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시티 프리퀄] 선한 싸움 그리고 밴드의 기사들

in stimcity •  15 days ago




선한 싸움 그리고 밴드의 기사들

+ Glastonbury, UK



유럽 버스킹 투어의 일정이 모두 끝이 났습니다. 내일이면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45일간의 투어 일정이 처음에는 길게 느껴졌었는데 어느새 다 지나버렸네요.

멀린은 마지막으로 글래스톤베리를 방문하였습니다. 글래스톤베리는 전설에 의하면, 예수의 시신을 수습했던 아리마테 요셉이 성배를 들고 건너와, 영국 최초의 교회를 세운 도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곳 글래스톤베리에는 아리마테 요셉이 세운 수도원이 있습니다. 이 수도원에는 아더 왕과 그의 왕비 귀네비어의 무덤도 있습니다. 이 무덤은 1191년에 수도사들에 의해 발견되었다가, 1539년 이후에 사라졌습니다. 전설에는 성배와 함께 묻힌 아더 왕과 귀네비어의 유해가, 어디론가 비밀스러운 곳으로 이동됐다고 합니다.

 


그냥 뭐, 조금 신비로운 중세 풍의 수도원이야. 정원이 잘 가꿔져 있고..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토르라는 언덕이 있는데, 이 언덕 아래에 성배가 숨겨져 있고, 아더 왕의 유해 또한 이곳으로 옮겨졌다는 전설이 있지. 그래서 여기가 그 전설의 아발론일 거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어.

 
성배는 왜 이곳에 묻히게 되었을까요? 성배에 관한 수많은 전설이 있고 실체에 관한 많은 추측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배는 그것을 쫓고, 발견하고, 지키고 있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혈통이든, 에메랄드가 박힌 잔이든, 현자의 돌이든 말입니다. 멀린은 성배의 전설을 쫓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우주선을 타고 스타게이트를 통과하여,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고 싶었을 뿐입니다. 아니 이생의 차원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입니다. 성배의 전설을 쫓아야 할 몫은 아더 왕과 원탁의 기사들에게 주어진 사명일 뿐입니다.

 


모든 기사들이 성배의 비밀을 발견한 건 아니야. 갤러헤드, 보호트, 파르치발 단 세 명만이 성배를 발견할 수 있었지. 멀린은 오히려 호수의 요정 비비안에게 마법을 알려주고, 자신을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탑에 유폐시키도록 만들었어. 그리하여 멀린은 오로지 비비안 만이 아는 탑에 스스로 갇히게 되었지. 그리고 나는 여기 글래스톤베리의 토르 언덕에 앉아 있지. 우주선을 놓친 채로 말이야.

 
멀린은 낮게 구름이 드리워진 토르 언덕에 쓸쓸히 앉아 있습니다. 이 언덕은 마치 우주선의 돔처럼 생겼습니다. 언젠가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두 쪽으로 갈라지며 로보트 태권 V가 날아오른다는 한국의 국회의사당 돔처럼, 언제든 원탁의 기사들이 다시 일어나 찬란한 성배와 함께 떠오를 우주선이 숨겨져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멀린은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최선을 다해 살았구나 생각합니다. 힘들고 고단하기는 했으나 참으로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구나 생각합니다.

 


최선(最善)을 다한다는 것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게 아니야. 하기 싫은 게 어떻게 선(善)이겠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주저하던 것을 과감하고 용감하게 행동에 옮기는 일이지.

 
최선을 다했던 순간들을 떠올립니다. 다시 돌아보아도 후회가 없는 선택들이었습니다. 마법의 언어를 이해하고 탐색해 온 지, 어언 이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었던 순간도 있었고 ‘왜 자꾸 이런 일이 반복되는 가?’ 싶었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순간에도 직관의 언어가 싸인을 보내면, 늘 최선을 다해 선택하고 도전해 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멀린은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멀린은 비비안의 탑이 있다면 유폐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주선을 타고 스타게이트를 넘어갈 수 없다면 말입니다.

 

나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수첩에서 종이 한 장을 떼어내 내가 검으로 하고자 하는 것들을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종이를 정성스레 접어서는 길가의 돌 아래에 넣었다. 페트루스의 이름과 우정을 기억하기 위해. 머지않아 종이는 부식되어버리겠지만, 나는 페트루스에게 상징적으로나마 전해주고 싶었다.

그는 이미 내가 검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알고 있었으리라. 나 또한 페트루스에게서 부여받은 임무를 완수한 것이었다.

_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中

 


나는 글래스톤베리 수도원 벤치에 앉아, 이번 여행의 가이드북이 되어 준 <순례자>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 내려갔어. 그리고 이 구절에서 나 역시 같은 의식을 수행해야 한다는 직관을 얻게 되었지. 수첩은 없고.. 적을 만한 종이를 찾아보니 5파운드 지폐가 눈에 띄더군. 작년에 다 못 쓰고 가지고 있다가 이번에 다시 가져왔는데, 신(新)권이 발행되어서 지금은 사용할 수가 없는 구(舊)권이 되었더라구. 그 구권 5파운드 지폐에 나도 이번에 부여받은 으로 하고자 하는 것들을 적어 내려갔지. 고민할 것도 없었어. 내게 계시처럼 주어진 사명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거든. 그리고 그것을 잘 접어서 여권커버에 보관해 두었지. 이제 여행을 떠날 때마다 나는 나의 사명과 마주하게 될 거야.

 
간절히 원했던 것도 아닌데, 예상치도 못하게 멀린은 자신의 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완수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때에 그는 알아차렸어야 합니다. 우주선과 스타게이트는 멀린에게 아직 허락되지 않았다는 걸 말이죠. 그래도 미련을 가지고 꾸역꾸역 여기까지 왔건만, 하지는 지났고 멀린의 은 수중에 들어와 버렸습니다. 을 받았으니 그는 계속 ‘선한 싸움’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선한 싸움’에서 물러나지 않도록 뒤를 받치고 단단히 서있어야 할 것입니다. 원탁의 기사들과 함께 ‘선한 싸움’을 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선한 싸움’은 자신의 마음이 시켜서 하는 것입니다. 선한 싸움은 우리가 간직한 꿈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 우리 내면에 간직한 꿈들이 힘차게 꿈틀댈 때면 우린 용기백배하지만, 그땐 아직 싸우는 법을 알지 못했지요.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그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을 때는, 전장에 뛰어들 용기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적대시하게 되고, 결국엔 스스로 자신의 가장 큰 적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자신의 꿈은 유치하다거나, 실행하기 힘들다거나, 인생에 대해 몰랐을 때나 꾸는 꿈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말이죠. 선한 싸움을 이끌어갈 용기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꿈을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행복해지는 것은 죄악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이 힘을 지닐 수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승리의 무거운 짐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마침내 실현되려는 꿈을 그냥 놓아버립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복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선한 싸움’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것들에 갇혀 있는 포로들입니다.

_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中

 


검도 없이, 방패도 없이, ‘선한 싸움’을 싸워대다 지쳐버렸어. ‘선한 싸움’을 주저하는 이들을 이고지고, 끌고 가려니, 힘이 남아날 리가 있나. 게다가 그들 몫의 승리의 짐까지 짊어져야 했지. 하늘도 참 야속하지. 그만 데려다 좀 쉬게 해도 좋으련만.. 마치 이제 시작이라는 듯, 검을 던져주고 말이야. 필요할 때는 주지도 않더니.. 불평한들 무슨 소용 있겠어. 이렇게 남겨져 버렸는데..

 
멀린은 본능적으로 사람들에게 ‘선한 싸움’을 독려해왔습니다. 그들의 꿈을 묻고, 왜 시작하지 않는지 다그쳤습니다. 사람들은 멀린에게서 희망을 보았다가, ‘선한 싸움’의 현장으로 내던져질까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습니다. 때로 멀린은 그들을 업고 전투의 현장으로 돌격하였습니다. 두려움의 화살과 비현실성의 장벽이 앞을 가로막아도, 직관의 언어에 의지해 돌파하고 격파해왔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승리의 성배 앞에 도달하게 되면 승리의 성배는 업힌 그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승리의 무거운 짐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실현되려는 꿈을 번번이 놓아버렸습니다. 멀린은 세상 것에 갇힌 포로들을 업고 뛴 것입니다. 도 없이, 방패도 없이 말이죠. 그러다 지쳐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만 우주선을 타고 스타게이트를 통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멀린, 여기는 글래스톤베리입니다. 세계 최고의 뮤직 페스티벌이 열리는 글래스톤베리라구요. 매년 수십만의 밴드의 기사들이 전 세계에서 모여들고, 자신들의 터전에서 하루하루 계속되고 있는, 꿈을 위한 ‘선한 싸움’을 서로 확인하고 격려하는 거룩한 의식의 현장이라구요. 이렇게 지쳐 있을 때가 아닙니다.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자신의 꿈을 위해, 성배의 복원을 위해, ‘선한 싸움’을 이끌어 가고 있는 밴드의 기사들이 태어나고, 등장하고, 데뷔하고, 발현되고 있어요. 멀린은 세상이 곧 멸망이라도 할 듯 우울하지만, 여전히 승전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는 기사들이, 여기 평면지구의 원반 위에서 세찬 질주를 계속 해대고 있습니다. 지구는 여전히 진화하고 있고, 사랑은 여러 가지 형태로 계속 세포분열을 해대고 있어요. 멀린이 떠나온 동방의 저 작은 나라 역시, 온 세계가 주목하는 ‘선한 싸움’의 승전가를 퍼트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기 이곳, 전 세계 뮤지션들의 본고장 영국에, ‘선한 싸움’을 싸우다 와장창 박살 나 버린 한스의 밴드를 끌고 온 장본인입니다. ‘마법사 멀린’ 당신 말입니다.

그때, 멀린의 휴대폰에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습니다. 런던의 도심 한복판에서, 무사히 버스킹을 마쳤다는 한스의 메시지가 말입니다.

 

“멀린, 버스킹 성공했어요!”

‘잘 했다. 수고했다. 이제 다시 시작이구나.’

 
지친 마법사의 푸념을 우리는 여기까지만 들어 줍시다. 이제는 그와 밴드의 기사들이 함께 싸워낼, ‘선한 싸움’의 승리의 성배만을 기대하고 기다려 봅시다. 그러려고 마법사에게 이 찾아 온 겁니다. 그러려고 이 멀리 지구 반대편에서 순례의 버스킹을 했어야 했던 겁니다. 이 밴드의 기사들의 성지인 글래스톤베리 수도원의 벤치에서, 5파운드 지폐에 적어 내려간 멀린의 꿈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마침내 모든 사명이 완수되는 그때에, 우리는 마법사 멀린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의 꿈이 이루어지려면 우리의 꿈이 이루어져야 할테니까요.





박살 난 유리창은 암스테르담에 버려져 있다 | 선한 싸움 그리고 밴드의 기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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