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과 내부순환도로
고3 시절은 지옥이었다. 어른들은 대학에 따라 인생이 나뉜다고 했다. 입시에 대한 스트레스가 정수리에 원형탈모 증상으로 나타날 즈음, 나는 교실의 답답한 공기조차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거울 앞에서 열심히 연습했던 표정을 장착하고 매일 교무실로 찾아갔다. 아흑! 선생님 선생님, 배가 아파요, 머리가 쑤셔요, 몸살 났어요…. 표정 연기에 진정성이 듬뿍 담겨 운 좋게 조퇴에 성공한 날에는 곧잘 영화관으로 직행했다.
그때 무슨 영화를 봤는지는 다 잊어버렸다. 다만 기억에 남는 장면은 자동차 질주 씬이다. 반항적인 눈빛의 주인공은 항상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머리를 세차게 휘날리며 도시의 밤을 가로지르곤 했다. 그의 한없는 자유로움이 부러웠다. 그때 소원이 생겼다. 어른이 되면 꼭 차를 사야지!
꿈은 생각보다 빨리 이뤄졌다. 제대 후 복학을 준비하고 있었던 나는 너무 오래되어 폐차 직전의 운명에 처한 차를 하나 얻게 되었다. 근사한 차는 아니었지만 네 바퀴가 굴러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스러웠다. 자, 이제 음악을 크게 틀고 이 도시의 밤을 자유롭게 가로지르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막상 꿈이 현실이 되니, 상상했던 장면과는 너무 달랐다. 이 도시는 내 머리카락을 세차게 휘날릴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았다. 차가 너무 많았고, 막혔고, 막혔다. 차를 처음 타본 것도 아닌데 서울에서 차가 뻥뻥 뚫리리라 왜 기대했을까? 내부순환도로는 순환하지 않았고 나는 짜증이 났다. 어느 날 꽉 막힌 도로 한가운데서 운전대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아우 이게 뭔 개고생이여!! 그때 욕망했던 세계와 현실의 간극을 깨달았다. 사람의 머릿속은 항상 욕망하는 대상의 유토피아적인 이미지만 저장한다는 사실도.
심혜정 감독의 개인전에서 그의 영화 <동백꽃이 피면>을 보다가 문득 내부순환도로가 생각났다. 영화의 주인공은 여유있는 중산층 가정의 여성이다. 그러나 남편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듯 그녀의 삶 어디에도 이제 사랑은 찾아볼 수 없다. 어느 날 그녀는 이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환갑을 넘어 집을 가출하고 새 애인과 동거 중이었던 이모였다. 그녀는 이모의 유품인 휴대폰에서 동영상 하나를 재생해본다. 영상 속에서 이모는 애인과 동백꽃밭에서 웃음을 연발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베란다에 놓인 동백꽃 화분 옆에 선다. 그리고 창문 밖의 밤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크레딧이 올라왔다.
서둘러 팜플렛을 꺼내보았다. 감독은 이 영화의 주제가 “사랑”이고, 사랑은 “주체의 죽음”이며, 이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생의 에너지를 만든다” 라고 썼다. 나는 내부순환도로를 떠올리며 슬며시 의문이 들었다. “진짜로?”
주인공이 부러워했던 휴대폰 속 이모의 삶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다. 연애 중인 친구의 SNS에 들어가보라. 혹은 자신의 스마트폰 사진 앨범을 보라. 사랑하는 연인은 항상 행복의 순간만을 전시한다. 우리는 멀리서 타인의 욕망을 동경하지만, 타인의 욕망조차 적당히 은폐된 현실의 일부에 불과하다. 기록으로 말미암아 추억하는 과거는 그렇게 왜곡과 미화의 대상이 된다. 주인공에게 이모가 새 사랑을 만나 진짜로 행복했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취사 선택된 타인의 행복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뿐이다. 이모가 어떤 사랑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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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꼭 찾아보고 싶게 하는 맛난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감독님의 영화입니다. 왓챠에 있다고는 들었어요.
남의 삶도 그 속살을 못보거나 보고싶은 것만 볼 때가 많다고 느끼게 되네요. 중요한 건 나의 삶인데요..
투영하고 싶은 자기 삶을 남의 이미지에서 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그럴 때가 많아요.
소셜 미디어에 나오는 커플사진들은 주로 "행복인증샷" 이 많죠. 주변에 불행하게 살면서 사진찍을때만 딱 3초간 웃는 커플들을 본적이 있었죠. 이들은 항상 서로를 손가락질하고 칭찬하는법이 없지만 사진찍을때만 웃더군요. 그와 반대로 행복한 커플들은 사진을 자주찍어 올리는경우가 적은것 같아요. 굳이 "인증"을 할필요가 없으서 일까요?
맞아요 사진찍을때만큼은 행복행복..ㅎㅎㅎ 행복을 과하게 인증하는 커플을 보면 부럽다기보다는 저러다 헤어지면 어쩌려고 저렇게 광고하나 라는 생각밖에는 안듭니다 ㅎ
맞아요~ 보이는것이 다는 아닌것 같아요^^
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보고싶은 것만 보게 되는것 같습니다.
SNS는 개인의 행복한 순간만을 전시한다는 말이 날아와 박히네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랑은 했는지는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고 단편적인 이미지만 봐서는 알 수가 없겠죠. 격하게 공감합니다.
어떤 사랑을 하셨나요 그래퍼님...(갑자기?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