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방 이야기 #2
우리나라 스키장들은 슬로프 정설 시간이 있다.
보통 아침 8시 슬로프 오픈하기 전과, 오후 4시에서 6시까지 두 시간 정도 슬로프를 정비하는데, 아침부터 오후까지 여러 스키어나 보더들이 쓸고 지나 간 흔적들을 정설차를 이용하여 고르게 덮어 다시 다지는 과정을 거친다. 정설 된 슬로프의 설면은 우리가 자주 먹는 피클의 절단면과 흡사하여 새로 정설 된 슬로프에서의 라이딩을 피클질
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피클질을 하려면 슬로프 정설이 끝나고 바로 라이딩을 즐겨야 한다. 슬로프 이용객 수에 따라 한 시간에서 두 시간이면 사라질 피클들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보드나 스키에 미친 사람들은 정설이 끝나고 맆트 운영이 재개되는 타이밍보다 일찍 나가 줄을 선다. 아무도 없는 정설 된 슬로프에서 방해받지 않고 라이딩을 하고 싶은 마음에 부지런을 떠는 것이다. 맆트의 가동이 재개되자마자 슬로프로 올라가 라이딩을 하는 일련의 과정을 땡보딩
또는 더 줄여서 땡보
라 부르고, 매니아들에게 이 땡보를 스킵 하는 행위는 죄악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보더들은 한을 지니고 있다.
90년대 초반부터 일부 해외파들이 스노보드라는 것을 접하고 국내에 들여와 국내 스키장에서 라이딩을 시도했었다. 하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국내의 각 스키장들은 스노보딩을 금지했었다. 그렇게 죄지은 사람 마냥 숨어지내던 보더들에게 처음으로 슬로프를 개방한 것이 성우 리조트였고 현 웰리힐리 파크 이후 90년대 말 2000년대 초 스노보드가 트렌드가 되어감에 따라 전면적으로 전국의 스키장에서 보더에게 슬로프를 개방했다. 따라서 한때 성우 리조트는 보더들의 성지로 불린 적이 있었다.
보더가 초기에 배척을 받았던 것은 이들이 소수였고, 스키어들에게는 불편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스키와 보드는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턴을 할 때 회전 반경에 있어서 차이가 많이 난다. 그리고 스키어와 보더의 라이딩 시 시선 처리가 서로 달라, 스키어는 옆이 잘 보이지 않으며, 보더는 뒤가 잘 보이지 당연하지만 -.- 않는다. 보더 대비 직선적으로 움직이는 스키어끼리, 또는 횡으로 슬로프를 넓게 사용하는 보더끼리 한 슬로프를 사용하면 크게 문제가 없는데, 이 둘이 섞이게 되면 충돌 사고가 꽤 자주 일어난다. 스키어는 측후방에서 사선을 그리며 나타나는 보더를 발견하기 쉽지 않고, 보더는 후방에서 직선적으로 움직이는 스키어를 감지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보더가 막 늘어나기 시작했을 때는 여기저기서 스키어 보더끼리 갈려 싸움이 일어나고는 했었다. 사람 모이는 곳이면 꼭 싸움이 있다.
여튼 보더들은 이렇게 배척당하는 과거를 지나왔기에, 그 누구보다 한적한 또는 아무도 없는 나만의 정설 된 슬로프에서 아름다운 호를 그리는 턴에 대한 로망이 크다. 야간 땡보의 분위기가 특히 매력 있는데, 이미 해는 지고, 이제 막 켜진 조명이 반사되어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슬로프가 맆트에 올라탄 내 발밑에 지나가면 고조되는 흥분 때문에 발을 구르게 된다. 숫자 그대로 1등으로 맆트를 타고 올라 간 사람이 이제 막 라이딩을 시작하여 고속에서 완벽한 턴을 그리기라도 한다면, 맆트 위에서 바라보는 그 장면은 정말 아름답다.
자나 깨나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던 라이딩과 맆트를 타고 올라가다 종종 발견하게 되는 고수들의 아름다운 라이딩에서 자극받게 되면 맆트에서 내리자마자 사냥감을 발견한 네발 동물처럼 경사면을 향해 달리고는 한다. 바인딩을 순식간에 체결하고 피클이 살아있는 슬로프를 타기 시작하면 데크의 엣지가 피클을 가르는 소리가 바람 소리와 섞여 들린다. 설면의 상태에 따라 데크가 내는 소리가 다르고 데크를 통해 전해지는 진동도 다르기 마련인데, 피클 위에서는 사아아아악 하는 부드러운 소리가 들리고 진동은 없다. 최상의 설질에서 라이딩을 하게 될 때의 느낌을 표현하자면 마치 생크림 위에서 라이딩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면 충분할까.
개인적으로는 자연설과 인공설이 적당히 섞인 설질이 가장 좋았는데, 눈 온 다음날 눈에서 습기가 빠져나간 상태가 최상이었다. 자연설이 너무 많으면 속도가 잘 나지 않고, 인공설이 너무 많으면 데크가 부드럽게 나가는 느낌이 부족하다. 시즌방에 인간 지표로 쓰이는 형이 하나 있었는데, 서로 취향이 너무 비슷해 그 형이 오늘 설질 극상
이라는 카톡이라도 보낼라치면 열일 제쳐두고 라이딩하러 뛰쳐나가고는 했었다.
이렇게 설질에 따라 데크의 반응이 달라지고 데크의 반응에 따라 즐거움의 크기가 달라진다. 설질이야 라이더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 라이딩을 최대한 즐겁게 즐기려면 역으로 설질에 따라 또는 라이딩 스타일에 맞춰 데크를 준비해야 한다. 이게 우리 시즌방 12명 인원이 마흔 장이 넘는 데크를 시즌방에 모셔둔 이유다.
돈 많냐고.
천만에. 술 담배 줄이고, 라면으로 허다하게 끼니 때워가며 장비 값 충당하고. 그래도 모자라 집안 살림 하나 둘 시즌방으로 퍼 나른 것이다. 그만큼 보드는, 아니 슬로프에서의 라이딩은 중독성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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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다보니 보드 시즌이 왔음을 실감하게 되네요 ㅎㅎ 결혼에 육아에... 요 몇년 슬로프와 멀리 했었는데... 예전처럼은 아니지만 아들 녀석 크면 보드 가르쳐주고픈 로망이 있습니다^^
결혼과 육아.ㅠ
실제로 많은 동지들이 결혼과 육아 크리 때문에 슬로프에서 사라졌지요.ㅎㅎㅎㅎ 요즘들어 왕년에 보드 좀 탔던 분들이 아들 딸하고 슬로프 누비는 케이스가 점점 늘어나더라고요. :)
그렇죠 2000년 초반까지만해도 보드탈 수 있는 곳이 많이 제한 되어 있었는데...ㅎㅎ
왜 보드만 제한하는거야!!! 슬로프를 나누던가!! 하면서 짜증냈던 기억이....ㅋ
피클질....... 생크림위에서 타는 듯한 느낌... 그 느낌 잊을수가 없죠 ㅜㅜ
지수님도 보드 좋아하셨군요! :))
이젠 보더가 월등히 많아져서 예전 처럼 막 싸우고 그러지는 않는 거 같습니다.ㅎㅎ
예전에 돈이 없었을 땐 용돈을 아껴가며 스키장 다녀오고 그랬는데 막상 회사를 다니고 돈을 벌게 되자 거의 못 갔던 거 같아요. 돈이 아니라 여유가 문제였던 거겠죠.
올해는 휴가를 내서라도 오랜만에 스키장에 한 번 가봐야겠네요. :)
아 진짜 공감합니다.
학생 때는 돈이 없어서, 직장 다니면서는 시간이 없어서, 항상 아쉬운 마음으로 시즌 접고는 했던 거 같네요. :)
어느새 시즌이 왔네요!
작년엔 바빠서 한번도 못가봤는데.. 올해는 아이들 데리고 꼭 가볼랍니다!
디클릭으로 사랑을 나누어요~ㅎㅎ
부럽습니다. :D
저도 얼른 아이들을...ㅎㅎ xD
이 글도 라이딩만큼 중독성이 강하네요 ^^
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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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machellin님 포스팅을 통해 겨울을 먼저 보게 되네요!! 피클질ㅋㅋ 용어가 너무 귀여워요ㅋㅋ
굉장히 많은 업계(?) 은어가 있습니다.ㅎㅎㅎㅎ 포스팅 하다보면 자연스레 소개해 드릴 것 같습니다. :D
전 왜이리 스키나 보드를 타면 허리가 아픈지..ㅠㅠ 그래봐야 한번씩 밖에 못타봤지만요.ㅎ
스키장은 정말 겨울만되면 올해는 갔으면.. 하는데..맨날 못가게 되네요.ㅋ
갔다오면 또 온몸이 아플거 같고.ㅋ
아하~~~
아픈 몸으로 두어번 더 타면 근육으로 전환됩니다!ㅋㅋㅋㅋㅋ
스키나 보드 탈 때 쓰는 근육이 평소에는 잘 안쓰는 근육이라 시즌 초에는 누구나 뻐근함을 느낀데요. 자주 갈 수록 울퉁불퉁해지다 눈 녹으면 근육도 따라서 녹아 없어지는 게 함정이긴 합니다만.ㅋㅋㅋ
읽어나가면서 보더들의 이야기가 참 재미있구나
싶기도 하지만
슬로프 정설? 라이딩? 데크?
모르는 단어가 있어서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네요
수고스러울수도 있겠지만
용어들을 일반인들도 알기 쉽게 풀이해주는 칸이나
공간을 만들어서 볼 수 있으면 좋겠구나
갠적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네요
이런. 너무 저만의 세계에 빠져서 썼나보네요. xD
좀 더 디테일하게 적어봐야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D
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여 보팅하였습니다. 스팀잇을 시작하시는 친구들에게도 널리 알려주세요.
수고 많으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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