊음으로써 알지 못하는 한 신이 있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아브락사스라 부른다. 그는 신이나 악마보다 더욱 무한한 존재다. 아브락사스는 살아 있다. 아브락사스는 태양 위에, 악마 위에 존재한다. 그는 비실재적인 실재다. 그는 태양으로부터 지고의 선을 가져 오고, 악마로부터는 끝없는 악을 가져온다.
 
_ 카를 융 <죽음의 일곱 가지 교훈>

 

우리는 모든 것을 존경해야 하고 성스럽게 생각해야 해. 세계 전체를 말이야. 인위적으로 떼어 놓은 이 공적인 절반만 그럴 것이 아니란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말이야.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 외에 악마한테 하는 예배도 해야만 해. 그게 옳은 거라고 나는 생각해.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악마도 자신 안에 포함하는 그런 신을 하나 만들어내야만 할 거야.
 
환희와 끔찍함, 남자와 여자가 뒤섞이고, 가장 성스러운 것과 가장 소름 끼치는 것이 서로 서로 뒤엉킨 것.
 
_ 헤르만 헤세 <데미안> 中

 


이쯤 되면 모든 기독교인 가정의 서재에서 <데미안>을 뽑아다가 단체로 화형식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완전히 이단적이잖아. 매우 불경하고 위험하지. 그럼에도 여전히 청소년 추천도서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일단은 부모들이 이 책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일 거야. 아니면 헤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이유 때문이겠지. 그래 그게 진짜 이유이지. 명성이면 무엇이든 상관없는..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신도들이 아닌 거야. 그들은 오히려 ‘맘몬과 바알’의 성도들이지. 부와 권력, 주류적 신앙의 일원이 되고 싶을 뿐이지, 강력한 절대성을 추구하는 이원적 종교의 성도가 아닌 거야. 그러므로 나는 그들은 이미 자신의 욕망을 따라, 융과 헤세조차 적응하지 못했던 절대 선의 신인 ‘여호와 하나님’과 절대 악의 우상신인 ‘맘몬과 바알’을 통합시킨, 진정한 아브락사스의 사제들이라고 칭하고 싶어. 자녀의 수능 점수 1점을 올리기 위해, 자신의 신앙교리에 반하는 반기독교적이며 이단적인 신앙의 경전을 달달 외우게 하는, 진정한 신앙인인 것이지.

 
멀린.. 할 말이 없습니다. 그들은 정말 왜 <데미안>을 불태우지 않는 걸까요? 어이가 없지만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가 인간 정신의 절대성과 이원론적 편견을 벗고, 아브락사스의 일원성으로 나아가고 있는 증표가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멀린의 말처럼 매우 극단적인 균형을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나는 오히려 융과 헤세와는 반대로, 이 강력한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절대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브락사스에게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하기도 해. 매우 아이러니하지만, 자신을 크리스챤이라고 하면서 맘몬과 바알의 신에게 기도하는 이들이 더 많지. 희생과 헌신을 오히려 비현실적이고 우매한 것으로 치부하며, 철저하게 악의 입장에만 서려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야. 그들에게는 오히려 ‘절대 善’이 더욱 필요한 이교적 복음이지. 그래서 그런 메시지들을 고리타분하다며 헌책방에 내버리고 있지. 그들이 강렬히 열망하는 것은 오히려 한때 이단적 교리로 배척되던 ‘시크릿’ 등과 같은 자기계발의 이론들이지. 인간이 신의 위치에 서는 심상화와 그노시스적 이론들 말이야. 물론 그것은 신의 또 다른 면이지만 너무 그쪽으로 기울었어. 중세였다면 마녀사냥을 당해 불태워졌을 이론과 비의들이 오히려 주류가 되어 균형을 잃었어.

 
‘아브라카다브라(Abracadabra)’ 이것은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아브락사스 신의 주문입니다. 개인의 소원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던 절대성의 시대에 이것은 사탄의 주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모든 사람들의 주기도문이며, 모든 염원의 실체가 되었습니다. 융과 헤세가 지금 태어났다면 오히려 강력한 절대성을 외치며, 그리스도교의 목사와 선교사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님들은 신학교에 가겠다는 이들을 말리고 말려서 법학과와 경영학과에 보내려 혈안이 되었겠지요. 헤세는 신학교에 가지 못하게 한다고 자살을 시도했을지도 모릅니다. 절대성과 다양성이 이렇게 순환하고 교차하며 균형을 맞추어 가고 있습니다. 멀린이 얘기하는 극단적 균형은 이미 인류의 역사 속에 늘 반복되어 오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럼에도, 이 강력한 다양성, 포스트모던의 시대에도 여전히 신의 남성성과 여성성은 좀처럼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프로이트는 20세기 초반 정신분석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체계를 세운 사람이다. 19세기 말까지 서구 유럽의 인간학은 기독교 성서 해석학에 등장하지 않는 인간 무의식의 세계나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한 자연의 세계를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 틈바구니에서 20세기 초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인간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프로이트이다. 그러나 그는 의식의 세계가 아닌 무의식의 세계, 즉 '리비도'라는 생명의 힘을 발견하자마자 곧 그것을 근대 가족주의의 감옥 안에 가두어버렸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단순히 정신의학의 한 분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병원의 의학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나 대학의 교육체계, 그리고 근대국가의 기업과 정부, 군대, 법원 등등의 모든 구조를 지배하였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근거한 근대국가의 국가장치들이 만드는 '아버지-엄마-나'라는 가족주의의 삼각형 속에서 '나와 너'라는 친구와 연인의 동맹관계나 동지 관계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지배와 피지배의 서열구조만이 존재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프로이트의 지도를 받았던 융은, 리비도나 무의식을 오직 오이디푸스의 성적 욕망으로 규정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의심하면서도, 별다른 방법론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제시하는 '대화 치료(talking cure)'의 방식을 채택하여 정신이상 환자를 치료한다.
 
문제는 칼 융이 아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교육기관과 병원, 법원과 정부, 그리고 경찰과 군대, 언론과 정당 등등의 모든 국가장치들은 칼 융과 같은 의심도 없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제공하는 '아버지-엄마-나'라는 가족주의의 삼각형 모델을 자체의 핵심 구조로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 아버지의 힘은 아버지로 상징되는 자본과 권력이다. 대한민국의 국가 장치들만이 문제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칼 융과 같은 의심도 없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이야기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문학과 역사학 그리고 철학뿐만 아니라 정치학과 경제학 그리고 사회학 등등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지식인들이다.
 
이러한 근대 식민지성의 권력과 지식은 우파와 보수적 지식인들에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좌파와 진보적 지식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데이저러스 메소드>는 서구 근대성의 지식, 그리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근대 식민지성의 지식이 탄생한 그 자리에서 신, 원본, 그리고 자본가와 지배자의 편에 있는 프로이트와 그것을 의심하고 회의하는 인간과 복사본, 그리고 노동자와 국민의 편에 있는 칼 융의 관계 속에서 오늘날의 근대성과 식민지성을 재생산하는 정신분석학의 이분법적 구조를 다시 생각하도록 만든다.
 
_ 욕망이라는 이름의 창조적 생명력,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데인저러스 메소드>, 프레시안

 
‘근대 가족주의의 감옥’.. 멀린, 우리는 어떻게 여기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지배와 피지배의 서열구조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신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통합한 아브락사스에게로 날아갈 수 있습니까?

 


 
 
주문을 알려 줄게.
 
Wicked is Good.
Wicked is Good.
Wicked is Good.
 
위키드는 좋은 거란다.
위키드는 착한 거란다.
위키드가 선한 거란다.

 
마법사는 우리에게 아브락사스 신에게로 가는 기도문을 알려주었습니다. ‘Wicked is Good.’ 이것이야말로 알을 뚫고 나와야 할, 근대 가족주의의 감옥을 깨트려야 할 어린 새가 자신의 검에 새겨야 할 마법의 주문입니다. 우리는 이 검을 쥐고 ‘가족주의의 감옥’을 둘러싼 장벽을 뚫어내야 합니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 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알 속에서 깨어나보지도 못하고 프라이가 될 순 없습니다. 잡혀먹더라도 우리는 알을 깨고 나와야 합니다. 비록 그렇게 깨고 나왔던 이들이 장작불에 구워졌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개를 펴고 날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새이니까요. 오리가 아니라 백조이니까요.

 

새는 알을 뚫고 나오기 위해 싸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알을 뚫고 나온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박살 난 유리창은 암스테르담에 버려져 있다 | 알을 뚫고 나오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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