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처음부터 다시

in #stimcity4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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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된 버릇이 있다. 타자를 치다가 오타가 나면 문단 전체를 지우고 다시 치는 버릇이다. 오타만 수정하면 될 텐데. 자동반사적으로 문단을 다 지워 버린다. del, del, del.. 다다다다다. 페이지 전체는 아니다. 문단에 한해서 그렇다. 페이지 전체에서 오타가 난 건 그것만 수정한다. 그런데 꼭 문단, 그러니까 하나의 흐름을 가진 작업에 관해서는 '처음부터 다시'를 시전하고 만다. 그런 건 기가 막히게 손이 느낀다.



단지 타자 치는 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요리를 하다가 이게 아니다 싶으면 다 버리고 새로 시작한다던가 (요리는 거의 하지 않지만), 모서리가 좀 구겨졌다고 기껏 쓴 편지를 다시 쓴다던가. 무언가 일을 진행하다가 좀 핀트가 나갔다 싶으면 처음부터 다시 하려고 드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성향, 습관, 무의식 같은 것이다. 나이 들면서는 좀 나아져서 수정해서 사용하기도 하는데 어릴 때는 그게 좀 심했다.



그래서인지,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새로 시작하는 것은 상쾌하고 기분이 좋다. 그래서 자꾸 새로 시작하려 든다. 새로운 일에 참여하거나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을뿐더러 자꾸 그 기분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건 자신감의 원천 같은 것이다. 뭐든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그러다 보면 문제는 마무리이다. 시작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마무리 짓는 일에 소홀할 수 있다. 에너지를 나누어 쓸 수 없으니. 다 자기에게 맞는 분야가 있기 마련이다. 시작하는 일에 주로 종사한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러나 시작하는 어떤 일에도 마무리가 필요하다. 그것마저 소홀하면 작심삼일, 용두사미가 되고 만다.



어린 날에는 시작하는 일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었던 것 같다. 덕분에 기획력이 일취월장했다. 문제는 마무리이다. 결과를 보는 것. 그것은 성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패하더라도 끝까지 해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시도만 하다 말면 배우는 게 없기 때문이다. 뭐 당연한 얘기를 하고 있다.



번번이 도모가 중단되자, (실패가 아니다 중단이다. 마법사는 시작한 모든 일은 성공 또는 실패하기까지 중단으로 여긴다. 또 할 거니까, 어떤 식으로든 하고 있는 거니까.) 오기 같은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끝까지 해야지! 왜 하다 마는 거야? 물론 마법사는 시작을 즐기기는 하지만, 결과를 중요하게 여기기도 한다. 그래서 혼자 하는 일은 하다 마는 경우가 별로 없다. '시작을 말지.' 그건 마법사의 중요한 신조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시작과 결과 사이가 휑~해지는 경우가 많다. 여럿이 시작했다가 혼자 남아서 마무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마법사의 고독은 그 공간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생겨난 의식은 '시작한 모든 일은 나의 일이다.'라는 생각이다. 아, 이것은 생겨났다기보다 타고 태어난 지도 모른다. 소년 시절의 마법사는 친구들과 약속하면 1시간에서 심지어 2시간을 먼저 나가서 기다렸다. 그러면 친구들은 보통 1시간에서 2시간을 늦었다. 아예 안 나오거나. 기다리다 약속시간이 1시간 정도 지나면 친구 집에 전화를 한다. "OO이 집에 있어요?" (휴대폰이 없던 시절) 그러면 집에 있는 놈은 없다. 집에도 없고 약속장소에도 없다. 그게 화가 날 만도 한데 마법사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런 일에 익숙했다. 나는 약속을 했고 나는 약속을 지켰고. 그럼 된 거다. 그러다 나중에는, 약속을 지키는 친구들을 만나면 신기하기까지 했다. 얼마나 늦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나오면 된다. 고마운 일이고. 덤이고. 그런 의식이 원래 있었고 강화되면서 습관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리고 유독 마법사 주변에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이들이 많은지, 아님 모두들 그렇게 안 지키는지 잘 모른다. 그런 건 별로 중요치 않다. 다만 마법사는 시작했고 결과를 확인했으니 된 거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1~2시간 일찍 나간 게 아니다. (물론 마법사가 언제나 약속 시간에 철저한 건 아니다. 조금 늦기도 한다.) 그냥 기다리는 시간이 좋았다. 이렇게 말하면 좀 이해가 안 갈 수도 있는데, 나는 기다리는 시간 자체가 좋았다. 아니 시작하는 걸 즐겼다고 말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 테다. 약속은 시작의 증표이니까. '얘들아, 이거저거 할래?' '좋아 그러자.' '그럼 어디 어디에서 몇 시에 만나.' '오케이 그때 보자.' 이것은 시작이고 나는 그것이 좋다. 그리고 장소에 나가서 누가 오든 말든 기다리는 것은 시작이 결과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시작을 즐기지만, 일단 시작했으면 결과를 보아야 하는 마법사의 놀이인 것이다. (물론, 바람맞은 걸 확정하기 전까지 그것은 '함께'였다.)



시작했으면 결과를 봐야 한다는 의식은 기다림을 지탱시켜주는 중요한 에너지이다. 시작을 즐기는 사람은 마무리 짓는 일에 소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법사는 시작과 결과의 과정을 모두 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하던 하지 않던, 나는 내 일로 시작했으니 결과도 마무리도 나의 일이야.'라고 생각하면 하게 되고 기다리게 되고 마무리 짓게 된다. 혼자 하는 일이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아니다. 누구나 그렇지는 않더라.) 함께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마법사는 함께 하지만 그건 일종의 플러스알파일 뿐. 모든 일은 마법사의 일인 것이다. 이 미묘한 차이란.



그 습관은 감상에도 영향을 준다. 마법사는 읽기 시작한 책을 가능한 끝까지 읽으려 든다. 영화도 마찬가지. 읽다 만 것들, 보다 만 것들이 남아 있으면 마음 한켠에 뭔가가 뭉쳐져 있는 것만 같다. 시작한 작품은 일단 끝을 봐야 한다. (나이 들어 좀 느슨해지긴 했다.) 대신 많이 오래 고른다.



그 습관은 일종의 루틴이기도 하다. 외출하고 돌아와서라든지 여행 중이라든지, 마법사는 귀가와 출타 시에 고정적으로 하는 행동 패턴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피곤해도 루틴을 지킨다. 아니 지켜진다. 그 절차를 무시하면 마치 운동선수가 꺼림칙해 하는 징크스처럼 마음에 무언가 남는다.



관계 역시 그렇다. 마법사는 끝을 본다. 그래서 쉽게 시작하지 않지만 일단 시작했으면 반드시 끝을 본다. 사람들은 때로 왜 그런 인간을 손절하지 않느냐고 한다. 사랑하냐고? 좋아하냐고? 얻어 먹을 게 있냐고? 그건 모르겠다. 다만 마법사는 시작했으니 끝을 보려고 할 뿐. 그 시작과 끝을 잇는 건 상대와의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소중하지만, 내가 이 사람과 관계를 시작했으니 끝이라고 느끼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할 뿐인 것이다. 그리고 끝이라고 느끼면 그건 끝이다. (그건 진짜 끝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마법사는 언제나 자신과 대화하고 자신과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반대로 끝을 볼 자신이 없으면 아예 관계를 시작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래서 곁을 잘 주지 않는다. 철벽을 두르고 지나가는 마법사를 보았는가?



이 시대는 시작도 어렵고 끝도 어렵다. 사람들은 주저하며 시작하지 못하고 시작하고서도 끝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전문성이란 퀄리티와 상관없이 단지 끝까지 남아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뭘 끝까지 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유혹 거리가 많고 좋은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꼭 맞는 것을 찾기는 더더욱 어려워졌다. 맛보느라 하나의 음식도 제대로 만족스럽게 먹지 못하는 뷔페사회를 살고 있는 것 같다. 새로운 플랫폼이 날로 등장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이 플랫폼에서 만나던 사람을 저 플랫폼에서 만나고, 여기서 보던 콘텐츠를 저기서 볼 뿐이다. 형식이 다양해지고 내용도 다양해졌지만, 사람은 언제나 그 사람이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함께 하는 건 '나'뿐이다.



타자는 오타가 나면 수정하면 되는데 관계는 그럴 수가 없다. 수정하려 들면 떠나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오류 난 관계를 문단 지우듯 다 지우고 매번 다시 시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마법사가 관계들 속에서 수정 또는 문단 삭제 뒤 재시작 대신 선택한 방법은 '나와 함께' 하는 것이다. 너가 아니라 나와. 그건 한편 슬프고 외롭지만, 끝까지 함께 해주는 영원한 존재가 있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마저도 없다면 마법사의 시작하기를 즐기는 취향은 어떻게 충족할까? 마무리를 봐야 직성이 풀리는 강박은 무엇으로 해결할까? 그러나 그렇게 해서 무언가를 시작하고 시작한 일의 결과를 보았던들 행복할까? 직성은 풀었지만, 행복은 요원한 것이 아닐까?



인생을 살면서 '함께'하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고 기적적인 일이다. 게다가 동고동락한다면. 함께 도모하고, 함께 노력해서 얻은 결과를, 함께 경험하는 일은 매우 어렵고 매우 기쁘고 매우 행복한 일이다. 그것은 소중하지만 소중한 만큼 지독한 일이기도 하다. 시작과 끝을 보기 위해 에너지를 분산시키지 않고 일에 집중하지만, '함께'하기 시작하면 에너지를 나누어 쓸 수밖에 없다. 약속 시간에 '함께' 하기로 한 '누가' 나타나야 하고, '함께' 하기로 한 '그것'을 해와야 하고. 그러나 사람들은 2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고, 해오기로 한 일을 해오지 않고. 그것 때문에 갈등하고 싸우고 반목하고 상처 주고 오해하고. 그런 것들에 마음을 쏟다 보면, '누구' 없이라도, '누가' 하건 말건 끝까지 일을 끌고 갈 에너지가 고갈되고 만다. 그러나 그것에 에너지를 쏟지 않고 철벽을 두르면 끝을 볼지언정 기쁨과 슬픔, 환희와 절망을 함께 할 '누군가'는 없는 것이다. 그건 행복은 아니겠지. 그렇다고 단지 '함께'를 위해 원하지 않는 일을 시작할 수는 없다. 원하지 않는 과정과 원하지 않는 결과를 단지 '함께'를 위해 감수할 수는 더더욱 없다. 그래서 마법사는 원하는 '그것'을 외친다. '함께' 하자고 외친다. 여기 붙어라, 여기 붙어라. 물론 좋은 것을 만나면 마법사도 붙었다. 그런데 정작 지가 하자고 해놓구선 하다 마는 인간도 태반이더라. 그들은 누구와 '함께' 한 건지. 그래도 마법사는 여전히 시작한다. 시작에 동참한다. 그리고 끝을 보았다. 끝까지 가는 중이다. 혼자라도 가야겠다. 기다리더라도. 그러다 그러다 보면 언제나 혼자 남고, 혼자되었으니 처음부터 다시 하게 되고. 마법사는 늘 '나'와 함께 하는 중이다.



'함께'가 중요하다면, 우리는 파괴되어야 할 것이다. 결과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상처받고 버림받고 또다시 혼자 남겨질 것이다. 그것을 각오해야 한다. 용두사미와 작심삼일, 하다 말고 도망친 이들의 남은 것들을 모두 이고지고 남겨져야 한다. 아니면 먼저 떠나고 배신하고 상처 주어야 한다. 2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말아야 하고 약속을 뒤집어야 한다. 주든지 받든지. '함께'는 그것을 전제로 한다. 아주아주 운 좋게 끝까지 '함께'하는 누군가를 만날 수도 있다. 사람을 고쳐 쓸 수 없으니, 수정할 수 없으니 그건 어디까지나 복불복. 이것도 저것도 싫으면 시작할 수 없다. 그래서 시작도 하지 못한 채 '혼자'인 것이다. 그러나 마법사는 시작하고 끝을 맺으면서도 '혼자'이다. 철갑을 두른 것 같지만 시작도 못 하고 갇혀 있는 건 너이지 마법사가 아니다. 철갑을 두른 건 시작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끝을 봐야겠기 때문이다.



나이가 조금 더 들면, 다시 같은 생을 반복할 수 있다면, 이번에는 상처받더라도 '함께'만을 추구해보고 싶을 것 같긴 하다. 철갑을 두르고 혼자 걸어가는 인생은 좀 지겨우니까. 그렇다고 복불복일 '함께 이룬 결과'를 기대하는 건 도박 같은 일이고 팔자에 속한 일이리라. 할 수 있는 건 단순하다. 파괴되더라도 '함께' 하기. 상처받고 버려지더라도 '함께' 하기.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산산이 조각난 그대에게 존경을 표한다.



휘리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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