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스톤의 느끼는 여행이야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절들 이야기(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in #oldstone6 years ago

직장 일로 충청도에 3년정도 있었다. 덕분에 이곳 저곳 다닐 기회가 있었다. 충청도와 전라북도 지역의 절 집을 찾아 다녔다. 혹시 백제의 흔적이라도 느껴 볼 수 있을까하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하나같이 정유재란때 이쪽 지역 절들이 모두 불에 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제시대에 만들어젔던 유서깊은 절들이 이때 모두 불에 타고 없어졌던 것이다.

충청도나 전라도 지역이외에도 삼남지방의 절집 거의가 모두 소실되었다. 불국사도 그때 불에 타고 말았다.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의 절 집들이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타버렸다는 사실이 특히 안타까웠던 이유는 그때 남아 있던 백제의 흔적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타지 않고 남아 있는 절이라고 한다면 예산의 수덕사 대웅전,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 영주의 부석사 무량수전 등에 불과하다. 그나마 모두 고려시대에 지은 절집이다. 신라시대와 백제시대의 절모습은 영영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저 불타고 남은 흔적을 보고 상상만 할 뿐이다.

당시 왜군들은 왜 절을 모두 불태웠을까 궁금했다. 왜군들의 상당수가 불교를 믿었다고 하는데 절을 불태운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장으로 가톨릭 신자였던 고시니 유키나가가 고의적으로 절을 불태웠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런데 그것도 아닌 듯 하다. 만일 고시니 유키나가가 가톨릭 신앙때문에 절을 불태웠다면 당시 삼남의 대부분 지역에서 사찰 방화가 일어난 사실을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고시니 유키나가 혼자 삼남지방의 모든 절에 불을 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왜군들이 절에 불을 지른 이유는 아마도 승병때문이 아닌가 한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은 관군과 함께 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승병들은 거의 정규군과 같은 위상을 지녔던 것 같기도 하다. 충무공 이순신도 작전을 구상할때 승병장들을 불렀다고 임진왜란에 기록하고 있다.

왜군들은 저항의 근원을 제거하기 위해 절에 불을 질렀을 것이다. 왜 우리나라 불교는 임진왜란 때 전쟁에 참가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우리 역사에서 승려 출신으로 국가를 세운 인물이 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궁예다. 어떻게 일개 승려에 불과한 궁예가 국가를 세울 수 있었을까? 혹시 당시의 불교는 우리가 생각하는 지금의 불교와 다르지 않았을까 ? 하는 생각이 떠 올랐다.

여행을 하다가 우연히 논산에서 대전가는 길에 있는 개태사라는 곳에 들렀다. 논산에서 일을 보고 다시 대전에 가는 길이었다. 우연히 개태사라고 하는 절이 있는 것을 보았다. 오래된 듯 얼마 되지 않은 듯 묘한 분위기의 절집이어서 차를 세우고 들어가 보았다. 원래는 고려 태조 왕건이 건립했다고 하는데 이후에 퇴락했다. 최근에 들어 어떤 스님이 개태사를 다시 세우겠다는 발원을 하고 불사를 일으켰다고 한다. 그 와중에 어머어마하게 큰 철확을 발견해서 개태사에 옮겨 놓았다. 절 한쪽 구석에 철확이 있었다. 아주 큰 가마솥이라고 보면 된다. 너무 크기 때문에 그것으로 밥을 했을 것 같지는 않고 된장국 같은 것을 끓였을 것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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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도 큰 철확으로 된장국을 끓였다면 아마도 5백명 이상 분은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절이 커도 그렇지 500명 이상되는 밥과 밥찬을 해댈 정도로 절에 승려들이 많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절에 있는 스님에게 왜 이렇게 큰 철확이 절에 필요했을까요 ? 하고 물어 보았다. 스님 답변이 고려시대에는 절에 있는 승려들이 수양도 하면서 군사훈련도 했다고 한다. 당시의 절은 마치 군대와 같은 역할도 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말이 맞는 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러고 나니 그 때까지 지니고 있던 의문들이 풀려가는 것 같았다. 불교계에서 왜 호국불교라고 하는 지 말이다. 그냥 나라 잘되라고 기도만 하는 정도라면 호국불교라고 유난을 떨 이유는 없다. 정말로 변란이 발생하거나 외침이 발생하면 승병들이 나서서 무기를 잡고 싸웠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승병들이 몽골에 대항해서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 열전에 승려 김윤후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김윤후는 1232년 몽골의 제2차 침입당시 처인성에서 활을 쏘아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를 죽였다. 살리타가 죽자 몽골군은 철수 하고 만다. 이후 1253년 몽골의 제5차 침략 당시에는 충주성에서 몽골의 공격을 격퇴하기도 했다. 이렇게 고려의 호국불교는 팔만대장경을 만들고 기도를 하는 수준을 넘어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숭유억불의 상황속에서도 불교는 호국의 전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가한 것이다. 불교계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 중 약 3만명이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관군들이 거의 모두 붕괴된 상황에서 조직체계를 지녔던 승병은 관군을 대신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왜군들은 승병의 근거지가 되는 불교사찰을 모두 불살랐던 것이다.

임진왜란때 소중한 사찰들이 모두 불에 타버렸지만 그 이후에 중창불사 사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조정에서도 임진왜란때 불살생계를 파계하고 생명을 버리면서 싸워준 승려들의 공덕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절을 보니 그 이전에 보던 것과 다른 느낌이 들었다. 내가 보는 절 하나하나가 모두 역시의 아픈 흔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 각별한 마음으로 절을 돌아다녔다. 쌍계사, 내소사, 금산사, 법주사, 개암사 등등이었다.

앞으로 몇번에 걸쳐 임진왜란때 불탄 사찰중 충청도와 전라북도 지역의 사찰을 다니면서 생각하고 느꼈던 점들을 써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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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절은 역사의 한 부분을 크게 차지함을 다시한번 느꼈습니다.
승려들의 운동이 정말 한반도의 땅에 큰 힘이 된 것임은 분명하네요.

불교에 대한 좋은 글 잘 읽었고요.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니 슬프기도 합니다.~^^

엄청나게 큰 철확이 승려들의 밥을 짖던 그릇이었군요
놀랍네요^^

한 지역의 기반을 송두리 째 흔들어버릴 의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정복이라는 것은 관이 아니라 민을 장악했을 때 최종 완성되는 것이니까요.

불교 신자가 많았던 왜군이니 사찰이라는 인프라가 지역 사회에 어떻게 기능할지 알기에 전부 없애려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오늘도 사찰에 대한 글 잘읽었습니다.
예전 불교하고 지금 불교는 좀 다르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게 국을 끓이는 용도로 쓰였다니 대단하네요!!!
올드스톤님 태풍조심하세요 ㅜㅜ

그랬던 과거의 스님들이 요즘은 권력을 잡겠다고 서로 싸우고 있다는 것도 아이러니해요...

개태사 철확이네요.

승병들은 대단했죠
임금도 버리고 도망간 나라에서 의병(백성)과 함께 끝까지 싸웠다고 알고 있어요..
국사 시간에 승병들이 꽤 훌륭한 군사조직이었단 내용을 선생님께 들었던 기억이 나요
나라를 위해 목숨바쳐 헌신했다고도 배웠어요
그렇게 모두 함께 지켜낸 나라인데...그 마음들이 다시 모여 우리나라가 정말 강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올드스톤님께서 내소사를 어떻게 느끼셨나 궁금해요
시댁이 가까운 곳이라 내소사에 몇 번 가봤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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