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시티 프리퀄] 소가 풀을 뜯듯이 #1

in stimcity •  18 days ago




소가 풀을 뜯듯이

+ Downhouse, UK



스톤헨지에는 혼자 가길 잘 했습니다. 여행상품을 쫓아갔더라면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인증샷만 찍고 돌아올 뻔했습니다. 늙은 소와 충분히 대화를 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던 멀린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숙소에 돌아왔습니다. 숙소 열쇠가 없어 한스에게 전화를 했는데 웬일인지 응답이 없습니다. 다시 잭에게 문자를 하니 잭이 내려와 문을 열어 줍니다.

 

“한스는 자니? 오늘 버스킹은 어땠어?”

 
그러고 보니 오늘 런던 시내에서 버스킹을 할 거라고 했는데 잘 했는지 궁금합니다.

 

“아니요. 오늘 버스킹 못했어요.”
 
“왜? 어제 장소 섭외 다 했다며?”
 
“그게 순서가 선착순이더라구요. 한참 기다렸는데 순서가 잘 돌아오지 않아서.. 비도 오고.. 결국 그냥 들어왔어요.”
 
“그랬구나.. 한스는 그래서 먼저 자는 거야?”
 
“형 컨디션이 안 좋은가 봐요.”

 
한스는 자는지, 기분이 좋지 않은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는 반응이 없습니다. 암스테르담 사건 이후, 한스도 에너지가 넘쳐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여행을 잘 마무리하려고 애써 노력하는 듯 보이긴 했지만, 한스는 은미의 문자 사건부터 해서, 많은 것들을 직면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 같습니다.

 


영국은 뭐랄까? 사람을 직면시키는 묘한 에너지가 있어. 어떤 선택을 하면 그게 잘 됐건, 잘못됐건, 선택한 방향으로 어느 정도 흘러가기 마련인데, 영국은 선택과 상관없이 운명과 직면시켜 버리는 것 같아. 이번 스톤헨지 여행상품 건도 그렇고, 전에 ‘위키드’도 그렇고..

 
멀린은 8년 전 첫 런던 여행 때,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예매했었습니다. 웨스트엔드에 가면 꼭 보고 싶었던 뮤지컬이라, 런던에 도착한 첫날 바로 예매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매한 날이 되어 공연장을 찾았는데, 입구에서 스탭이 이 티켓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냐며 여기가 ‘빌리 엘리어트’ 공연장이 아니냐구 따져 묻는 멀린에게, 스탭은 티켓을 손으로 집어가며 이 티켓은 뮤지컬 ‘위키드’라고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멀린은 무언가에 홀린 듯했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 분명하게 ‘빌리 엘리어트’라고 말했고, 티켓박스 직원도 확인해 주었거든. 아무리 내 발음이 못 알아들을 발음이었어도 말이야. ‘위키드’하고 ‘빌리 엘리어트’하고 어떻게 헛갈리냔 말이야. 게다가 난 왜 티켓을 확인할 생각을 못했을까? 뭐에 홀린 게 틀림이 없어. 아니 얼핏 보긴 봤지. 그런데 ‘Wicked’의 ‘…ed’만 얼핏 보고, ‘Reserved’라고 착각을 했나 봐.

 
다행히 ‘위키드’ 공연장이 바로 근처라 공연은 늦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어 대사는 잘 알아듣지도 못하겠고, 공연은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습니다. 괜히 화가 나고 짜증이 나서, 한참을 씩씩거렸었습니다. 그런데 ‘위키드’는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직관은 마법의 주문 ‘Wicked’를 멀린에게 알려주려고 그 뒤로도 수도 없이 반복하였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위키드’는 주구장창 따라다니기 시작했어.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나타나서 ‘위키드’해야 한다고 내게 지령을 내렸지. 고개를 돌리면 ‘위키드!’ 우연히 어딘가에 들렀는데 ‘위키드!!’.. 피할 수가 없었어.

 
한참 만에 끈질기게 쫓아다닌 직관의 메시지를 수용하고 나서도 ‘위키드’는 좀처럼 물러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스톤헨지를 혼자 가야 한다며 스케줄을 흐트러뜨려 놓은 것 입니다. 영국에서는 직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돌아가는 헛걸음을 용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스도 직면하고 있는가? 버스킹 하다 중단된 적은 있어도, 허탕친 적은 없었는데..

 
마음이 좋지 않을 한스를 가만두고, 멀린도 조용히 잠자리에 듭니다. 고단한 하루였습니다.

 


눕지 마자 잠이 든 것 같아. 그런데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꿈속에서 내가 다시 스톤헨지의 풀밭에 서 있는 거야. 그래서 혹시나 하고 그 늙은 소를 찾아 보았지. 아니나 다를까. 저만치 떨어진 나무 아래서 하품을 해대고 있더군.

 

“이 봐. 내가 아직 물어볼게 있네.”
 
“어, 자네 아직도 안 갔는가? 어째 여기 아직도 있는가?”
 
“아니 이건 꿈이야. 난 숙소에 돌아왔고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무슨 소리야. 해 떨어지려면 아직 멀었구만.. 이 사람이 좀 이상하긴 이상하구만..”
 
“아니 그러니까 자네한테는 생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거란 말일세.”
 
“뭔 소리를 하는 건지.. 그런데 자네 왜 아까부터 반말인가? 나이가 몇 살인데..”
 
“몇 살 이냐구? (아니 이런 소새끼가?!) 이 봐, 소가 길어봐야 20년을 살 텐데, 내가 아무리 젊어도 자네보다 배는 더 살았을 걸세. 게다가 여긴 영국이 아닌가? 영어에 존댓말이 있는가?”
 
“자넨 한국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나? 내 친구 한우들이 한국에서는 존댓말을 한다기에 물어본 걸세. 아니꼬우면 영어로 대화를 하시던가.”
 
“아.. 그건 됐고. 어서 꿈 깨기 전에 내 하나만 물어보세. 스타게이트는 이제 안 열리는가? 우주선은 왔다 갔는가 말일세.”
 
“어~허 이 사람 점점 더 못 알아들을 말만 하는 구만. 스타게이트? 우주선은 다 뭔가? 뭘 알아야 답을 해 주지.”
 
“뭐라고? 모른다고? 아니 그럼 내가 멀린인 건 어떻게 알았는가?”
 
“그건 뭐, 우리도 조상들로부터 전해 들은 얘기가 있지. 저기 저 거석들을 마법사 멀린이 세웠다는 얘기 말일세. 그리고 언젠가 영국이 위기에 빠지면, 마법사 멀린과 아더 왕이 다시 돌아와 위기에서 구해줄 거란 전설 말이야. 요즘 정세가 심상치 않지 않은가? 우리도 다 듣는 귀가 있네. 우리 정보에 의하면 마법사 멀린이 아더 왕이 돌아오기에 앞서, 이곳에서 의식을 치르기 위해 방문한다더군. 한참 소문이 돌았었지. 작년 하지 때 말이야. 마법사 멀린이 나타날 거라고. 그런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어. 그래서 올해는 나타나려나, 관심 있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펴보곤 했네. 그런데 자네가 우리들을 빤히 바라보고 한참 서있길래 말을 걸어 본 거야. 혹시나 하고. 그런데 신기하게 우리 말을 알아들었지 않은가. 자네가 말이야.”
 
“그랬지.. 그건 나도 신기하네. 내가 언제부터 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네. 그런데 자네들은 왜 멀린과 아더 왕을 기다리는가?”
 
“답답한 소리하고 있네. 아니 나라가 위기에 빠지고 전쟁이 나면 우린들 온전하겠는가? 폭격에 맞아 죽어도, 우리는 누구 하나 신경 쓰는 이들이 없다고. 게다가 지금 시대의 전쟁은 핵 전쟁이 아닌가? 나도 천수를 누리다 가고 싶은 소망뿐이네. 방사능 구이가 되고 싶진 않단 말이지.”

 
“그럼 스타게이트는 영영 닫혀 버린 건가? 우주선은 하지 때 떠나 버렸나? 혹시 하지 때 무언가 이상한 물건이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하진 않았는가? 뭘 본 게 없느냔 말일세”
 
“이보게. 우린 소일뿐이네. 소가 뭘 본들, 그게 뭔지 어떻게 알겠나. 그나저나 자네는 멀린이 맞는가? 그 마법사 멀린 말일세?”
 
“멀린.. 맞긴 하네. 하지만 나도 아직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네. 그리고 여기서 다른 차원으로 돌아가려고 했단 말일세. 자네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차원? 그럼 뭐 그건 죽는 걸 말하는 건가? 아니면 바람처럼 사라지는 걸 말하는 건가?”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네. 다만 이렇게 되면, 나는 아직도 살아온 날 만큼 더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걸세. 이 고단하고 지루한 인생을 어이 더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네. 그냥 다른 차원으로 가버릴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하지만 자네 안색이 안 좋은 걸 보니, 좋은 일은 아닌가 보네 그려. 음.. 다른 차원이라.. 그 차원이란 것이 말이야. 존재에 관한 것이라면 말이야. 우리 동물들을 다른 차원의 존재로 이끌어 준 현자가 있지. 아니 인간들인가? 암튼 그분을 한 번 찾아가 보게. 그분이라면 자네의 고민을 들어 줄 수도 있을 것 같네만.”
 
“현자라고? 누구를 말하는 건가?”
 
“아.. 그러니까 개혁자라고도 할 수 있지. 그 왜 다윈이라고 모르는가?”
 
“다윈? 챨스 다윈을 말하는 건가? ‘종의 기원’의 그 챨스 다윈?”
 
“그래그래 맞아. 우리 동물들의 지위를 인간과 동격이자, 신성의 차원으로 이끌어 준 놀라운 현자이시지. 그분을 찾아가 보게나.”
 
“챨스 다윈은 죽었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만나란 말인가?”
 
“이보게 그건 자네 문제일세. 게다가 자네는 지금 꿈꾸는 중이라고 하지 않았나? 불가능할 게 뭔가? 소의 말도 알아듣는 자가. 자, 그럼 나도 이만 자러 가겠네. 기회가 되면 또 봄세~”
 
“아니 저기.. 이보게 잠깐만..”

 
멀린은 새벽같이 깨어났습니다. 늙은 소는 사라졌고 잠은 달아났습니다. 챨스 다윈이라.. 이미 죽은 그를 어떻게 만나야 할까요? 그리고 그는 멀린에게 무슨 답을 줄까요? 영국에서 멀린은 자신의 일정을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마치 계획이 되어있었다는 듯, 운명의 스케줄을 따르고 있습니다.





박살 난 유리창은 암스테르담에 버려져 있다 | 소가 풀을 뜯듯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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