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시티 프리퀄] 순례의 서막 #1

in kr •  3 months ago




순례의 서막 #1



피곤한 일입니다. 하늘의 만나와 메추라기로 사는 삶은 매우 피곤한 일입니다. 주었으니 가져가는 것도 준 자의 마음이라 자신의 것을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직관을 따라 사는 삶은 더더욱 피곤합니다. 예측이 불가한 채 (어쩌면 반강제 된) 선택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젊은 마법사 멀린은 가끔 직관을 어겨 보기도 합니다. 모른 척, 못 들은 척, 못 본 척.. 뭉개 봅니다. 그러나 여지없이 청구서는 날아듭니다. 그것도 이자에 연체료까지 따따불로 붙어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아니 포기할 수도 없게 딱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감당하자면 또 할 만큼만.. 그래서 포기도 못하고 열만 받는다고 합니다.

2015년, 이 피곤한 젊은 마법사는 2차 여행을 떠나야 했습니다. 돌아보면 직관은 여러 차례 귀띔을 했습니다. ‘아직은 쉴 때가 아니야’ 예의 그 들릴 듯 말 듯, 닿을 듯 말 듯한 음성과 신호로.. 그러나 지칠 대로 지쳐버린 젊은 마법사는 직관을 개무시 했답니다.

 


반년 가까이 집 없이 떠돌아 다녔는데 또 떠나라구..

 
여행은 집이 있는 사람에게만 ‘여행’입니다. 집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럭셔리한 여행을 다녀도 ‘방랑’에 불과합니다.

 


나는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었어. 그래서 집, 집, 집이 그리웠어. 정착생활이 몹시도 필요했다구. 그런데 겨우 겨울을 났을 뿐인데 또 떠나라니.. 그래서 2차 여행을 떠나라는 직관을 뭉개버렸지.

 
당시를 회상하는 멀린의 눈빛에 회한이 비칩니다. 그것은 그냥 단순한 후회는 아닌 듯합니다. 잔인한 운명에 대한 자포자기의 마음이랄까? 계속되는 혼란과 끝없이 몰아치는 시련들… 어쨌거나 2차 여행을 개무시한 덕분에 멀린은 모든 것을 탈탈 털렸습니다.

 


싹 다 가져가더라. 팬티 한 장까지.. 아무것도 수중에 남아있을 수 없는 지독한 상황에 처해버렸어. 뭐라고 설명하기가 어려워. 그냥 집에 불이 나 발가벗은 채로 뛰쳐나온 상황이라고 상상해 봐. 주민등록증 하나를 못 건졌으니.. 정말 가혹하게 뺑뺑이를 돌리더라. 매일 숙소를 옮겨 다녀야 했어. 그리고 무엇 하나 가지지 못하게 하더군. 어렵게 갈아입을 옷과 가방 하나를 가지려 해도 허락되지 않았어. 희한한 일로 가져가 버렸지. 비행기에서 가방 분실해 봤니? 것두 미국에서.. 아, 게다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20시간 동안 감금을 당하기도 했지. 돌아가라고.. 이 방향이 아니라고.. 직관은 별별 방법을 다 써서 내게 서쪽으로 가라. 서쪽으로 가라 한 거야.

 
멀린은 당시 괴생명체의 습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괴질이라고도 하고, 어쩌면 스트레스로 인한 신경증의 일환이었는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생명체인 듯 아닌 듯,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아직도 후유증에 알러지 반응 같은 것이 가끔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내가 속으로 외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제 나는 혼자 남았다. 어둠과 숨쉬기조차 힘든 짙은 꽃향기 때문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갑자기, 어떤 소리가 들렸다. 벌레들이었다. 나를 산 채로 삼키려고 다가오는 벌레들. 온 힘을 다해 손발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무기력할 뿐이었다. 벌레들이 내 몸 위로 기어 올라왔다. 끈적거리고 차가운 벌레들은 내 얼굴 위로, 바지 속으로 기어 들어왔다. 어떤 녀석은 내 항문 속으로, 또 다른 녀석은 콧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살려주세요! 난 산 채로 먹히고 있었다. 아무도 내 외침을 듣지 못했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콧구멍 속으로 들어온 벌레는 목구멍으로 내려갔다. 또 한 마리는 내 귓속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나가야만 해! 내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 신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벌레들이 내 목구멍을 갉아먹기 시작하자.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 벌레들은 내 몸에 뚫려 있는 모든 구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귀로, 입으로, 요도로, 내 몸 안에서 끈적거리며 침을 흘리는 벌레들이 느껴졌다. 소리를 질러야만 한다. 이곳에서 벗어나야만 해! 나는 산 채로 잡아먹히면서, 홀로 어둡고 차가운 무덤 속에 갇혀 있었다. 공기는 점점 희박해지고 벌레들은 나를 먹고 있었다! 움직여야만 한다. 이 관을 부숴버려야만 해! 맙소사, 온 힘을 모아야 한다. 움직여야 하니까! 이곳에서 나가야만 해, 만드시. 움직인다! 움직인다! 마침내 난 해내 거야!
 
_ 파울코 코엘료 <순례자>中

 
자신의 증상과 비교적 일치하는 묘사라며 이 증상은 신기하게도 봄이 되면 나타난다고 합니다. 18도~23도 구간, 습도가 높은 상태.. 특히 온도가 낮았다가 봄이 오듯 기온이 상승하면 나타난다고 하면서 ‘봄 알러지’인가 보다 하고 씁쓸한 웃음을 짓습니다. ‘봄 알러지’ 얼마나 슬픈 알러지인가요? 멀린은 매우 오랜 시간 봄을 기다려 왔습니다. 차갑게 꽁꽁 얼려 버린 동토의 시간을 오래도록 버텨왔던 멀린에게 봄은 간절함입니다. 좀처럼 봄을 열어주지 않는 운명에 멀린은 슬픈 나머지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었습니다.

 


1차 여행은 동쪽으로 떠나는 여행. 그러니까 미래로 가는 여행이었다면, 2차 여행은 서쪽으로 떠나는 여행, 그래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을 해야 했던 거야. 그런데 과거도 정리하지 못한 채로 자꾸 미래로만 가려고 하는 나를, 우주는 수단과 방법을 막론하고 막아섰던 거야. 우주도 힘들었겠다. 내가 못 알아먹어서..

 
멀린은 별일을 다 당하고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면서도, 2차 여행을 떠날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운명이 채찍으로는 안되겠던지, 모드를 바꿔서 당근으로 유혹하기까지 말입니다. 결국 다음 해 2016년 6월, 괴질에 시달린 지 꼬박 1년 만에 멀린은 영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멀린은 영국정부의 초청으로 영국 음악산업계의 아시아 진출을 위한 프로젝트 의뢰를 받고 리버풀에서 열리는 컨퍼런스에 초청을 받아 런던과 리버풀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멀린은 조금 기대했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드라마틱한 반전이 될 수도 있겠구나. 고생 끝에 낙이 오는 전형적인 성공 스토리 말입니다. 그런데 운명은 또 막아섭니다. 영국에 브렉시트가 터진 겁니다. ([멀린's 100] 최순실과 동업할 뻔했던 이야기)

 


그걸로 끝이 아니었어. 브렉시트도 그렇지만 한국은 대통령 탄핵 때문에 더더욱 난리가 났지. 그냥 내가 서쪽 여행을 했어야 했을 뿐인 거야. 봄이 오려고 그랬던 게 아니야. 물론 다녀온 보람은 있었어. 그러고 나서야 집, 그러니까 연속해서 잘 수 있는 공간에서 편안한 잠을 매우 오랜만에 잘 수 있었지. 영국을 다녀오고 나서야 말이야. (당시 멀린은 증상 때문에 하룻밤을 세우고 다음날은 지쳐 쓰러져 자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나 봐. 당근을 거둬간 것뿐, 지난 3년 가차 없이 망가뜨려 버린 내 관계망을 우주는 철저하게 차단하기 시작했어. 이건 뭐, 무인도에 사는 거나 다름없었어. 이미 딸아이를 못 본지는 3년이 되어 가고 있던 시절이야. 다른 관계들은 말할 것도 없지. 영국에 다녀와서도 미션은 클리어 되지 못했던 거야.

 
멀린은 침묵으로 시간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너무 지친 탓이라고 변명해 보지만 그런다고 직관이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 침묵은 그를 서서히 가라앉히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주위가 한없이 고요해진 뒤에야, 정신이 명료해지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을 잃은 이 젊은 마법사는 머리 누일 공간조차 더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이것마저 언제 사라질지 모를 트렁크 두 개 정도의 짐을 들고, 15년 만에 결혼한 이후 떠나온 부모님에게로 다시 돌아갑니다.






박살 난 유리창은 암스테르담에 버려져 있다 | 순례의 서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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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뭐죠 이 고퀄의 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