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rwerq, essay] 0층의 존재
May. 2018, Nexus 5x
종종 들르는 건물에 층 번호를 살펴보니 0층이 있다. 0층은 프랑스에서나 볼 법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나라에서 보니 다소 생경하다. 0층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 층의 개념을 서수적에서 기수적으로 돌려놓는다는 의미이며, 아무것도 없음을 아무것도 없는 개념이 '있음'으로 치환하는 시선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1.5층이나 2.3층이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내가 1층과 2층 사이의 계단 사이에 존재한다면 1.8층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상상해보라.
서수적 셈법이 익숙한 분야에서 기수적 셈법이 등장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vice versa) 라면 상당히 당혹스러워질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세상에서 당신이 제일 좋다고 말한다면, 그건 정말로 서수적 이야기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의 최대치보다 10배 정도 좋다고 말한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게 5배든 100배든 사실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원이 어떻게 분배되어야 한다든가,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이 결국에 고려되어야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사정이 다르다. 20%의 비율로 A를 택하고 80%의 비율로 B를 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B를 우선적으로 택한다고 이야기한다면, 그래서 얼마만큼 택할건데? 라는 질문이 뒤따라올 수도 있다.
한편 한계효용이든 무차별 곡선이든 기수와 서수에 해당하는 기본적인 가정은 결국 크기나 순서에 따라 비교할 수 있고, 이 비교들의 연쇄가 정합적이라는 데에 있다. 20이 5보다 크고, 100이 20보다 크다. 첫번째가 두번째에 우선하며, 두번째가 세번째에 우선한다. 그러니 100 > 20 > 5 와 같은 등식이 성립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첫번째는 두번째와 세번째에 모두 우선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비교 자체가 어그러지는 관계들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위바위보를 생각하면 아주 간단하다. 선호는 돌고 돈다. 기수적 선호 체계를 선택하지 않는 이상, 공동체의 일관된 순서의 선호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너무도 잘 알려진 (이제는 조금 고루한 이론이지만)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가 이를 말해준다. 그러니 어떤 커뮤니티가 어떠한 사안에 대해서 일종의 합의된 균형에 도달한 듯 보이더라도, 그 균형이 구성원들의 선호를 일관된 순서로 반영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조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균형은 우리가 도달하기에 (현실적인) 최선으로 보이지만, 이상적인 지점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에 항상 주의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최적의) 합의는 결국 국지적으로 동작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국지적으로 제한된 합의들이 그나마 (국소적 구성원들 내에서는) 더 합리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합의가 잘 되지 않는다면 0층을 놓아두는 방법도 괜찮다. 0층을 놓는 순간, 서수적 비교는 기수적 계산으로 전환되거나, 합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가능성에 대한 여지를 두게 되니 말이다.
그나저나 언제 한번 Daniel Kahneman 이야기도 다루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이런 시선,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는 겁니까? ;)
아마도 각자의 전문(?) 분야들이 있고 그에 해당하는 시선이 묻어나오는 것 같습니다. @plop-into-milk 님께서도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분명히 제가 따라잡지 못하는 시선을 가지셨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
저는 사실 간단한 것을 꼬아서(?) 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게 도움이 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
전 어릴 때 외국에서 살아서 우리나라 개념의 1층이 ground floor 를 뜻하는지 몰랐어요. 그래서 한국에 올때마다 1층을 누르면 왜 자꾸만 ground floor (=0층) 으로 가는지 이해가 안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
개념에 따라 우리가 받아들이는 세계의 모양이 달라진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천문학적으로는 0년이 존재하더라도, 서기1년과 기원전 1년이 있을 뿐 서기0년은 없다지요. 결이 다른 세계의 두 경계를 맞추는 작업은 참 신기하게 느껴지실 것 같다는 짐작을 해봅니다. :)
글의 저변이 갈수록 넓어지네요 ㅎㅎ 사유가 품격있습니다
너무 띄워주셨네요. ㅎㅎ 그냥 이것저것 적어보는 중입니다. 이 공간의 건축의 재료를 무엇으로 할지 언제나 고민합니다.
0층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는데 프랑스에선 흔한 경우인가 보네요.
정말 신선한 충격입니다.
아마 대놓고 숫자로 0층을 쓰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겁니다. 프랑스에서는 rez-de-chaussée 라고 부르고 영국에서도 ground floor 라고 부릅니다. 그래도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2층이 그곳들에서 1층으로 불리운다는 것이 참 신기한 일이지요. 세상은 넓고 개념들이 다소 다르게 이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가 싶기도 합니다. :)
외국이 0층을 센다는건 영화를 보면서 알았는데, 뭔가 생경한 느낌이었습니다. ground floor는 무조건 1층이라고 믿고 살아왔기 때문에.. 일본의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걸 보는 느낌과 비슷하죠.
0층을 도입했다니.. 유학다녀온 분이 만든 빌딩인지도 모르겠네요. ㅎㅎ
저도 서수적 셈법에 익숙해져왔기에, 첫번째에 다시 첫번째가 있다는 것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0과 1의 차이가, 우리가 바라보는 땅의 느낌을 달리 만들었으리도 모르겠습니다. :)
현실적 최선인 '균형'과 '이상적인 지점'이 일치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지 궁금해지기도, 의문이 들기도 하네요.
p.s
수정하셔야겠네요.^^;
앗.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히 수정할 기회가 있네요. 가끔 머릿 속 생각이 적는 손을 앞서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 이러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제 못된 습관 같은 것입니다.
저는 사실 이상적인 지점과 균형은 대체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별 대안이 없기에 현실적인 최선인 균형을 가지고 간다고 생각합니다. 일치하기 위해선 대안적인 공간이 이상적인 지점을 포괄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보통은 그 공간이 넓지는 않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