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rwerq, think] 거절이 쉽도록 부탁하는 것

in #kr6 years ago (edited)


주: 일반론적인 이야기입니다. 특정 상황이나 맥락과 관계 없음.


아마도 제목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보통은 거절이 "어렵도록" 부탁하는 것이 맞지않나 싶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남들에게 도움을 받거나 부탁을 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나로서는, 어떤 부탁을 할 때 거절이 쉽도록 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부탁에는 언제나 목적이 존재한다. 보통 나 스스로 할 수 없는 어떤 행위를 하거나 결과를 얻고 싶은 경우,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부탁을 통해 상대방의 가용 자원 중 일부를 나 혹은 나와 연관된 활동에 쏟을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그러면 거절이 쉽도록 해야하는 것이 정석 아닌가? 그럴 수도 있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활동에 달성도와 성공률을 높이려면 그 방향이 맞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거절이 "어렵도록" 무언가를 부탁한다는 것은 결국 상대방에게 일종의 부담을 주는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통 그 부담은 상대방의 내면에서 나오기보다는 상대방 외적인 것, 부탁하는 자와 부탁받는 자를 둘러싼 세계의 구조에서 나온다. 예를 들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안될법한" 분위기라던가 세간의 시선, 상대방과 나와의 관계 - 틀어짐에 대한 위험 같은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탁받는 상대방이 정말로 스스로 하고 싶어서 부탁을 들어주는 것인지, 아니면 외부의 힘/권력/걱정/시선과 같은 외부적 조건과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들어주는 것인지 구분할 길이 없다.

나는 어떠한 부탁이든 각자의 "자발성"과 성장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야한다고 생각하기에, 거절이 "쉽도록" 구성하고 부탁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무수한 거절의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탁을 받는 상대방이 부탁의 승낙과 자신의 기여에 대해 결국 스스로 판단하고 믿기를 바라기 때문이며, 또한 외부적 요인에 의해 (스스로 하고픈지와 관계 없이) 비자발적으로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길 바라서이다.

그러니까 결국 "거절이 쉽도록" 부탁하는 것은, 상대방의 선의와 호의, 상대방이 자신의 삶을 판단하는 스스로의 시선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나로서는 외부적 요인이 아닌 상대방의 자발성과 판단에 의해 상대방이 부탁을 승낙하였다고 믿을 수 있는 1차적 거름망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절이 "쉽도록" 부탁하는 것은 어떤 과정을 거쳐야하는가? 나는 상대방에 대해 나의 신념이나 철학, 삶의 방향 같은 것을 제시하는 것을 무척 꺼려한다. 왜냐하면 각자 삶의 경험이 다르고, 그에 따라 쌓인 나이테도, 결도, 신념과 방향도 다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맥락을 쉽게 짐작하는 것은 정말로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내가 부탁을 할 때에는 오로지 부탁의 대상과 조건, 부탁을 통해 나의 (더 나아가 우리의) 활동에서 어떠한 것을 얻고 포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건조하게 제공하는 편을 좋아한다. 그러한 정보들을 모아서, 자신의 맥락을 구성하고 이에 따라 부탁을 승낙할지 아닐지 판단하는 것은 오롯이 부탁을 받은 상대방의 몫이다. 그걸 내가 대신 해줄 이유도, 강요할 이유도 없다.

여러 정보들이 쌓여갈수록, 부탁을 "거절할" 정보도 늘어나기에, 아니다 싶으면 거절하는 것에 대한 상대방의 부담도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무수한 정보와 조건들 중 하나라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그걸 이유를 들어서 거절하면 된다. 부탁을 할 때 가장 위험한 것 중 하나는 그러한 "구체적 명세" 없이 부탁을 던지는 것인데, 이런 경우에는 결국 부탁을 받은 상대방이 (외부 세계를 포함하여) 맥락을 파악해야하므로, 부담을 주는 행위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세상의 모든 부탁들이 정말로 "거절이 쉽도록" 부탁하는 형태를 띠었으면 한다. 제아무리 무수한 거절의 이유와 이에 따른 정보가 산재하더라도, 정말로 단 하나에 꽂혀서 부탁을 들어주는 경우도 존재하니까 말이다. 부탁을 하는 나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고, 부탁을 받은 상대방만이 자신의 삶의 맥락에 따라 다른 조건들은 모두 무시할 수도 있는, 그런 강력한 동인(動因) 하나의 존재를 믿는다면, 거절이 쉽도록 부탁하는 것이 오히려 부탁의 정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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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 읽고 나면 생각에 잠기게 하는 좋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찬찬히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스스로를 돌아보며 쓴 글이기도 합니다. 부탁을 할 때, 상대방의 삶의 맥락을 생각만큼 잘 존중했었나하면서 말이지요.

'거절하기 쉬운 부탁'은 제가 바라는 것입니다.
상대가 거절한 이후 계속 찜찜하게 있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죠.
잘 읽었어요. ㅎ

거절하기 쉽다는 것은, 어쩌면 "관계에 있어서 거절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부탁에 딸려오는 거절에 대해 부담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부탁을 하는 사람이든 받는 사람이든요. :)

제목부터 마음에 쏙 듭니다 ㅎ
저 역시도 부탁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
부탁할 때면
"그냥 편하게 생각하세요"

관계에 있어서 그 "편함"을 조성하는 것이 가장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편한 관계에서는 부탁을 조금 더 조심하게 되는 경향이 있기도 합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ㅎ

부탁은 늘 무겁고 어렵고 부담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지요..누군가 부탁하려는 모습으로 다가올 때
왠지 한걸음 물러서게 되는 것 처럼요..

저는 사실 부탁도 가볍고 거절과 승낙도 가벼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 스스로는 부탁을 하는게 참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부탁할 일이 있으면 조금 가볍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글은 저 스스로에 대한 글이기도 한데, 부탁을 "받는" 상대방이 생각하기에 거절이 가능한 정보와 이유를 많이 (+솔직하게) 제시하면 그래도 제가 행하는 부탁이 조금 더 가볍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기도 합니다.

저도 언제부터인가 이 생각을 해서 늘 상대방이 "거절하기 쉽도록" 부탁하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어요 ^^

이미 실천하고 계셨군요 :) 거절하기 쉬운 부탁 - 거절하기 쉽다는 것을 부탁하는 사람과 부탁받는 사람 모두 알고 있는 것이 제일 깔끔한 것 같습니다.

부탁을 하는 거 자체가 뭔가 아쉬워서 모자라서 하는 것이니만큼..
거절이 쉽도록 그 사람의 사정을 생각해서 한다는 거 자체는 정말 어려운 일인 거 같아요. 타인에게 아쉬운 소리하는 거 자체도 쉽지 않은 일인데 결과가 안 좋게 나오는 걸 이미 예상해야한다는게.
그럼에도 이렇게 거절이 쉽도록 부탁을 하는게 맞는 것이겠죠.
자신의 욕심을 제어해야한다 숙제가 있겠지만 ^^

그렇습니다. 사실 거절을 예상하고 부탁을 한다는게 결국, 부탁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확신이 없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리한 부탁은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깜냥을 넘어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욕심에 대한 제어 -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것을 넘어가지 않는 것 - 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기본적으로 상대에 대한 배려가 깔려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요.
생각해보니 부탁뿐 아니라 소통 전반에 걸쳐서 구체적인 정보들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정보들을 놓아두고, 판단하고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관계와 소통의 여러 가능성에 대한 제한을 두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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