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내가 선정한 조선의 10대 뉴스

in #kr-history6 years ago
  1. 조선의 건국 - 태조
    위화도 회군
    고려 시대 말 우왕과 최영은 철령 이북 지역 요구를 거부하고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다. 요동 정벌에 반대하던 이성계는 명령에 따라 요동으로 출정하였지만, 여러 가지 구실을 내세워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회군하였다. 그리고 우왕과 최영을 몰아내고 정치, 군사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곧이어 이성계는 정도전 등 신진 사대부 세력과 손잡고 기울어 가는 고려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개혁 과정에서 신진 사대부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여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었다.
    정도전 등의 급진파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데 뜻을 같이하고 이에 반대하는 정몽주 등의 온건파를 제거하였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하여가-이방원


선죽교 :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 의해 선죽교에서 살해되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고려사"에는 길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단심가 - 정몽주
조선의 건국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는 피폐해진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고 부족한 국가 재정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고려 왕조를 유지하려는 세력을 제거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건국하였다.

조선은 유교적 교양과 지식을 갖추고 엄격한 교육과 시험을 통해 선발된 관료가 정치를 이끌어 나가는 양반 중심 사회로 발전하였다.

  1. 나라의 언어 창제 (한글) - 세종
    세종은 일반 백성도 누구나 쉽게 읽고 쓸 수 있는 우리 문자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집현전 학자들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28자의 표음 문자로 된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은 우리말을 그대로 읽고 쓰기에 편리한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문자였다.


훈민정음해례본


삼강행실도

세종은 훈민정음으로 "용비어천가"를 짓도록 하여 조선 왕조의 정당성을 강조하였고,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여 백성이 유교 윤리를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불경, 농서, 병서 등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편찬하였다. 이로써 훈민정음은 민본 정치를 실현하고 민족 문화를 발전시키는 바탕이 되어 민족의식의 성장과 국력의 발전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1. 사림의 성장과 붕당의 출현
    사림의 등장과 성장
    사림이란? 고려 말 온건파 신진 사대부였던 정몽주,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아 지방에서 성리학 연구에 힘쓴 학자들을 일컫는다.
    훈구 세력이란? 세조의 즉위를 도왔던 공신들이 중앙의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토지와 노비를 늘려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사림은 훈구 세력이 중앙 집권 체제를 강조한 것과 달리, 향촌 자치를 내세우며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한 왕도 정치를 강조하였다.
    사림은 성종이 즉위 후 주로 3사에 배치되어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하고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연산군 시기에는 사림이 피해를 입는 사화가 발생되었었다. 그러나 향촌 사회에서 꾸준히 세력을 키웠던 사림은 선조가 즉위하면서 다시 정계에 진출하였고, 이후 정치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사림의 분화와 붕당의 출현
사림은 양반의 여론을 모아 정책에 반영하는 등 올바른 정치를 이끌어 가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서 사림은 명종 때 외척이 정치에 참여하면서 생긴 문제의 처리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었다.
결국, 학문적, 정치적으로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붕당을 형성하면서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 붕당은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이 있었는데, 대체로 이황과 조식의 학문을 계승한 사림을 중심으로 동인이 형성되었다. 반면, 서인에는 주로 이이의 문인들이 가담하였다. 이 들은 나라의 정책을 실현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서로를 비판하고 견제하면서 정치를 이끌어 나갔다.


붕당의 형성과 분화

  1. 왜란의 극복
    일본이 조선에 무역의 확대를 요구하며 자주 소란을 일으키자 조선 정부는 통제를 강화하여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이 점차 커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분열과 혼란을 수습하고 집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대륙 침략 야욕을 펴기 위해 조선을 침략하였다.
    전쟁 없이 비교적 평화를 누리던 조선은 군역 제도의 문란으로 국방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전쟁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못한 조선군은 조총 등 우수한 무기를 앞세우고 쳐들어오는 일본 군을 막아 내지 못하였다. 선조는 의주까지 피란하고 명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일본의 조총

조선의 운명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기 상황에 처하였다. 이때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옥포에서 승리를 시작으로 남해 바다에서 연전연승을 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다.
조선의 전국 각지에서 곽재우와 같은 유생과 승려 휴정과 유정이 이끄는 의병이 조직되었고, 여기에 농민이 합세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명이 지원군을 보내요 조선과 명의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였고,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크게 승리하면서 한양을 되찾을 수 있었다.
지옥 같은 전쟁과 반성의 기록, 징비록
"징비록"은 왜란 당시 영의정이던 유성룡이 정계에서 물러난 후 쓴 책이다.
유성룡은 자신의 잘못을 비롯하여 조정 내의 다툼, 임금에 대한 백성의 원망 등 임진왜란 전후의 어려운 현실을 사실적으로
기록하여 후손에게 값진 교훈을 주고 있다.
계사년(1593) 4월 20일, 한양이 수복되었다. ...... 살아 있는 사람들조차 모두 굶주리고 병들어 있어 얼굴빛이 귀신같았다. ...... 종묘, 대궐, 종루 등은 모두 재로 변하였다.
"징비록"

  1. 붕당정치와 탕평책의 실시 - 영조와 정조
    붕당 정치의 운영과 변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과 북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서인은 남인과 연합하여 정국을 운영하였다. 하지만 현종 대에 두 차례 예송을 거치면서 두 세력 간의 대립과 갈등이 심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서로 정권을 잡을 때마다 권력을 독점하고 상대 당의 인사들을 죽이거나 쫓아냈다(환국). 환국을 거치면서 붕당 간의 균형은 무너졌고, 건전한 견제와 비판이 사실상 사라지면서 붕당 정치의 본래 의미는 크게 퇴색하였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치
영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붕당 간의 싸움이 가져온 폐해를 심각하게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즉위 후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특정 붕당에 치우치지 않는 정국 운영과 인사 정책을 내세운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영조는 붕당의 근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고, 붕당 간의 갈등을 증폭시키던 이조 전랑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붕당 간의 대립은 사라지지 않았다. 영조가 승하한 후 정조는 영조의 정책을 계승하여 집권하고 있던 노론 세력을 견제하면서 소론과 남인 세력도 적극적으로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영조의 탕평책
동서 분당 이후 2백 년 만에 마침내 서로 살상하였고, 그 가운데 서인은 불행히 노론, 소론으로 나뉘어 또 살상하게 되었다.
이들은 서로 원수같이 미워하여 용납하지 않는 것이 물과 불보다 심하다. 그리하여 온 나라 사람이 물과 불과 같이 되었다.
...... 이른바 남인, 서인, 노론, 소론 등 여러 색목이 만약 한 마음르로 화학하여 탕평할 수 잇다면 나라를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영조실록"


탕평비 영조가 당쟁의 폐단을 일깨우기 위해 성균관에 세운 비석이다. "남과 두루 친하되 편당 짓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편당만 짓고 남과 두루 친하지 못하는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생각이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단어 쏙쏙↑↑

환국 : 정권을 잡은 붕당이 급격하게 바뀌는 정치 상황을 뜻한다.
예송 : '예를 둘러싼 논쟁'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붕당 간의 학문적 차이와 정치적 입지, 왕을 바라보는 시각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탕평 : 탕평이란 임금위 정치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평한 상태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1. 서민 문화의 발산과 확산
    신분제가 동요하고 상민의 경제적 형편이 나아지자 교육열도 크게 높아졌다. 또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사회의 부정이나 부조리를 거침없이 풍자하는 문화적 경향이 뚜렷해졌다.

한글 소설과 사설시조
서민의 생활 모습이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 한글 소설로는 현실 사회의 부조리를 소재로 한 "홍길동전"이나 신분을 뛰어넘는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춘향전" 등이 널리 읽혔다.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사설시조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서민의 솔직하고 소박한 감정을 표현하거나 해학적으로 현실을 풍자하였다.

판소리와 탈춤
서민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함께 즐긴 오락으로는 판소리와 탈춤이 있었다. 판소리는 광대가 북을 치는 고수와 함게 창과 사설로 솔직하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형태의 오락이었다.
탈춤은 양반의 위선을 폭로하거나 사회 모순을 풍자하여 서민의 속을 달래주는 오락으로 정착되어 성행하였다.
이러한 놀이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시나 포구와 같은 곳에서 자주 공연 되었다. 장시는 상거래뿐만 아니라 문화를 위한 공간이나 소통의 장으로서 민중 의식이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서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진 공연 예술은 상품 화폐 경제의 성장을 배경으로 하였으며, 의식적으로 점차 각성하고 있는 서민이 사회 모순을 비판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가 위한 중요한 방편이기도 하였다.


팔탄판(김준근) 가운데 취발이가 있고 악사의 왼쪽으로부터 영감, 말뚝이, 할미, 양반, 승려, 여사당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다.

7. 세도정치 - 순조, 헌종, 철종
영조와 정조가 추진한 탕평책은 많은 성과가 있었지만 한계도 가지고 있었다. 특정 붕당과 소수의 가문을 중심으로 정치권력이 서서히 재편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개혁에 대한 기대는 좌절되었고, 왕권은 약화되어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순조, 헌종, 철종의 3 대 60여 년 동안 안동 김씨, 풍양 조 씨, 등 노론 출신의 몇몇 유력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고 국정을 좌우하였다.
세도 정권의 등장으로 정치 기강은 크게 문란해졌다. 힘 있는 자에게 줄을 대지 않으면 과거에 합격할 수 없었으며, 관직을 돈으로 사고파는 일도 성행하였다. 중안 정치에서 배제된 양반은 향촌으로 내려가거나 잔반으로 몰락하였다.


정조 ~ 철종 대 가문별 당상관 이상 관직 점유율 정 3품 이상 당상관직을 배출한 전체 56개 가문 중, 이들 6개 가문이 당상관직의 35.3%를 사실상 독점하였다.

단어 쏙쏙↑↑

세도 정치 : 세도는 본래 '세상의 도리'라는 뜻이었지만, 19세기에 접어들어 정치 담당자가 이를 빙자하여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는 부정적인 의미의 '세도'로 변질되었다.

  1.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운요호 사건
    일본은 서해 강화도에 정박하고 식수를 구한다는 구실로 보트에 군인을 분승시켜 연안을 정타하면서 강화도의 초지진 포대까지 접근하였다. 조선군의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불법 접근한 일본군에게 조선의 초지진 포대에서 포격을 가하자 운요호에서도 맹포격으로 응수하였다. 조선군은 무수한 군기 등을 약탈당하고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으며, 일본군은 단지 2명의 경상자만 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포격전의 책임을 조선에 돌렸으며, 아울러 무력을 배경으로 개항을 강요하였다.

강화도 조약
1876년(고종 13년) 일본은 전권대사를 조선에 파견하여 운요호 포격에 대한 힐문과 개항 요구를 강요했다. 조선 정부에서는 중신 회담을 거듭한 끝에, 국제 관계의 대세에 따라 응하기로 하고, 전권대신을 강화도에 파견하여, 조선과 일본 양국 사이에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강화도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은 부산과 원산과 인천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한다.
둘째, 치외 법권을 인정하여, 개항장에서 일본인의 범죄가 발생할 경우 일본인은 일본인의 법률에 의해 처벌된다.
셋째, 조선의 연안 측량을 자유롭게 한다. 넷째, 조선과 일본 양국은 수시로 외교 사절을 파견하고 일본 화폐의 통용과
ㅡ 무관세 무역을 인정한다.
이후 조선은 일본을 견제하려는 청나라의 주선으로 미국과도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1882년),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과 우호 통상 조약을 맺기 시작했다.

  1. 대한 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기를 선포
    1897년 조선은 나라 이름을 대한 제국으로 변경했다. 아관파천 직후부터 최익현을 비롯한 유학자들은 국왕이 외국 공사관에 머무는 것은 국가의 수치라고 하면서 궁궐로 다시 돌아올 것을 건의했다. 독립 협회 또한 자주성 회복을 위하여 고종이 환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간 지 1년 만에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이때 고종은 바닥으로 떨어진 나라의 위신을 드높이고 자주독립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하여 국호를 대한 제국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연호를 광무로 정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구단을 만들어서 이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칭호는 '황제'로 사용하였는데, 그 까닭은 중국, 일본과 대등한 입장이 되기 위해서이다.
    광무개혁
    대한 제국은 근대 국가로 발전하기 위하여 여려가지 개혁을 추진하였다. 기존의 개혁들과는 달리 황제권 강화를 핵심으로 추진하였다. 광무개혁으로 농민 생활을 안정과 재정 확보를 위해 토지 소유자들에게 토지에 대한 근대적 소유권을 인정한 증서인 지계를 발급하였으며, 상공업 발전을 위하여 회사와 공장들을 설립했고, 한성은행, 천일은행을 개설하였다. 또한 정부는 기술자와 경영인 양성을 위하여 실업학교를 많이 만들어 상공업자를 양성하는 상공 학교, 광산 기술자를 기르는 광무 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이외에도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한 군제를 개편하고 군사 수도 많이 늘리고, 고급 장교의 양성을 위해 무관 학교도 설립하였다.


원구단과 황궁우 고종은 1897년 소공동에 원구단을 짓고 그해 10월 12일 이곳에서 대한 제국 황제 즉위식을 가졌다. 현재는 황궁우(왼쪽 팔각 건물)만 남아있다.

  1. 3.1운동
    3.1운동은 일제의 폭력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의 저항으로 일어났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1910년대에 지속적으로 나타난 이러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약탈로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생활은 크게 악화되었으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지가 높아졌다.
    3월 1일에 미리 계획했던 대로 서울과 평양·의주·선천·안주·원산·진남포 등 6개 도시에서 동시에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의 거행 장소를 군중들이 모여 있던 탑골공원에서 서울 인사동의 태화관으로 일방적으로 변경하였다.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29명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서영환을 통해 독립 통고서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했다.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장소 변경에 당황하여 강기덕 등을 민족대표들에게 보내 항의하기도 했으나, 2시 30분 무렵에 따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두 갈래로 나뉘어 종로·서울역·정동·이화학당·서대문 등을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3·1운동은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도시 등 교통이 발달한 곳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농촌 등지로 전파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갈수록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이 늘어나면서 운동의 양상도 비폭력 시위에서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 연해주, 도쿄, 오사카,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 시위가 벌어졌다.
    3.1운동은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을 체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지식인과 청년 학생들 사이에 사회주의 사상이 영향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마치며......
이를 끝으로 조선의 10대 뉴스가 모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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