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카페에 와서 쌀국수 타령...

in #kr7 years ago

20년째 학생질이다. 학생. 대개 특별한 직업이 없는 한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외입국신고서의 직업란에 아마 학생이라고 쓸 것이다. 이 전통은 근래에 갑자기 생겨난 전통은 아니다. 조선시대부터 특별한 벼슬이 없는 사람은 학생이란 직책을 붙여줬다.

현고학생부군신위

학생이 열심히 공부를 했다는 표현으로 존경이든, 진짜 공부를 했다는 사실이든, 어쨌든 직장 못구하면 다 학생인 건 조선시대에서도 이미 그랬다. 물론 공무원만 쳐준다. 심지어 특정한 분야의 프로인 장인도 안쳐준다. 잡스가 조선시대에 아이뻐를 만들고 제사를 받았다면, 그도 학생이다! 그러니까 여튼 남자는 직장, 다시말해 공무원이어야 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공부하는 학생이어야 한다. 아니면 다 그냥 쓰레기. 좋게 표현 하자면 잉여다. 이런젠장! 잉여라니! 사람을 이용하면 안된다고 가르치면서 쓸모여부로 만인이 만인을 취급하다니!

그래도 다행이 나는 학생이다. 20년째 학생질이면 이 분야에서 뭔가 두각을 드러낼만도 한데, 그냥 별볼일 없는 학생이다. 다행인건, 이런저런 알바부업(?)으로 생존하는데 큰 문제는 없고, 공부란 작업이 재미도 있다. 가끔은.

다행인건 조선시대적 사고에 편승해서인지, 학생이란 신분으로 그럭저럭 어영부영 사는게 막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그렇지는 않다.

2천원 이내의 가격에 큰 머그커피 한잔과 6시부터 굽는 빵냄새가 진동하는, 문을 열면 손님오셨음알림벨 소리가 나고, 아침을 깨우는 경쾌한 음악이 적당한 볼륨으로 울리는 그런 카페에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작업하고 싶었을 때가 있었다. 내가 사는 을지로에서 발길이 닫는 곳에서 두어달 아침마다 헤집고 다녔지만, 2천원이 넘거나, 6시부터 빵을 굽지않거나, 앉아서 몇시간 자리차지를 할 수 없는 곳들 뿐이었다. 돌아보니, 몇 년이 흐르긴 했지만 2천원에 사발만한 커피를 먹겠다고 하는 내가 나쁜놈이었다.

-사람은 나쁜 짓을 할 때 자신이 나쁜짓을 하는지 가끔 모를 때가 있다-

가까운 지인이자 같은 연구원에서 일하던 선배님에게 조립한 자전거를 얻었을 때 나는 세종로, 종로, 금호, 명동까지 사방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하지만 결국 나는 적당한 곳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라이프패턴을 찾는데만 2년쯤을 소득없이 보냈다.

그리고 태국을 왔다. 처음엔 못느꼈지만 결코 싸지 않은 전철비, 값은 싸거나 아예 무료도 있긴 하지만 탈 때 마다 달라지는 노선도. 어디 방콕 끝 종점에 두어 번 내려서 고생을 해 본 나는 아주 잘 알거나 정말 확실치 않으면 버스를 잘 타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자전거. 하지만 태국말도, 자전거도 잘 모르고, 자금여유도 없으니 자전거 한 대 사러간다는게 정말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러다 방콕에서 항상 내게 든든한 지인분이 해외 자전거 공장을 통해 비싼 자전거를 1/3의 값으로 구하시면서 나를 끼워주었다. 아 정말 내 주변엔 천사들이 득실득실한다. (그리고 그분은 이제 거의 프로급 라이더가 되었다.)

나는 그 자전거로 점차 방콕에서의 을지로적 과거를 회상하며 나와바리를 넓혀나갔다. 그러기를 1년, 왕복 10킬로 거리에 있는 적당한 카페를 찾았다. 3천원! 아, 태국의 브랜드 커피는 3천원 정도 한다. (태국브랜드 말고, 태국에 있는 브랜드) 매일 출근했다. 공부도 되고, 라이프 패턴도 잡히고, 운동이 되니 살도 빠졌다. 한 6개월쯤 하고나니 그것도 슬슬 지겨워졌다.

내가 사는 약 1킬로 거리에 오래된 건물을 허물고 뭔가를 짓고 있었다. 점점 모양을 갖추는게, "아 저기 카페하면 좋겠네" 생각하며 늘 지나다녔다. 그리고 1년. 아, 그 건물은 카페였다.

8시쯤 일어나서 빨래를 해서 널고 자전거를 타고 중간에 쌀국수집에 들린다. 태국말로 "꾸웨이띠여우" 이게 국수란 뜻인데, 쌀국수 집에서 "꾸웨이띠여우"라고 주문하면 그 다음에 쏟아지는 질문공세 때문에 외국어 울렁증이 있다면 국수를 못먹고 되돌아 나올 가능성이 높거나 아니면 랜덤으로 나오는 국수가 최소한 마음에 안들 수 있다. 태국은 값싼 쌀국수 하나를 주문할 때도 고객의 취향 대여섯가지를 모두 반영한다. 까다롭게 주문해도 된다. 그래서 쌀국숫집에 도착하면, 주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커 - 주세요
센렉 - 작은 면 (보통굵기다)
남 - 평양식 (^^물국수)
마이싸이팍치 - 고수 넣지 말고요
싸이 룩찐 여여 - 어묵 많이 넣어요

커 센렉 남 마이싸이팍치 싸이 룩찐 여여 캅
"보통면 물쌀국수에 고수 넣지 말고 어묵 많이 넣어서 주세요"

요정도 되시겠다. 쌀국수집에 가서 "꾸웨이띠여우"라고 말하면, 눈치없는 평범이하의 쌀국수집 사장님은 그 다음의 주문 사항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아마 아무 반응없이 시무룩한 얼굴로 당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뭐 물론 가끔은 영어를 너무 유창하게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 쌀국숫집 사장님들을 만나서 깜짝깜짝 놀라는 일도 있긴 하다.


일주일에 3-4번은 오니 친해져서 아침에 막구운 튀김도 국수에 2-3개씩 얹어준다. 뭐라고 뭐라고 물어보는데 도통 알아듣질 못하겠다. 다들 이런저런 외국인에게 궁금한 걸 물어본다. 국수집에서 어느날 질문공세가 쏟아졌다.

너 한국 가냐?

이게 언제 가냐는 말인지, 이제 갈거냔 말인지, 가끔 가냔 말인지... 당연하게 못알아 듣는다. 대충 얼버무린다.

응 갔다 올거야.

%$^%$& 타올라이? (%$^%$& 얼마야?)

태국말에선 카운트는 전부 타올라이(얼마)다.

응? 뭐가 얼마야? 아...공항 비행기? 슝슝?

응 그래 그거.

하멍...? (다섯시간 정도?)

그들의 눈이 왕방울만 해진다.)

하먼??? 펭막! (하먼이래~ 진짜 비싸네)

일단 웃음으로 상황을 종료시키며 국숫값 40밧을 낸다. 약 1400원. 자전거를 끌고 카페로 온다. 다섯시간 걸린다는데 뭐가 비싸다는걸까를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들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내가 하멍이라고 발음했던 다섯시간이 그들에게 하먼 (5만밧, 170만원)이란 말로 들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다시 가서 말해볼까? 하긴, 오해를 풀 만큼 말을 할 수 있다면, 오해도 안생겼겠지. ㅋ

이젠 이 카페로 몇 달 째 출근하고 있다. 아침의 일상을 쓰려다가 엉뚱한 말문이 터져버렸지만. 암튼 생각해보니 여유로운 아침, 아침쌀국수, 자전거, 카페에서 작업할 수 있는 환경까지. 오늘 아침의 일상이 꽤 많은 고민과 방황을 겪었던 결과로, 내가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라이프 패턴이란 걸 깨닫고 나니 뭔가 충만해진다. 태국이란 나라, 카페 사장님, 쌀국숫집 사장님, 내 주변의 득실거리는 천사들, 특히 내게 발이 되어준 자전거, 그리고 그 자전거를 구해주신 분, 그리고 KR스티머들에게 이 충만을.


@soosoo의 [일상] 시리즈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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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내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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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분들을 천사로 보시는 눈을 가지셨습니다.

맞네요 이게 정답 ㅎ

@yuki님께도 감사해용~~

캬~ @himapan님 ^^ 감사합니다.

하믄 으로 이해한게 확실하네요. 카페로 출근하시면 카페에선 공부가 잘되십니까? 20년간 공부만 하고 계신다니 곧 두각을 드러내실때가 되신것 같습니다. 전문용어로 하산...이라고 아무튼 행복한 공부 라이프 되세요.

그렇죠?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20년간 공부를 한 건 아니고… 그냥 학생신분… ㅋㄷㅋㄷ 고맙습니다.

주변에 천사가 득실득실한건 수수님이 천사라서 그렇답니다! ㅎㅎㅎ 라이프패턴을 여유롭게 잡으시고 즐기시는 모습이 참 멋지십이다!

에빵님 감사합니다. 천사로 봐주시니 역시 천사시군욥!

수수님이 천사같아서 그래요~ ㅋㅋ

@romi님이닷!!!

ㅎㅎㅎㅎㅎㅎㅎㅎ 수수님이닷~~~~!!!!! > ㅁ</

헐! 에잇! 정의의 이름으로 당신을 보팅해버리겠!

.> ㅂ</ 심~~~~~~~~~~~~~~~~!!!
쿠웅~~~~~~~~~~~~~~~~~~~~~~~~~!!!!!

태국 관광으로만 많이 다니던 곳인데 서핑 시작이후에는 아예 안갔어요
하.지.만. 태국 음식은 사랑이라 열심히 즐겨먹고 있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태국음식은 사랑이죠! 또 오시길 기다릴게요^^

결국엔 어떤 루틴을 만드셨네요! 그리고 충만함을 얻으셨구요.

@piggypet님 넵~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수님의 일상글을 오랜만에 뵙는거 같아요! 충만한 생활을 하고 계시다니 읽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습니다!
쌀국수는 좋아하는데 태국말을 모르네요 ㅋㅋ

고수많이넣고

는 뭐라고 하는걸까요? 이런식으로 수수님을 괴롭혀 드리려는 건 아니고 제가 고수를 좋아해서 알아두려고요 :D

"싸이(넣어) 팍치(고수) 여여어~(마이) 캅(주세요)" = "싸이 팍치 여여어~ 캅" <- 요라믄 됩니당~


@thinky님~ 뭐든 물어보시죠~ 제가 아직 태국말이 서툴긴 한데 먹는것에 관해서는 모르는 말이 없습니당… 제가대식+식도락가거든용~ 캬캬캬

와 진짜 필리핀어를 전혀 모르는 저로서는 외계어나 다름없네요 +_+ 제가 정말 외울 수 있을까요? ㅠㅠ ㅎㅎㅎ
몇개의 언어를 구사하시는 분들을 보면 정말 부러워요!
식도락이시면 맛집을 꿰고 계시겠는데요! 언제 시간나시면 필리핀 쌀국수 맛집도 소개해 주세용 :D

(태국어욤...)

(으으윽... 북키퍼님하고 대화하다 와갖고 갑자기 실수를 했네요;;;ㅋㅋㅋ)

ㅋㅋㅋㅋㅋ

현고학생부군신위

다른 건 모르겠고, 저기서 빵 터졌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 저도 쓸 땐 왜 저걸 떠올렸는지 모르겠는데 @plop-into-milk님 말씀듣고 지금생각해보니 피식 웃기네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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