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밤

in #kr6 years ago (edited)

라다크에서 지낼 때 수행 중이던 한국인 비구 스님을 만난 일이 있다. 3년 동안 산속 오두막에서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활동만을 유지하며 종일 명상을 하는 중인데,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 레 시내에 내려왔다고 했다. 그는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식량으로 쓸 짬바(티베트 문화권 사람들의 주식인 보릿가루. 버터, 치즈, 물과 섞어 반죽하여 먹는다)와 난로 따위를 구하는 중이었다.

라다크의 겨울은 혹독하다. 맨살이 다 터서 갈라질 정도로 건조하고, 콧물이 얼어붙을 만큼 춥다. 론리플래닛에도 ‘겨울에 라다크에 가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쓰여있다. 겨울에 라다크에서 2주 지내본 결과, 밤에도 내복 두 겹씩, 양말 두 겹씩 껴입고 오리털 잠바에, 이불 두 채 덮고 잔다면 살 만하다. 아무튼, 시즌이 끝나고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던 여행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어쩐지 한편으로 쓸쓸했던 차에 오며 가며 마주칠 때마다 나누는 스님과의 대화가 흥미롭기도 하여 꽤나 그를 따랐다. 그는 늦은 나이에 출가하여 인도 불교 성지 이곳저곳을 다녔는데,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와 함께 이어지는 여행담이 정말 재미있었다. 이어지는 나의 시답잖은 질문들에 시큰둥하게 대답하곤 했지만, 그 안에 담긴 정성을 나는 읽을 수 있었다.

스님, 명상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

가장 쉬운 것부터 가르쳐줄게. 함 혀봐. 자, 흰 종이에 점을 딱 찍어. 그리고 그 점을 봐. 점에 집중하되 집착하면 안 되는 것이여어~ 이게 첨엔 어려워도, 하다 보믄 익숙해져.

스님,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것은 왜 그런 거예요? 왜 먹고 나면 또다시 배가 고플까요?

식당밥을 오래 먹어서 그려어~ 그니께 먹어도 먹어도 헛헛한겨어~ 배가 찬다고 다가 아녀. 마음이 차야 배도 부른겨. 집밥을 먹어야 디야~ 집밥을.

스님, 정말 간절한 소원을 빌 때는 누구한테 기도해야 돼요?

진짜 간절히 원하는 게 있으면 구루 린포체한테 기도혀어~ 구루 린포체가 기도를 잘 들어주거든. 몇 년 전에 내가 숙소 옥상에 자리 잡고 앉아서 구루 린포체한테 기도를 하는데 글쎄 그분이 비구름의 형상으로 내 앞에 딱 나타났다니께! 내가 을마나 놀랐는지!

구루 린포체, 파드마삼바바는 티베트에 불교를 전한 부처의 화신이라 알려져 있다. 티베트 불교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 죽음 이후에 걷게 되는 길과 그 길 위에서 겪게 되는 모든 일에 대해 적어놓은 '티베트 사자의 서'를 남겼다.

스님의 강추(?) 이후, 종종 구루 린포체에게 기도한다. 언젠가 한 번은 어두운 골목길을 걸으며 구루 린포체 만트라를 중얼거리는데 꺼져있던 가로등 불이 탁하고 켜졌던 일이 있다! 내게는 가로등 불빛으로 현현하신 것인가! 캬.

오늘 저녁엔 스님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된장찌개를 해 먹고, 구루 린포체에게 허리 낫게 해달라고 오래간만에 기도 좀 해야겠다.


그들이 신을 만나는 방법 2 에서 예고한 대로!

@kmlee 님! 자, 광기에 취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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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올려주셨군요. 제 생각보다 덜 미쳤으면서, 더 미쳤네요...

이제야 보셨군요! 저도 춤을 출 때면 도리도리를 엄청 하는데... 갓난아기때 도리도리질부터 배우는 것을 보면 도리도리란 춤의 원형인가 싶습니다...?

제 조카는 도리도리는 잘 하지 않고 다리를 흔들면서 몸을 까딱거리고 코를 찡긋거리더군요. 음악만 나오면 춤을 추는데, 어디서 배웠나 싶습니다.

코 찡긋이라니 생각만해도 맴이 녹아내립니다... 세상의 모든 조카는 사랑이니까요! 조카의 재롱을 지켜보며 웃고 있는 김리 삼촌 상상하며 좀 웃었습니당. 조카 동영상이나 보다 자야겠어요. :-)

오죽하면 동생에게 제가 결혼하면 네 자식이 너무 귀여워서 그렇다고 하겠어요.

암요. 그 맴 알죠. 조카를 가진 미혼의 친구들과 조카 얘기만 몇 시간씩 하기도... -_-

구루 린포체가 허리 통증을 가져가시기를!

에버님! 저 거의 다 나은 것 같아요. 걸읆 만 합니다! :-) 이틀을 강제 집순이로 살았으니 어서 산책하러 나가야겠어요. 엉엉.

다행입니다. 산책하시기 좋은 날씨면 좋겠네요 ㅎㅎ

스님 말씀 중, 식당 밥에 길들여져서 바고프다는 말씀, 다가옵니다. 허기진다는 건 밥을 안먹어서 그런게 아니라 에너지가 고갈되었다는 뜻이라죠.

아아, 그러고보니 한자어로 허기진다는 말이 그 뜻이겠네요. 살이 찌려고 그러나 싶을 정도로 이상하게 식탐을 부렸는데 식당밥만으로는 에너지까지 채울 수 없었나 봐요. 하루 한끼라도 집밥 든든하게 드세요! :-)

스님 말씀 중에, 집중하되 집착하면 안된다는 말씀이 참 와닿네요. 지금 제게 딱 필요한 말씀입니다. 좋은 말씀 잘 듣고 가요.^ㅡ^

바실리우스님! 저도 그 말을 늘 마음 속에 새겨두고 있어요. :-) 바실리우스님께도 영감이 될 수 있는 말이라니 기쁩니다. 제가 점 명상 여러 번 시도해 봤는데요. 매직아이 아시죠? 그거 할 때랑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막 눈이 돌아갈 것 같고. 하하하.

집밥 말씀까지는 잘 나가던 제 맘이 '구루 린포체한테 기도'에서 탁 막혀버립니다. 가톨릭이 성부, 성자에서 수많은 성인을 만들어낸 것처럼 부처님에서 구루라. 하지만 미물인 저로선 간절하기만 할 때가 왜 이리 많은지. 간절함으로 기도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 하고 어정쩡 서있는 것은 제 교만함 때문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미력하나마 보팅하고 리스팀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드리며 팔로우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스페이스님! :-) 저는 주술적(?)인 모든 것을 참 좋아해요. 기도도 그런 의미에서 곧잘 한답니다. 특정 종교의 신을 찾아 기도한다기 보다는, 구루 린포체에게도 하고, 돌아가신 할머니에게도 하고, 여행하다 손에 넣었던 로즈스톤 펜듈럼에게도 해요. 에너지를 주고 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거든요. 잘은 모르지만 스페이스님도 간절한 마음을 놓아둘 수 있는 스페이스님만의 다른 장소를 갖고 계실 거예요. :-) 자주 뵈어요!

뜬금 없는 댓글에 정성스런 답글 감사드립니다. 어설픈 가톨릭 신자임을 고백해야겠군요.

비구 스님 사투리 너무 잘 살리셔서 직접 만난듯 하네요^^ 올려주신 광기의 춤 잘 보았습니다.

보얀님! 충청도 사투리를 참 좋아해요. 너무 구수해서. 하하하. 잘 살렸다고 말씀해주시니 뿌듯뿌듯. :-)

한국인 스님분이 정말로 구수하시게 대답하시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부분 목소리 자동 재생 기능있는데, 들으셨죠?

3월의 시작을 아름답게 보내세요^^

3월, 시작부터 인상적이었어요! 감사합니다. :-)

저 동영상 몇 배속인가요...

눈앞에서도 보아도 3배속쯤은 되어 보이는데 저걸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하더라니까요! 대단한 자들!

방금 전 글에서 읽었는데 허리가 아직도... ;ㅁ; 지금은 좀 나아지셨는지. 저도 저렇게 도리도리를 하며 빙빙 돌면 신을 만날 수 있는 건가요 ㅎㅎㅎ 왠지 무당 굿판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비구 스님이 말씀해주신 내용 중에 식당밥과 집밥 내용이 기억에 남네요. 집밥을 먹을 일이 거의 없는데.. 먹어보면 알겠더라고요. 나를 위해 만든 음식이라는 걸.

99% 회복하였습니닷. 달리기, 내리막길, 계단, 일자로 눕기 등은 아직 어렵지만요. 스프링님 한국에 있으면서 집밥을 열심히 먹고 있지 않단 말입니까!!!! 어째서!!!!!! 저희 엄마는 뭐 하나 맛있다고 감탄하면 '엄마... 이제 그만... 제발...' 할 때까지 계속 하시는데, 이번에 세 달 한국에 있는동안 식탁에 매일 김밥동산이... 김밥 먹고 싶어요. 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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