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뻘?]황정민을 보내며steemCreated with Sketch.

in #kr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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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KBS 라디오 홈페이지

재작년 11월 국회에 출입을 하게 되며 차가 필요해졌고, 중고 경차로 매일 출근길을 달리는 생활이 시작됐다. 혼자 차를 타다 보니 심심했고 라디오는 자연스럽게 출근길 길동무가 됐다.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려보다 오전 7시부터 9시까지 하는 '황정민의 FM대행진'에 멈췄을 때 특유의 쨍한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었다. 황정민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원래 이랬던가 하면서 다른 주파수로 이동했던 기억이 있다.

하루는 여길 들어보고 다음은 저길 들어보던 시기가 잠시 계속되다가, 하루는 아침이 너무 피곤해 졸음을 깨우려고 그 쨍한 목소리를 찾게 됐다. '한 번 들어보자...'

처음 제대로 FM대행진을 들었을 때의 느낌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청취자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듣기 좋은 소리만 하지 않고, 때론 닥달도 하고 때론 공감도 하고... 광고에서 송새벽(인지 안윤상의 성대보사인지 모르겠지만) "황정민이 따지는 게 그렇게 좋다"던 것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미리 신청한 청취자에게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 노래의 앞부분을 부른 뒤 뒷부분을 부르게 하는 코너가 재밌어서 매일 듣게 됐다. 출근이 엄청 빨랐던 말진 시절엔 거기까지 밖에 듣지 못했지만 결혼 뒤 출근시간이 조금씩 늦어지면서 그 뒤의 퀴즈 코너, 그 뒤의 안윤상 성대모사 코너, 그 뒤의 일인다역 꽁트까지 듣게 됐다.

참 재능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나도 어느새 슬슬 '황족'이 돼 가려던 어느날, 황 아나운서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육아휴직을 하며 FM대행진을 그만둔다"고 했다. 듣고 보니 19년이나 했다고 한다. KBS라디오 사상 최장기 진행자다.

오늘은 황정민 아나운서의 마지막 생방송이었다. 방송은 황 아나운서 몰래 꾸며진 특집으로 진행됐다. 모든 청취자 참여는 황 아나운서와의 이별을 서운해하면서도 그의 행복을 기원하는 내용들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학교에 가면서 들었는데 지금은 자식을 학교에 데려다주며 듣는다는 청취자도 있었다.

아내를 태우고 마지막 생방송을 들으며 여의도에 왔다. 참 라디오가 뭐라고. 고작 몇 개월 들었던 걸로 이렇게 정이 들었을까.

기상캐스터도 황 아나운서를 위한 멘트를 준비해 울먹이며 말했다. 황 아나운서는 중간중간 울음을 참지 못했다. 19년 전 황 아나운서와 함께 방송을 시작했던 관계자들, 그 동안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게스트들, 황 아나운서의 후배들이 그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한 마디씩 한 것들이 나왔다. 그 동안 황 아나운서는 마이크를 끄고 엉엉 울었을 것 같다. 19년 베테랑도 처음엔 엄청 못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그리고 아이들의 목소리가 나왔다. "엄마 라디오 목소리가 더 좋아요. 더 고우니까"라고 했다가 "이제 아침에 엄마랑 같이 학교 갈 수 있어요", "엄마가 방송 그만둬서 좋아요"라는 내용이 나오니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나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엄마가 있어서, 아침을 차려주고 학교 가는 길에 손을 흔들어 줘서 너무 좋았다. 그 동안 황 아나운서의 아이들에게서 엄마를 빼앗았던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아내를 내려 주고 남은 시간은 점점 사라져 갔다. 차를 대고 잠시 망설였다. 그의 마지막 인사를 들을 것인가, 말 것인가. 나는 그냥 차에서 내렸다. 창피하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아내는 스마트폰으로 끝까지 들었단다. 아내는 FM대행진을 들은 기간이 나보다 훨씬 짧다. 나는 마지막 멘트를 물어봤다. 아내는 "생각보다 담백하게 끝냈어. 엄청 울지는 않더라. 역시 베테랑이야"라고 했다. 황 아나운서는 "우리 다시 만날거니까 가볍게 인사해요"라면서 "제가 어디서든 응원하고 있다는 것 기억하세요. 우리의 아침은 아름다웠다"라고 마지막 인사를 했고 한다.

19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 앞에서 엄청나게 고민했을 황 아나운서. 최고의 진행자이자, 좋은 엄마로 기억될 것 같다.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언젠간 다시 스튜디오에서 마이크를 잡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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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아쉬우셨을 거 같아요. 저도 예전에 오래 듣던 프로의 진행자였던 정지영 아나운서가 그만 두었을 때 몹시 아쉬웠거든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오 정지영 아나도 되게 잘 하는 걸로 유명했었죠. 왜 그만뒀더라..

19년이라니...!
방송진행으론 영겁에 가까운 시간이네요. ㅎ

중간에 황 아나운서 초기 방송 일부 들려줬는데 정말 어리더라구요. 한 청년이 중년이 되는 시간이니까요. 아내가 찾아봤는데 MBC에서는 10년 진행하면 브론즈마우스, 20년 하면 골든마우스 상을 주는데 배철수, 강석, 김혜영, 이문세, 최유라씨가 골든마우스를 받았네요. 황 아나운서는 자사에서 10년 이상 공로로 골든페이스 상을 줬던 적이 있네요.

왠지 저도 눈물이 찔끔 났네요
황정만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아이와 남편과 출근하는 자동차에서 아침 7시에 듣곤 했는데 19년의 시간을 진행하셨다니 정말 장인 이라고 부르고 싶네요

들으신 적이 있군요. 그러네요 장인 맞네요.

엄청 오래하셨군요! 19년이라니...대단합니다.
라디오를 들어본적이 언제더라.... 기억도 가물가물 하네요...

요즘은 스마트폰 어플로도 다 듣더라구요. 운전할 때 들어보면 재밌는 프로그램이 몇 있어요.

전 운전할때 무조건 뽕짝.....ㅋㅋ 아! 트로트라고 해야하나요^^

필리핀으로 오고나선느 정말 라디오를 언제 들었는지 기억이 안나네요.
황정민 아나운서 정말 이미지도 좋구 저도 좋아하는 아나운서 중에 한분이시죠.. 그래도 한번씩 Vj 특공대를 보면서 목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곤 합니다. 이제 나이도 꽤 들었네요 ㅎㅎ 육아를 위해 자신의 일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한국에서 여성이 일하면서 사는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는 듯 하네요..

아 VJ 특공대 하고 있었나 보네요. 저는 티비는 안 봐서 ㅋㅋ

네 ㅎㅎ 지금도 하고 있는데 저도 매주 보는건 아니라서요 Vj도 하차를
했으려나?? 모르겠네요 ㅋㅋ 티비 안보신다니 좀 놀랍네요~~ ㅎㅎ

ㅋㅋㅋ 티비가 있긴 합니다만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데에만 씁니다.

아 네 ㅎㅎ 그러셨군요^^ 오늘도 보람찬 하루 되세요~~

아.. 황 아나운서님이 그만 두셨군요. 챙겨서 듣지는 않지만 가끔 출근길 버스에서 듣곤 했었는데... 그렇게 오래 하셨었다니 놀랍네요.
19년이라는 시간 동안 해온 방송을 그만 둘 때의 마음은 정말 어떨까요.
중고등학생 시절 겨우 3년 함께한 학우들과 헤어지면서도 그렇게 짠했는데...
상상조차 하기 힘든 감정을 겪고 계실 것 같네요.

맞습니다. 얼마나 고민했을까요. 막 사연 중에 황 아나운서가 방송으로 이어줘서 만나보고 결혼했다는 얘기도 두어 번 본 듯요.

저는 접해보지 않았지만, 글만봐도 굉장히 서운하네요..
19년이라니... 대단합니다 정말..

무얼 시작해서 해도 마스터가 될 수 있을만한 시간인 것 같습니다.

황정민씨 수고 많았네요.
정말 톡톡튀는 음성과 재치로
살아있는 방송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감사합니다.

많이 톡톡 튀었죠. 초보 시절엔 실수도 많이 했네요 찾아보니 ㅋㅋ 19년이라는 시간 앞에선 다 에피소드일 뿐이죠.

해리포터의 마지막편 마지막 장면을 보지 않기 위해 극장에서 먼저 나왔다는 후배의 말이 떠올랐어요. 무언가 오래 정든 것과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멀어져야 한다는 것은 참 힘든 것 같습니다.
제게도 그런것이 많이 있겠죠. 근데 그게 너무 익숙해서 그게 무엇인지 지금 당장 꼽을수도 없네요. 매순간 익숙함에 감사하고 살아야겠습니다.

해리포터가 완전히 끝났나보군요. 맞아요. 정말 마지막 순간, 어떻게 해도 다시 되돌리지 못하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순간을 피하고 싶었어요. 익숙한 것들에 감사하며 사는 것, 쉽지는 않을 것 같네요.

차라리 내가 피하는 것처럼 해보자... 그런 의미이셨을 것 같아요. 그 마음 알 것 같습니다.
해리포터... 그렇다고 들었던 것 같아요. 사실 저는 단 한편도 보지 않아서 몰라요.. ㅎ

열심히 듣지는 않았지만 황정민씨 떠난다는 이야기 듣고 뭔가 짠해지더라고요...

근데 제머릿속엔 아직도 황정민씨하면 모유수유 사건이 너무 강렬하게 남아 있어서..ㅋㅋ

저 찾아봤다는! ㄷ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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