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룸 17. <그래비티>, 우주를 체험하는 또 하나의 감각, 완벽한 감각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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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elroom.17(film)


<그래비티>, 우주를 체험하는 또 하나의 감각, 완벽한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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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재난은 그 내용이 궁금하기도 하지만 뻔하리란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래비티>는 '가볍게' 진부함을 부순다. *사진 : 다음 영화, <그래비티>(2012) 스틸컷


1. 우주에서 벌어질 일들은 무엇이 있을까


<그래비티>는 영화의 소재가 참신하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우리는 우주에서 겪을 만한 고난이 어떤 것인지 대개는 짐작을 하고 있다.(아마 대부분 이 영화가 무엇을 다루려는 지 알고 들어왔을 것이고, 어떤 전개일지 상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산소의 결핍, 진공과 각종 유해한 방사선의 위험 속 외부노출, 무중력 상태라는 특성상 한 번 힘을 받은 물체는 계속해서 떨어져나갈 뿐인 우주의 특성 등.

영화의 도입부는 사실 우리가 어느 정도 예상한 수준의 재난들이 들이닥치고 있고, 긴장감을 유도하고는 있지만 남은 런타임을 보면서 걱정스러운 마음도 들게 된다.

"이제 어떻게 재난을 만들지?"

주인공은 동료와 허블우주망원경을 고치다 러시아가 위성을 폭파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우주쓰레기 폭풍을 정면으로 맞게 된다. 그들이 타고 있는 우주선은 물론이고 허블망원경까지 대파 된다. 동료도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망한다. 모함을 잃은 전투기가 끝내 추락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첫 번째 고난이 주어진다.

산소결핍과 우주미아의 위험.

폭풍의 여파로 주인공은 우주의 심연 속으로 떨어진다. 중력도, 저항도 없는 우주 공간에서는 어딘가 부딪히지 않는 한 끊임없이 같은 방향으로 내던져질 뿐이다. 이는 그녀의 동료 매트가 제트팩을 사용해 그녀를 구조함으로써 해결이 되지만, 산소 결핍의 문제가 남았다. 산소를 공급해줄 곳은 없다. 떨어져 가는 게이지, 누구도 구조해올 수 없다는 극한의 공포감에 가빠지는 호흡. 여기서 우리가 상상한 우주재난의 모습은 모두 끝이 나지만 영화는 이 긴장감을 놓지 않게 했다. 어떻게 했을까.

영화가 긴박함을 한 시도 놓지 않은 데는 훌륭한 고증이 한몫한다. 우주에서 비행하는 물체들은 실제로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할 어마어마한 속도로 돌진한다. 영화 속에서 우주쓰레기들이 비행하는 속도는 시속 수만 킬로미터에 이른다. 저항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머리 위에 떠있는 위성은 그와 비슷한 엄청난 속도로 움직인다. 또 지구탈출속도를 계산해 쏘아지기 때문에 지표에 추락하지 않고, 지구를 뱅뱅 돌게 된다. 이는 우주쓰레기들도 마찬가지다. 영화 속에서 대량으로 발생한 쓰레기들도 일부분은 우주공간으로 날아가겠지만 대부분은 떨어지지도, 날아가지도 않는 구역에 남는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아 결국 그들을 다시 덮칠 것이다. 우주공간의 특성상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다는 점은 그들을 더욱 위험에 처하게 만든다. 이것이 영화를 움직이는 힘이 된다.

당장은 산소결핍의 고난에 집중되어있지만, 우리는 우주쓰레기가 다시 덮치리라는 것을 안다. 산소걱정을 하는 주인공을 두고 타이머를 맞추는 매트의 행동으로 인해 우리는 시간 제약까지 받게 된다.

{(우선순위의 위험-같은 크기의 희망)잠재 예고된 위험}잠재 예고된 위험}

영화는 이런 식으로 위기를 조성한다 다음에 다가올 위기 상황을 저변에 깔아둔 채로 당장의 일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당장의 일을 해결하고 나면 곧바로 후순위에 밀려있던 변이 치고 올라와 곧바로 급박한 위기가 되는, 마치 기관총의 탄알과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도 쉴 수 없다. 아니, 이제 좀 쉬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 정도로 이 고요한 재난이 계속해서 진행된다.

영화서사에서는 일련의 공식과 같은 구조가 있다. 위기가 닥쳤으면 해소가 되고, 그것이 반복되는 것이 우리에게 안정감이 된다.(물론 영화만의 것은 아니지만) 위기만 고조되는 것은 관객에게 피곤함을 안긴다. 영화에서는 이 위기가 도저히 해법이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매번 해법은 등장한다.

산소결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ISS로 가는 과정이 대표적이다. 어째서 그들이 작업하는 곳 근처에 ISS가 있었는지, 혹은 산소게이지가 딱 마침 주인공이 ISS의 문을 열고 들어갈 만큼 존재하는 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실은 이 산소 문제도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을 거부한다. 이동 중 산소는 바닥이 났고, 주인공은 우주복 내의 적은 산소만으로 호흡을 시도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재난이 발생할 때 마다 대책은 등장하게 되고, 그 대책은 위에서 언급된 공식처럼 소위 말하는 '갑툭튀'가 아니라 미리 예고된 대책에 의한 행동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대책들이 그렇게 억지스럽게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중국의 우주정거장에 도킹하는 순간은 다소 극적인 면이 적지 않다.

영화는 이런 식으로 6단계에 걸쳐 고난과 해법이 일정 영역을 중첩한 상태로 진행하게 되는데, 이 위기의 중첩성 덕분에 우리는 그 긴 시간 ‘뻔한 우주 속 위험’ 속에서도 한눈을 팔지 않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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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진공 상태에선 소리가 전달되지 않는다. 때문에 극적인 상황이 와도 '조용하다' *사진 : 다음 영화, <그래비티>(2012) 스틸컷


2. 우주를 체험하는 또 하나의 감각


영화의 치밀한 서사적 구조가 우리의 심장을 죄여왔다면, 우리는 이 작품에서 대단한 경이로움을 느낄 수도 있다. 영화는 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지구의 광활한 모습,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의 밤, 낮, 일몰, 일출 등 장관들을 계속해서 중계한다.

우리가 종종 접하게 되는 우주와 관련한 사진은 보기만 해도 황홀하다. 그런 광경을 동적인 모습으로 본다는 것은 상당히 이채로운 경험이다. 그리고 영화가 제공하는 우주의 진풍경은 시각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 초입에 잠깐 소개된 우주의 특성대로, "우주에서는 소리를 전달할 매질이 없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부분도 훌륭한 고증이자 체험을 선사한다. 우리도 귀마개를 하고 말을 해보자. 내 속에서 말이 울리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주에서 들리는 소리는 이런 것과 흡사하다. 우주 장비의 볼트를 조이거나 해제할 때 들리는 ‘웅웅’ 소리 역시 내부의 울림이다.

또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다. 실제 필자는 영화를 관람하다가 너무 몰입한 나머지 우주 쓰레기 충돌 직전에 큰 소리가 날 것을 대비했다. 우주에서는 소리가 퍼지지 않으니 당연히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파편의 비산,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은 극히 고요함 속에서 진행된다.

우리는 공포를 느낄 때 주로 시각적인 요소만큼 청각적인 요소에 많이 의존한다. 분명 공포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우리는 또 말을 들을 때 입술의 움직임도 함께 읽는다. 그래서 외국영화를 한국성우가 더빙하면 어딘가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 공포스러운 장면에 몸이 반응을 해야 하는데 정작 공포감을 조성할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괴리를 낳는다. 우리는 그래서 육체적인 신호까지 교란 받는다. 이것이 영화에서 조직된 구조와 맞물려 우리 신체를 더욱 긴장된 상태로 몰아붙인다. 우리가 영화가 끝난 뒤 호흡곤란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 작품은 우리가 시각적으로 느끼는 우주의 이미지를 청각적으로도 수용케 함으로써 우주의 신비로움에 더 입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소재의 참신함을 뛰어넘는 개념의 것이다.

드넓은 우주를 우리가 공간적으로 상상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청각적인 고요를 재현해낸 우주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영화의 초입부에서 마치 우리도 그 현장에 있는 고요함을 느낄 수 있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앉은 극장조차도 심연의 우주와 닮아있다. 결국 우리는 우주와 지구의 아름다움을 시각, 청각, 공간 모든 것으로 부터 느낄 수 있다. 지구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우리는 이것을 우주적 접근으로 체험하게 된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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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선 다루지 않았지만, 작품에 끊임없이 등장하며 사람과 사람을 잇는 '끈'의 메시지도 중요하다. *사진 : 다음 영화, <그래비티>(2012) 스틸컷


3. 이미지로 제시하는 철학적 사유


구조가 잘 짜여 있고 감각적으로 아름답다고 해서 훌륭한 영화가 될 수 없다. 무엇이 <그래비티>를 이토록 아름답게 만든 것일까?

그래비티의 미장센은 상징적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담은 함축적 의미도 크다. 우리를 품은 지구. 그것은 어머니의 숨결과 같다. 대지의 여신으로 알려진 가이아, 그도 지구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지구는, 애초에 우리 인간들에게 "어머니"로 받아들여지는 존재다. 만물을 잉태하고 탄생시키고 한편으로 그것들이 죽어가는 것 또한 지구의 한 부분이다.

먼저 영화 전체를 뒤덮는 고요함은 태반의 고요와 흡사하다. 태아가 자리 잡은 자궁의 소리는 어머니의 내부 심장소리로 뒤덮여있다. 앞서 이 영화의 청각적 자극이 우리의 내부 울림과 흡사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극히 조용한 순간엔 우리도 우리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그것은 어머니의 심장소리를 듣는 태아와 같다.

우주를 유영하는 외로운 우주인은 어떤가? 역시 태아의 유영과 흡사하다. 태아도 태반을 떠돌고, 우주인도 우주를 둥실둥실 떠다닌다. 그리고 그 광경을 어머니가, 지구가 내려다보고 있다.

산소 결핍에 허덕이던 주인공이 ISS에 안착해 가장 먼저 한 것은 옷을 벗고 편히 쉬며 산소를 가득 들이쉬는 것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태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웅크린 주인공과 둥근 선실 안, 허공을 함께 떠도는 로프들은 탯줄을 연상케 한다. 가장 상징성이 두드러지는 장면이다.

어머니의 존재를 담는다는 것은 외적인 모습뿐만이 아니다. 주인공의 설정이 아이를 잃은 어머니라는 점은 전율이 일 정도의 치밀함이다. 아이 잃은 어머니와 우주는 전혀 연관성이 없지만 그래비티에서는 다르다. 주인공인 스톤 박사를 끊임없이 살게 만드는 것은 죽은 아이에 대한 속죄의식이다.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의 위대한 힘을 바탕으로 생존에 성공한다.

그런데 여기서 스톤 박사가 ‘지구의 딸’이라고 가정한다면, 스톤 박사를 살려내는 것도 ‘어머니 지구’의 힘이 기인한다. 특히 스톤 박사가 태아 상태의 우주 유영을 끝내고 지구로 돌입하는 모습은, 태아가 이제 막 어머니의 자궁을 지나 세상 빛을 보는 것과 유사하다. 이때 어머니는 자신의 안위는 생각지 않고 출산을 하게 된다. 지구는 살기로 결심한 자신의 딸을 대기가 찢어지는(사람이라면 피부인) 고통 속에서도 받아들인다. 이처럼 영화는 우리에게 지구에 대한 단 일절의 언급 없이도 지구와 어머니의, 경이적인 생명력과 위대함을 일깨워 준다.

그러나 이 작품은 지구의 생명력과 어머니로서의 모습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지구의 파멸성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이 겪는 고난은 고요 속에서 진행된다는 것을 위에서 지적했다. 그것은 큰 소리로 간담을 서늘케 하는 공포영화의 그것보다 심드렁한 느낌을 주고, 이는 지구에서 벌어지는 생명의 잉태는 물론이고 그들의 소멸과 파괴도 대자연의 일부라는 점을 담담한 태도로 그려내게 된다. 가령 세렝게티 초원에서 치타가 임팔라를 사냥하는 것을 보고 지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다. 지구의 입장에서 본다면 주인공이 우주재난을 맞이하는 것도 특별히 대단할 것 없는 현상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작은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고독도 훌륭하게 묘사된다. 연료가 바닥난 소유즈 우주선에서 잘못 수신된 지구의 메세지에 <캐스트 어웨이>의 윌슨을 애타게 찾는 주인공처럼, 스톤 박사도 착란증세를 일으킨다. 개인이 겪는 고독은 항거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좌초라고 할 수 있다. 지구, 대자연은 분명 어머니의 숨결을 포함하지만 인간을 순식간에 하찮은 존재로 만들어 버릴 힘도 가지고 있다. 이런 지구의 환경 속에서 일개 개인은 무수히 ‘항거할 수 없는 일’을 마주하게 되고, 구멍 난 고독의 배에 탑승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은 인간 하나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인간은 늘 고독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는 ‘살아있다’는 것이다. 왜 살아있는가에 대해 우리는 영원히 해답을 구할 수는 없다(이에 너무 깊이 해답을 구하려는 자는 자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러나 살아있는 이들이 모여 유의미한 의미와 생명을 낳게 되고, 이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근원적인 희열을 느낀다. 즉 다시 말해 우주란 우리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정의하는 순간부터 살아갈만한 공간이 된다는 것이다. 스톤 박사에게 지구는 허무의 공간 그 자체였으나, 딸의 몫까지 살아내기로 결심하고 생환한 순간 지구는 생명의 장소가 된다. 결국 이 작품은 지구에 녹아있는 에로스(Eros, 생명의 열망)와 타나토스(Thanatos, 죽음의 열망)의 민낯을 폭로하면서, 그 속에 떨어진 한 인간이 어떻게 삶을 지탱할 것인지, 그 해답마저 제시해낸다.

이 모든 것은 구구절절한 설명이 따르지 않는다. 그저 보여주는 것, 이미지에 모든 메시지가 녹아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영화적으로 탁월하며, 어떤 우주 영화들이 와도 우주 그 자체에 관한 한, 앞으로도 이처럼 훌륭하게 표현하기는 아마 어려울 것이다.


'영화가 있는 공간, 영화를 느끼는 공간 Feelroom'

*지나간 '필룸' (최근 3편)

필룸. 16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날은 '지금'뿐이다
필룸. 15 <킹스맨 2>, 더 이상 ‘킹스맨’은 없다
필룸. 14 <범죄도시>, 흥행으로 보는 대중의 '크라임 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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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좋았던 점이라고 생각한 부분을 적어 주셨네요!

저도 '청각/소리' 와 관련된 부분이 새로웠어요. 물론 우리의 '머리'는 우주의 진공상태에서 소리는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껏 보았던 수많은 우주 영화에서는 폭발음도 쾅쾅 잘 들렸죠 ㅎㅎ 그러한 cliche 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다가, '음? 지금쯤이면 쾅 하는 소리가 들려야할텐데?' 라는 순간에도 소리가 작게 들리는 효과를 경험하니, 그 괴리가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더라구요.

영화 전체를 감싸는 고요함이 오히려 긴장감을 높여준다는 점에서 전 아주 인상깊게 봤어요 :)

그래비티 이후의 영화들은 우주의 '소리없는 아우성'을 잘 재현해내고 있더군요 :)
그런데 그래비티는 이를 고증에만 쓰지 않고 그런 침묵의 속성을 인간 고독에 엮어버립니다. 게다가 그래비티의 고요는 서스펜스를 조성하는 영화적 장치로도 훌륭하게 쓰이죠!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을 볼때마다 늘 감독의 천재성에 감탄하곤 한답니다 :)

그래비티 제가 우주영화중에 제일 좋아하는 영화입니다!ㅎㅎ 글에 말해주신 인간의 고독에 대해서 제일 공감해요. 이 영화에서는 처절한 고독이 느껴져요..사실 힘든일 생길때마다 우주영화를 봅니다. 힘들때 보면, 제 힘든일들은 먼지처럼 보이는 힘이 있더라구요ㅎ

저도 우주 영화 중에선 생각도 하지않고 <그래비티>부터 꺼내곤 하지요 ㅎㅎ
다들 그런 느낌을 받나봐요. 저도 우주의 광활함을 생각하면 지금의 고민이 작아지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때문에 어릴 때는 우주에 푹 빠져있었죠 :)
고독에 관해서는 <캐스트 어웨이>같은 좋은 영화도 있긴 하지만 <그래비티>만한 고독이 또 있을까, 당분간은 나오기 힘들 것 같군요!

이 영화는 정말 잊혀지지 않는 영화일거같아요
그래픽도 그래픽이지만 그 표현력이 예술이었죠...

영화는 그게 무엇이 되었든 스크린에 걸어둔 이미지들을 활용하는 방법에 따라 훌륭한 것과 훌륭하지 않은 것의 차이가 드러나지요
그런 점에서 그래비티는 압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소리가 전달되지 않는데도 긴장감과 처절함은 배로 전달되는 영화의 구성에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크으..

볼때마다 감독의 연출에 취합니다... 크으...

저는 [그래비티]가 우주를 통해 고요 속 재난을 표현해낸 것을 사람의 인생에서 '고요'에 해당하는 일상의 소중함과 연결시켰다는 게 참 신선하게 느껴졌었습니다. 오늘도 글 잘 읽고 갑니다.

인간 삶의 고요는 과연 일상이겠지요!

영화 속에선 일상적 사건에서 발생한 대재앙(딸의 죽음)과 우주의 고요 속에 발생한 대재앙이 평행선에 놓여있습니다. 사실 깊이 생각해보진 않았는데 제라피님께서 알려주신 덕분에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짱짱맨 호출로 왔습니다!
한주 수고하세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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