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시티 프리퀄] 에필로그

in #stimcity6 years ago




에필로그



여행은 사람을 성장하게 합니다. 도망갈 곳 없이 오로지 현재, 그리고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직면하기 두려울 때, 우리는 같이 여행을 떠난 일행에게 그것을 전가합니다. 자신의 두려움을 상대의 단점으로 변환시켜 자신과의 직면을 회피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여행은 혼자 떠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오롯이 자신과 대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행과 함께 하는 여행은 오히려 속속들이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줍니다. 혼자라면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칠 자신의 모습을, 오히려 남에게 전가함으로써 거울을 보듯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행 중 일어나는 갈등은 실은 자신과의 갈등입니다. 자신의 그림자인 줄도 모르고 치열하게 대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멀린과 한스 그리고 잭은, 45일간의 버스킹 순례 여행를 통해 다양한 모습의 자신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용감하게 계시를 따랐던 소녀와 구정물도 마다 하지 않던 소녀, 머뭇거리다 머리에 구멍이 난 주교와 다 늙어서 인생의 밀린 숙제를 하느라 쇼를 해야 했던 시골의 귀족, 결과 없는 수고에 절망한 제자와 아들을 잃어야 했던 어머니, 일요일에는 닭을 먹여야 한다는 왕과 사순절에 소시지를 먹게 해달라던 종교개혁자, 알을 뚫고 나오려던 작가와 공동체를 꿈꾸던 천재 건축가,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해야 했던 연금술사와 사랑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포기했던 남편과 아내, 만인의 사랑을 받았으나 평생 거절감에 시달려야 했던 동화작가와 목숨을 걸고 금기를 깼던 수녀와 사제,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믿음에 무너져 내린 장벽과 박살이 나버린 유리창까지.. 모두 우리의 또 다른 얼굴이며 우리 생의 숨어있는 그림자입니다.

나는 멀린이 이제 그만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마법사로서의 자신의 터전을 찾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것이 집이든 탑이든 말입니다. 나는 한스와 잭의 밴드가 박살 난 유리창을 갈아끼우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밴드든 공동체든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미노 데 버스카(Camino de buscar)’의 여정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기를 소원합니다. 자신을 찾아 나선 마법사와 밴드의 기사들의 역사가, 이 카미노의 도상에 계속 기록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믿는 자들에게는 현실이며,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판타지입니다.




2017년 8월 대학로에서

M.멀린






박살 난 유리창은 암스테르담에 버려져 있다 |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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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도 훨씬 지난 글인데 방금 막 붓을 놓은 것 같네요.

기대가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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