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방 이야기 #3

in #kr6 years ago (edited)

나는 탈것에 대한 애착이 강한 편이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어렸을 때부터 이상하게 탈것에 집착했다. 자전거나 스케이트보드를 그렇게 좋아했다. 내가 태어난 아파트 단지는 경사진 언덕이 많았다. 언덕을 따라 탈것을 타고 내려가는 행위에서 희열을 느끼는 데는 환경의 영향도 한몫했나 싶다. 지금은 재개발되어 사라진 그 아파트 한쪽 구석에 경사가 상당히 심한 언덕이 하나 있었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언덕이라 자동차나 오토바이도 다닐 수 있었지만, 언덕의 끝이 놀이터로 향하는 계단에 막혀있기에, 자동차의 왕래는 거의 없는 그런 언덕이었다. 길이는 조금 과장하면 100미터 정도는 됐을 것 같다. 겨울이 시작되고 제법 눈이라도 내리면 어김없이 그 언덕은 눈으로 덮였고, 곧 일종의 훌륭한 슬로프로 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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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에서 기억과 가장 근접한 비탈길을 찾자니 위 사진이 그나마 근접한다. 길이는 엄청 길었다.



눈이 내려 쌓이기 시작하면 온 동네 아이들은 일종의 광분 상태에 빠졌다. 우리 형제도 마찬가지여서 눈이 쌓인다 싶으면 온몸을 겹겹의 옷으로 꽁꽁 싸맨 채 언덕으로 뛰어갔고, 이미 나와있는 동네 형 동생들이랑 눈을 퍼다 언덕으로 날랐다. 꼬꼬마들이 나르면 얼마나 날라겠냐만은, 얼른 눈이 충분히 쌓인 언덕에서 썰매를 타고 싶다는 일념 하에 법석을 떨었다.

눈이 제대로 쌓이면 곧 온갖 탈것들이 등장했다.
마음이 급했던 애들은 어디서 대충 비닐봉지를 구해와 엉덩이 밑에 깔고 앉아 언덕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고, 어떤 애들은 누군가 내다 버린 작은 나무 탁자를 거꾸로 엎어 놓고 썰매를 탔다. 탁자 다리는 손잡이 역할도 해서 나름 안정적인 자세들이 나왔던 기억이 난다. 비닐봉지 같은 경우에는 충격 흡수가 전혀 안돼 한번 타고나면 엉덩이가 상당히 아팠고, 야생(?)에서 급조하는 탈것들은 속도가 충분히 나지 않았다. 탁자를 엎어 놓은 경우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비유하자면 다른 탈것들은 롤러코스터요, 탁자는 회전목마였다랄까.

이렇게 원시적이었던 탈것들이 점점 진화를 시작했었는데, 어느 날 속도와 충격 흡수를 단번에 해결한 신소재가 등장했다. 비닐장판. 표면이 매끄러워 속도가 무지막지하게 빨랐고, 약간의 쿠션이 있어 비닐봉지 대비 승차감이 비약적으로 개선됐다. 다만 주행 방향 컨트롤이 굉장히 어려웠기에, 가끔 언덕 위를 바라보는 자세로 언덕 끝에 도착하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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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디작은 시장의 수요를 파악한 거상 a.k.a 문방구 아저씨는 곧 스키 를 가게에 들여놓으셨다. 플라스틱으로 조잡하게 스키 모양을 흉내 낸 탈것으로, 길이는 40-50cm 정도였다. 발과 스키를 연결해주는 바인딩 따위는 없는 글자 그대로 조악한 플라스틱 판때기나 마찬가지였는데, 이게 또 한바탕 동네에 유행을 했다. 언덕 경사가 시작되는 곳에서 스키를 11자로 가지런히 두고 쪼그려 뛰기 자세에서 한발 한발 얹으면 이내 스르륵 미끄러지기 시작해, 곧 엄청난 스피드를 냈었다. 너도나도 쪼그려 뛰기 자세를 취한 건 스키가 짧기에 서서 타면 균형을 잡기가 굉장히 힘들었기 때문이다. 가끔 국민학생 초등학교가 국민학교였던 시절임 형아들 중 서서 타는 형이 있으면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았다.

이 스키는 모든 면에서 훌륭한 탈 것이었는데, 단점이 있다면 바인딩이 없기에 타고 내려가다 넘어졌을 때 스키 혼자 쩌- 멀리 달아나 주우러 가는 데 한참 걸렸고, 아부지에게는 훌륭한 매가 된다는 점이었다. 이 스키는 짧고 가벼운 데다 넓적한 플라스틱인지라 스윙에 아주 적합했고, 허벅지나 엉덩이에 떨어지면 쫙쫙 달라붙어 좋나게 아팠다. 덕분에 쑥 마늘만 먹지 않고도 사람이 됐지만 아파도 너무 아팠다. 혹시나 사진이 있을까 싶어 뒤져봤는데 없다. 정녕 고대 유물인가 보다. 생김새는 상상에 맡기자..



이렇듯 도구라는 것은 그 소재와 형태가 굉장히 중요하다.
사용 목적에 부합하는 소재와 형태가 최적을 이룰 때 그 기능이 최대치로 뿜어져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보더들은 본인들이 추구하는 라이딩 Riding 에 맞춰 장비를 갖추게 된다. 흔히 스노보드라 부르는 판때기의 명칭이 데크 deck 인데,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데크들 마다 고유의 특성이 있다. 단순히 턴을 하며 슬로프를 내려가는 라이딩 에 적합한 데크가 있다면, 설면에서 점프를 하거나 점프 후 돌리는 그라운드 트릭 또는 줄여서 그트라고도 함 데 적합한 데크가 있고, 킥이라 부르는 점프대로 진입할 때 타는 데크도 있다. 경우에 따라 기물을 타는 용으로 데크를 준비하기도 하고, 모든 걸 다하는 데 적합한 올라운드 데크도 있다.

역시 길어져 또 나눠야겠다.
마치기 전에 동영상을 하나 남긴다. 꼬꼬마 딸들과 보딩 하는 준프로급 아부지의 라이딩 영상이다. 나도 저렇게 귀엽고 이쁜 딸들의 딸바보 아빠가 돼서 보드 태워주고 싶다. 물론 영상보다는 안전하게.ㅎㅎㅎ 아이들 너무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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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보고 오늘 눈도 와서 그런지 갑자기 썰매가 타고 싶네요!
업보트/디클릭 누르고 갑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ㅎㅎㅎ 주변에 언덕하나 있으시면 오랜만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여 보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

컼... 마지막 영상... 본인의 보드 컨트롤에 자신이 있으니 저런 걸 하는거겠지만... 한국에서 저런 영상 올리면 무개념이라고 욕 바가지로 먹겠는데요 ㅋㅋㅋㅋㅋㅋ 어릴 때는 겁없이 달리는거 참 좋아했는데 성인되니 겁이 늘어서 보기만 해도 움찔움찔 하네요-ㅅ-ㅋㅋㅋㅋㅋ

확인은 안했지만 아마 유튜브 댓글에도 그런 내용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ㅎㅎ 근데 워낙에 실력이 뛰어나서 원 ~.~ 저도 어릴 때는 막 들이댔는데, 어느정도 크고 부터는 몸사리면서 살랑 살랑 타게되더라고요. xD

어릴땐 정말 판때기 하나 가지고 비탈길만 가도 하루 가는 줄 몰랐었죠.ㅎㅎ
디클릭은 사랑입니다

해 떨어져서 들어오라는데 안 들어가고 버티다 맞은적 많았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

전 비료푸대를 탔던 기억이..

우왓 마지막 영상! 얼마만큼의 자신감이 있어야 딸에게 저런 스노우보드를 태어줄수 있는 걸까요? 저 딸아이가 되보고싶단 생각이 ㅋ 그렇다면 전 지금 스노우보드에 이미 푹 빠졌겠져 ㅋ 어떤 놀이기구보다 스릴 넘칠 듯 ^_^ 하늘을 나는 기분일 것 같아요!!

비료푸대를 못타봤네요.. 썰매계의 전설적인 명기라고 전해지던데.ㅠㅠ
Emma 라는 꼬마 날개짓하는 거 보세요.ㅋㅋㅋ 진짜 너무 귀여워요. 아마 저 꼬마들은 커서 보드 엄청 잘 탈 거에요. 이미 몸이 밸런스를 기억할테니 말이에요.

일본에서 열린 세계 스케이트보드에 출전했던 8살짜리 여자아이도 있었어요. 안전하게만 탄다면 ㅎㅎ

스케이트 보더 찾아봐야겠습니다. 유튜브에 있겠죠? xD

안그래도 오늘 한국은 첫눈이 왔다고 하던데 마첼린님 포스팅 보니 보드 타고 싶어 미치겠습니다 ㅎㅎㅎㅎ

이 시리즈 시작한 게 이쯤이면 스키장 개장할텐데.. 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아 보드타고 싶다... 라고 혼잣말 하다가 시작했습니다.ㅋㅋㅋㅋㅋ 저도 보드 타고 싶어 죽겠습니다 요즘.ㅋㅋ 지인들 카톡 돌려보니 이미 흥분이 절정에 달해있었지 말입니다.ㅠ

저는 보드 때문에 언젠가는 추운나라로 옮겨가 살 예정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저랑 비슷하시네....ㅎㅎㅎㅎㅎ
나중에 어딘가에서 만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다가.ㅋㅋㅋㅋ

어렸을 때 동네에서 스키타던 생각나네요 ^^
정겹운 글 잘 봤습니다 ~

다들 비슷한 추억 하나씩 있으신가보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시골이 고향이라. 동네 뒷산에 올라 눈설매 타던 기억이 나네요~^^

뒷산 썰매가 더 재밌었을 거 같아요.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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